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43)
흑백무제 1343화(1342/1351)
1343화. 천안(天眼)의 개화 (9)
퍽!
검에 가슴이 뚫린 마인 하나가 피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냉정한 눈으로 마인을 노려보던 패율이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마인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
“저는, 쿨럭! 저는 그저……!”
“시끄럽다.”
스릉.
피를 털고 납검한 패율의 얼굴엔 한 점의 동요도 없었다.
“어느 편에 섰든 각자의 의지대로 싸우면 그뿐. 네놈이 중원 무림을 배신하고 삼교에 들러붙었대도 너의 선택이니 존중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쿨럭! 콜록콜록!”
“너는 해선 안 되는 짓을 저질렀어.”
패율이 마인의 이마를 밟았다.
“부녀자를 겁탈하고 죽인 것도 모자라 열 살도 안 된 아이들까지 심장을 뽑아 죽였다. 이는 백번 죽어도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다.”
“사, 살려……!”
콰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마인의 머리통이 부서졌다.
머리가 으깨진 시신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던 패율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미친 새끼들.”
마음 같아선 정말이지 천 번, 만 번이라도 욕을 퍼붓고 싶었다.
문제는 그런 미친놈들이 여기 이 마인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살아가는 건지 모르겠어.’
삼교와의 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지만, 전면전을 제외하고도 싸울 상대들이 너무 많았다.
바로 이런 자들 때문이다. 이 마인은 무림 중소 문파 출신 제자 중 하나로, 약한 무공 때문에 멸시를 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삼교는 그에게 힘을 주었고, 마공을 연마해 단시간에 강해진 이자는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르며 본인의 힘을 키웠다.
‘만약 전쟁에서 승리한다 한들, 이런 놈들을 뿌리뽑지 못한대서야 무림은 여전히 혼란스러울 것이다.’
황궁을 장악하고 사천을 내부부터 무너트리려 했다. 무림맹에 세작을 심어 두었고 투왕 양천을 조종하여 대륙 전체를 혼란의 도가니로 빠트리려 했다.
그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 계략이었지만, 놈들이 뿌린 씨앗은 그런 거창한 곳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무림의 약자들을 유혹했는지, 느닷없이 천하에 마인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나마 배운 지 이삼 년이 채 안 된 마공이라 상대하기가 어렵진 않았지만, 개중에는 절정고수도 감당키 힘든 놈들도 존재한다고 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나.”
그때, 패율의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는 이 세상이 미치지 않았다더냐.”
패율은 절로 쓴웃음이 나오는 걸 느꼈다.
“장문 사형이 그리 말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장인릉이 고개를 저었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니 협사가 필요하고 도(道)가 필요한 것이다. 애초에 멀쩡한 세상이었다면 그 많은 사람이 협과 도의를 외칠 필요도 없었겠지.”
맞는 말이다.
“그래서, 너는 어떠냐?”
“예?”
“만족하느냐? 삼교가 흘리고 간 오줌 방울 같은 놈들을 처단하는 일 말이다.”
패율이 고소를 지었다.
“오줌 방울치고는 더러워도 너무 더럽더군요. 이런 놈들을 그냥 놔두었다가는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장인릉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재능 이상의 호승심으로 언제나 사고 치기 바빴던 어린 사제가 이제는 진심으로 협의를 가슴에 담았다.
참으로 멀리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는 사제의 성장이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사제는 더 크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호정 그놈이 왜 그리 삼교를 증오했는지.”
“…….”
“세상에 깨끗한 전쟁이란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삼교 놈들은 치졸함을 넘어 사악한 방법까지 동원하고 있어요. 위로는 무림맹과 묵룡부를 깨부수려 한 동시에, 아래로는 힘없는 자들을 사마(邪魔)로 오염시켜 대륙의 정기마저 위태롭게 만들려 했습니다.”
패율의 얼굴에 분노의 기색이 떠올랐다.
“이건 단순한 전쟁이 아닙니다. 설령 놈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한들, 놈들이 뿌리고 간 악(惡)의 씨앗을 죄다 걷어 내지 않는다면 세상은 크게 어지러워질 겁니다.”
장인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 줄 말은 많았다. 점창파 장문인으로서, 그리고 무림의 선배로서.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 어린 사제는 이제 협사가 되어 있었다. 무고하게 피해를 본 민간인을 위해 분노하는 저 얼굴은 점창파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협사의 그것이었다.
“한데 어쩐 일로 예까지 오셨습니까?”
“그냥저냥 와 봤다.”
“그냥저냥 올 만한 거리가 아닙니다만.”
장인릉의 얼굴에도 쓴웃음이 맺혔다.
“봉공 몇몇이 무림맹을 지키고 있지만, 사실 많이 지친다.”
“…….”
“많은 고수가 북부로, 동부로 가서 적들과 싸우고 있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역할을 부여받아 이곳 사령탑을 지키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 갈 무림인들을 생각하면 영 답답하더구나.”
“…….”
“그래서 그냥 와 봤다. 사령탑에 있어 봤자 먹고 싸는 것밖에 못 하니, 무림맹 인근에서 협행을 하고 있는 너라도 만나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싶어서.”
“장문 사형답지 않게 어찌 그리 약한 소리를 하십니까.”
“이놈아, 내가 언제 강했던 적 있더냐?”
“언제나 강하셨지요. 사형들 사이에서 저 같은 놈 위해 준다고 몇 년을 버티셨잖습니까.”
장인릉이 피식 웃었다.
“그런 걸로 강하다고 말하는 거라면, 네가 생각하는 강함의 척도라는 것도 참 시시하다.”
패율은 장인릉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당장 그 역시 같은 마음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망할 놈.’
연호정이 떠올랐다.
들려오는 소문에 따르면 그 녀석은 더 높이 날아올라 실질적인 천하제일인이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패율은 연호정의 성장에 기뻐하지도, 질투를 느끼지도 않았다. 질투하기엔 이미 상대를 인정한 지가 오래되었고, 기뻐하기에는 괘씸한 짓을 많이 한 놈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연호정이 강하든 약하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는 연호정의 무림 선배였고, 나아가 친구였다. 그거면 족한 사이였다.
‘흑제성 정리가 대충 끝나면 한번 보자고 하더니, 결국 또 멋대로 날아가 버렸구나.’
물론 그는 연호정을 이해했다.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연호정 역시 가끔은 쉬엄쉬엄 살고 싶을 것이다. 어떤 날은 친구들과 진탕 술에 취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인지 뭔지, 좀 쉴 만하면 중원 곳곳에서 삼교가 문제를 일으켰다.
남에게 맡겨 둘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연호정의 성격상 그러지는 못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연호정이 나서지 않았다면 더 큰 피해를 볼 뻔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패율이 연호정에게 투덜거리기만 할 뿐 욕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연호정의 운명이, 그의 인생이 얼마나 가혹한지 알기 때문에.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패율을 보며 무엇을 느꼈음인가?
장인릉이 입을 열었다.
“실은 네게 말해 줄 것이 하나 있다.”
“역시 그렇잖습니까.”
“이놈아, 심란해서 온 것도 사실이다. 와중에 전해 줄 얘기도 있었던 것뿐이야.”
“뭡니까?”
“강소성 전투에서 우리가 승리했다.”
패율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주십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왜 이제야 말해 줄까? 혹시 말해 줄 대상이 수십 일간 무림맹 일대를 쏘다녔기 때문은 아닐까?”
“…….”
“이 자식아, 어디 하늘 같은 사형한테 따지고 드는 거냐?”
“죄송합니다.”
괜히 머쓱해져 머리를 긁적이던 패율이 다시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잔여 병력을 이끌고 북부로 올라오는 겁니까?”
“이기기는 했는데, 놈들의 잔당이 여기저기로 퍼져 나갔나 보더라. 추격해서 거의 잡기는 했지만 아직 못 잡은 놈들이 있는 모양이야.”
“……!”
“정확하진 않지만, 그놈들은 강소성 북부로 도주했다고 한다.”
“강소성 북부…….”
“강소성 북부를 넘어가면 산동이 나온다. 그리고…….”
장인릉의 얼굴이 굳어졌다.
“현재 산동엔 또 다른 사음교의 세력이 출몰하여 지옥 같은 상황이 펼쳐졌다고 하더구나.”
패율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피해가 큽니까?”
“엄청나게. 죽고 다친 민간인들의 숫자가 일일이 세기 어려울 지경이며, 산동 중심과 동부 쪽 무림 문파 중 칠 할이 몰살을 당했다고 한다.”
“……!!”
“아마도 수뇌부급이 정예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온 모양이다.”
패율의 살기가 한층 거세졌다.
“그럼 강소성의 잔당이 산동으로 향한 게 우연은 아니란 말입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군사의 생각은 좀 다르지만.”
“군사는 뭐라고 했습니까?”
“우연과 우연의 중첩일 확률이 높다고 했다. 하긴, 지금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하겠느냐? 중요한 건 산동이 또 한 번 신음한다는 것이지.”
“연호정, 아니 흑제성주 쪽 정보는 없습니까?”
“있다.”
장인릉은 잠시 망설였다.
그 얼굴을 보며 패율은 깨달았다. 장인릉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것이라는 걸.
“어떻게 되었습니까?”
“섬서와 산서 쪽 전쟁은 어떻게 잘 넘긴 모양이다. 그 와중에 흑제성주는 적의 수괴가 산동으로 들어왔을 거라 예측했는데…….”
“…….”
“산동을 밀어 버린 적의 병력을 살핀 결과, 정말 그곳에 사음교의 수장이 있을 확률이 지극히 높으며 그의 무공은 못해도 권신 무허대사님 이상일 거라고 했다.”
패율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권신 무허대사는 천하제일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의 나이가 많고 이룩한 업적도 대단하여 무공이 그에 이르지 못했어도 인품만으로 천하제일이라 칭송받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무림인들의 인식 속에서 무허대사는 대륙에서 가장 강한 사람으로 기억된다는 것이다.
그런 무허대사보다도 강한 적이라면, 연호정이 이길 확률은 결코 높지 않다.
“또한, 각 전장에서 놈들이 기괴한 술수를 썼다고 했다. 단순히 각 지역을 초토화시키거나 점령하는 것이 아닌 다른 의도를 지닌 것 같다더군.”
“또 뭘 노리는 겁니까, 그놈들은?”
“모르겠다. 당장 사천에서 도주한 광혈교의 소교주도 잡지 못한 판국이다. 중원을 종횡한 광혈교 병력을 모조리 해치웠으나 아직 그쪽 교단도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닌바, 사술과 마공이학에 능한 놈들이니 또 무슨 술수를 쓸지 알 수가 없다.”
“무슨 수를 쓰든, 다시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적어도 사천은 어려울 것이다.”
“예?”
“사천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아미파가 멸문했고, 청성파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 그나마 멀쩡한 것은 당가지만, 그들이라고 사천 전부를 샅샅이 볼 수는 없어.”
“그 말씀은……?”
“그래, 만약 광혈교에서 뭔가 수작질을 벌인다면 사천이 또 한 번 위험해질 수도 있다. 만약 놈들이 다시 중원으로 들어올 속셈이라면, 마비된 사천의 정보력을 뚫고 올 수도 있겠지.”
패율이 이를 악물었다.
장인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얘기로 무림맹이 제법 시끄럽다. 당가 쪽에 연락을 취하긴 했지만, 정작 가주가 북부 전장에 있으니 빠르고 냉정한 판단을 내리기도 힘들 것이야.”
“…….”
“누군가가 사천으로 향해야만 한다.”
“그렇군요.”
“생각이 있느냐?”
“물론입니다.”
장인릉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형들과 점창의 정예들을 다 이끌고 가거라. 인선에 못을 박아 둘 것인즉, 그곳의 수장은 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