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44)
흑백무제 1344화(1343/1351)
1344화. 천안(天眼)의 개화 (10)
우우우우웅!!
혈린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품 안에 넣은 광옥이 진동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혈옥의 모사품이 된 광옥이 또 다른 구슬의 힘을 느끼고 발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혈린의 눈이 저 멀리 구름을 뚫고 우뚝 선 태산을 바라보았다.
“채정마진이구나. 교주님께서 큰 결심을 하셨어.”
사왕 중 술법과 무공을 동시에 연마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혈린이었다. 그는 사왕임에도 광옥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었다.
“칠사왕님.”
“말해라.”
항무의 얼굴은 창백했다.
지혈을 했지만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너덜거리는 왼팔은 아직도 치료가 다 되지 않았다.
혈린은 그가 멀쩡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말했다.
“저곳, 태산 정상에 채정마진이 펼쳐졌습니다. 저곳까지만 도착하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항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천신주, 인간의 손으로 만든 또 다른 혈옥이 탄생한다는 뜻이었다.
‘그래, 거의 다 되었구나.’
사음교의 사왕들은 물론 저 광혈의 소교주도 알고 있다. 사문향이 역천신주를 만들어 낼 것임을.
광혈의 소교주는 대세를 따르겠다며 고개를 조아렸고, 사왕들은 그것을 위해 목숨조차 바칠 준비가 되었다.
‘역천신주만 완성되면 모든 것이 끝난다.’
혈옥은 시간을 역행하는 역천의 마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천신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천신주가 완성되고 교주님께서 그것을 이용, 시간을 불과 십 년 전으로만 돌려도 역사는 바뀐다.
그렇다면 죽은 동생도 살 수 있을 것이고, 허무하게 스러져 간 수많은 교도들도 되살아날 것이다.
결정적으로 혈교가 부활할 수 있다.
교주님은 역천신주의 힘을 빌려 삼교를 하나로 통합하고 단숨에 혈교 부활을 선언, 천하를 자신의 발밑에 두실 수 있을 것이다.
혈육이 되살아나는 것도 좋지만, 혈교천하가 훨씬 더 중요하다. 혈교천하를 이루는 대신 혈육을 되살릴 수 없다고 한다면, 누구라도 전자를 선택할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혈교의 세상은 그렇게나 중요했다.
“하지만 따라오는 고수가 보통 끈질긴 것이 아닙니다.”
“안다.”
“모르실 겁니다.”
“뭐?”
혈린의 동공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당가주의 상단전 능력은 대단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저의 정신을 흐트러트리려 하고 있습니다.”
항무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당관과 모용세가의 정예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 거리를 무시하고 자네의 상단전을 공격하고 있다고?”
“그건 불가능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격이 아니라 혼란 유도입니다.”
“저놈은 자네가 광옥을 어떻게 다루는지 몰라.”
“모르지만 신기를 운용해 끊임없이 제 집중을 흐트러트리고 있습니다. 제가 이 일행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모양입니다.”
그게 정말 본능이라면, 당관이란 사내는 정말 지독한 놈이었다.
“이럴 때 사음제님이라도 계셨다면 좋았겠지만…….”
항무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음제 야율대극.
차후 사왕들을 이끌 고수이자 사음교에서도 손에 꼽히는 절대고수가 그였지만, 항무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혈린의 말이 맞다. 야율대극이라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일이 훨씬 더 수월해졌을 것이다.
“정 문제가 생기면 놈은 내가 맡겠다. 너는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힘을 비축해 놓도록 해라.”
지금껏 혈린은 단 한 번도 전투에 나서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마지막 한 방울의 힘을 쥐어짜서라도 어떻게든 태산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정확히는 교주님께 도달하기 위함이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어도 혈린만큼은 털끝 하나 다쳐선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항무가 재차 뒤를 돌아보았다.
뒤따르는 교도들의 안색이 창백했다. 수도 없는 격전을 치르면서 기어이 이곳까지 따라왔지만, 이미 그들의 체력은 한계에 달해 있었다.
‘어차피 생사의 끈 위에 서 있는 처지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 끈을 최대한 굵고 길게 이어 가는 것.
항무는 안력을 틔워 멀찍이 떨어진 당관을 응시했다.
표정이 읽히지 않을 정도로 먼 거리였지만, 그의 기세가 고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항무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내 반드시 너만큼은 내 손으로 죽일 것이다.’
동생의 원수다. 갚지 않을 수 없는 원한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놈의 철두철미함에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었다.
‘혈린처럼 저놈 역시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힘을 비축하고 있을 것이다.’
항무는 당관의 무공을 겪어 보았다.
독을 다루는 솜씨도 무서웠지만, 진짜는 초전 일발로 아군 병력의 절반 정도를 쓸어 버린 상상 초월의 무공이었다.
만약 그 무공이 온전히 자신에게만 향한다면, 솔직히 막을 자신이 없었다. 자존심도 강하고 심지어 원수인데도 항무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대로 승부를 낸다면 아마도…….’
항무는 태산 앞, 초토화가 된 대지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넓은 지역이 박살 났는지 일대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곳에선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순수한 파괴력만으로 땅이 저리 박살 났다는 것이다.
‘저기다.’
저곳에서 태산까지, 무극수가 한계를 쥐어짠다면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릴 수 있다.
항무는 운명적으로 느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력난신들이 싸운 듯한 저 땅이야말로 천하의 운명이 갈릴 곳이라는 걸.
‘한데.’
항무는 또 한 번 고개를 돌렸다.
‘이게 뭐지? 뭔가가 저 뒤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감각이 최고조로 날 선 상황이 아니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은밀한 기척들이 남쪽, 아니 서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냥 무시하기에는 그 은신술이 대단히 매서웠다. 필시 보통 집단이 아닐 것이다.
‘교주님께서 직접 나서신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패잔병들이란 말인데.’
항무는 생각을 접었다.
지금은 그런 것까지 염두에 둘 상황이 아니었다. 이제 곧 역천신주가 만들어질 터,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 철저하게 이곳을 사수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채정마진을 펼칠 줄이야…… 구슬 하나가 깨지기라도 한 것일까.’
그때였다.
쿠르릉.
항무의 눈이 좌측으로 돌아갔다.
“저놈들은……?!”
이제는 굳이 기척을 숨기지도 않는다.
두 명의 고수가 나는 듯한 속도로 달리고, 수백의 무사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군 일행과 평행하며 달리는 듯한데,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항무의 눈이 번뜩였다.
‘그놈들이다! 섬서에서부터 우리의 뒤를 쫓았던 놈들!’
만약 놈들 중 극사를 넘어선 고수가 있었다면 철저하게 떼어 놓았을 것이다. 그 정도가 아니었으니 무시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하지만 왜일까?
왜 이 순간에 저놈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어차피 자신의 무공이라면 상대도 안 될 놈들이었다. 한데도 항무는 묘한 불길함을 느꼈다.
‘이쪽 병력의 수준을 알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놈들은 우리가 뭘 할지도 몰라. 한데 어찌 이 중요한 순간에 거리를 좁히는 것이지?’
뭔가가 있다. 항무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놈들의 분노가 한계에 달한 것인지 채정마진의 기운을 느낀 것인지는 몰라도, 그냥 놔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일단은 당관부터 잡아야 한다. 그게 우선이야. 놈들에게 뭔가 수가 있다 해도, 극사에 달한 고수의 존재가 가장 성가시다.’
격전지로 예정된 곳과 점점 가까워진다.
이백 장 거리가 순식간에 백 장 거리로 좁혀졌다.
백 장에서 오십 장.
그리고 오십 장에서 이십 장 거리가 되었을 때.
혈린이 외쳤다.
“칠사왕님!”
“알고 있다!”
화아아악!
항무의 몸에서 최후의 힘이 불길처럼 치솟았다.
“임무를 달성해라!”
그때였다.
삐이이이익!
신경에 거슬리는 괴악한 소리가 좌측에서 터져 나왔다.
내공을 한껏 실어서 부는 피리 소리. 필시 누군가와 연락을 취하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
항무의 눈이 깊어졌다.
점점 가까워지는 두 고수, 흑제성의 오대신장인 강량과 진양의 얼굴이 보였다.
그중 강량의 입에 작은 피리가 물려 있었다. 제아무리 내공을 실었대도 그 작은 피리에서 천둥을 방불케 하는 소리가 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화아악!
혈린의 몸에서 은은한 핏빛 기운이 넘실거렸다.
‘뭐지.’
항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실체 없는 불길함이 조금씩 조금씩 흉부를 조여 오는 듯했다.
‘도대체 뭘 준비한 거냐?!’
그 순간이었다.
피이이잉!
가슴이 다 상쾌해지는 듯한 소리가 우측 전방, 머나먼 숲에서 들려왔다.
효시(嚆矢)가 아닌데도 효시보다 훨씬 더 청량한 소리를 뽐낸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엄청난 속도로 공기를 찢는 소리였다.
항무가 고개를 쳐들었다.
‘뭐?!’
하늘 높은 곳.
그곳에서 다섯 개의 가느다란 무언가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날아오른 그것들은 순식간에 점이 되었다가, 점점 크기를 키우며 지상으로 내려왔다.
‘화살!!’
화살 안에 담긴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도대체 얼마나 먼 거리에서 쏜 것인지 감도 안 잡히는데, 그렇게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화살에 실린 내공이 흩어지지 않았다.
극에 이른 내공 조예, 기공술로만 따지면 가히 극사의 고수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항무가 외쳤다.
“비켜라!”
퍼엉!
한발 빨리 앞으로 나가 힘차게 주먹을 뻗는다.
콰르릉!
무형의 권풍이 갈라지며 다섯 대의 화살을 휩쓸어 갔다.
퍼퍼퍼펑!!
폭죽 터지듯 박살 난 화살의 잔해가 눈꽃이 되어 내려앉았다.
항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정도 내공량이라니!’
내공의 밀도는 자신에 미치지 못한다. 담긴 영력도 그러했다. 극사에 이른 고수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 실린 내공량이 상상을 초월한다. 질적으로 우세하지 못하면 양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것일까. 저 가느다란 화살에 얼마나 많은 양의 내공을 퍼부었는지 주먹에 둔중한 감각이 전해졌다.
항무의 시선이 저절로 우측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저 멀리 동남쪽에서부터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한 명의 고수와, 멀찍이서 그 뒤를 따르는 엄청난 기세의 기마 부대를.
항무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여자?!’
얼굴이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거리다. 하지만 몸의 굴곡만으로도 여인임을 알 수 있었다.
붉은색 각궁을 들고 엄청난 속도로 달린다. 달리면서 허리춤에 맨 화살을 활에 거는데, 그 일련의 동작이 말도 못 할 정도로 자연스럽다.
이곳 산동 태산 인근에서 수많은 운명이 충돌하였다.
연호정이 그랬고 사문향이 그러했으며, 이제는 항무 일행과 당관의 병력이 그러한 운명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허락받지 않은 이들은 운명의 벽을 깨부수고 자신들만의 새로운 숙명을 이 자리에 풀어놓기에 이르렀으니.
사음교의 병력을 쫓아간 그때부터 중원의 모든 흑도 정보망을 가동한 강량과 진양의 지원 요청은 곧, 동부 전선에서 적을 쫓던 이 시대 최강의 궁수에게 닿았다.
그 즉시 적을 쫓기를 포기하고 최단 거리를 주파, 순식간에 산동에 이른 그 고수의 손에는 불타오르는 활과 치명적인 살의로 가득한 철제 화살들이 가득했으니.
중원 지리에 어두워 태산에 제대로 오르지도 못한 잔당들을 한참 우회해 돌파한 오대신장의 수좌와, 죽을 각오로 그녀의 뒤를 쫓은 유군 부대는 그들 스스로 만들어 낸 숙명의 땅, 태산에 이르렀다.
그리고 천리의 그물조차 찢어 내고 당도한 궁수의 화살 세 발이 한계까지 당긴 시위에 몸을 맡겼다.
혈린이 외쳤다.
“위험하오!!”
피피핑!!
직선으로 쏘아진 세 발의 화살이 파천의 위력을 담고 항무에게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