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46)
흑백무제 1346화(1345/1351)
1346화. 천안(天眼)의 개화 (12)
채정마진 내부에 들어간 사문향은 고요히 눈을 감았다.
후우우웅.
마진의 투명한 기운이 사문향의 손에 모여들었다.
그의 손에는 하나의 구슬이 반 치 정도 떠 있었다. 화옥의 기운을 담은 사옥이었다.
사괴술사의 얼굴에 걱정이 깃들었다.
‘구슬 하나가 깨지지만 않았어도 교주님께서 직접 들어가실 필요가 없었을 터이거늘.’
강소성으로 진입한 음황군에게 화가 났다.
패배할 수는 있다. 물론 그것부터 말이 안 되지만, 백번 양보해서 무림 전력에 밀릴 수는 있다.
하지만 구슬이 깨진 것은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만 번 죽어 마땅한 놈들이었다.
‘뭐가 되었든, 역천신주는 완성될 것이다.’
사괴술사의 두 눈에 기대감이 어렸다.
쿠르릉.
무너질 것처럼 진동하던 태산도 더는 이전처럼 진동하지 않았다.
이미 가동 가능한 충분한 지력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수만 년간 쌓여 온 태산의 정기가 사문향의 혈제기로 오염되니, 채정마진의 완성 시간이 더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곧이다. 정말 곧이야. 수십 년간 바라고 또 바랐던 예술 작품이 드디어 완성되는구나.’
그때였다.
“사괴술사.”
함께 산동으로 진입한 두 명의 사왕 중 하나, 이사왕(二邪王) 조홀(趙笏)이 특유의 끈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산 아래가 소란스럽소.”
“그래서 호법사제들을 몽땅 보내지 않았소?”
“차라리 우리가 갔으면 좋았을 것이오.”
조홀은 어지간해선 한번 내린 결정에 토를 다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괴술사는 그를 이해했다.
지금 사음교는 혈교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을 쌓는 중이었다. 심지어 교주님께서 직접 그 일을 진행하고 계시지 않은가.
당연히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소. 혈린은 정예 부대만으로 충분하다고 했소.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조홀이 툭 던지듯 말했다.
“부디 내 말을 곡해하지 말고 들어 주시오.”
“말씀하시오.”
“너무 들뜨셨소.”
사괴술사가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들떴소. 들뜨지 않을 수가 없지. 혈교의 오랜 역사 속, 혈옥을 인위적으로 완성한 자는 아무도 없었소.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소?”
“기분이 좋은 거야 이해하지만, 천리를 찢고 역천을 이루려는 이때야말로 운명이 가장 격렬하게 개입할 때라고 생각하지는 않소?”
순간 사괴술사는 흠칫했다. 그냥 흘려듣기에는 심상치 않은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팔사왕(八邪王) 명유(明幽) 역시 으스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교주님께서는 적흠을 그릇으로 다시 태어나셨소.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지 우리 같은 잡것들은 알 수 없지만, 이혼겁백(移魂劫魄)의 술법이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소.”
“…….”
“교주님께서 신의 능력을 지니셨음은 분명하나, 아직 저 몸에 적응하지 못하신 건 아닌지 걱정되오. 이런 와중에 적의 칼이 이곳에 도달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소?”
사괴술사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내가 방심한 것인가.’
돌이켜 보니 찝찝하긴 했다.
그는 천리를 찢고 역천을 이룩하는 장소에 있었다. 고금을 통틀어 어느 술사가 이런 위업을 이루었겠는가.
그 사실 자체만으로 그는 지극한 쾌락을 느끼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천신(天神)의 존재를 찢어 버리는 데에 한 손 보탰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심장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기뻤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아직 일은 끝나지 않았다. 두 사왕의 말대로 만전을 기하기 위해선 호법사제들만 보내선 안 될 것 같았다.
사괴술사가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호법장까지 죽은 지금, 교주님의 안위를 지킬 사람은 두 분뿐이오.”
다 죽어도 사문향과 혈옥만 무사하면 된다. 결국 호법사제들에게 맡겨 두자는 말이었다.
명유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정 그러면, 내 잠시 중턱까지만 다녀오겠소. 사괴께서도 말씀하지 않으셨소, 혈린의 영력이 바닥났다고.”
“…….”
“저토록 난잡한 기운이 얽힌 와중이라면, 대의를 위해서라도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소이다.”
결국 사괴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하면 팔사왕께서 혈린의 마중을 나가 주시오.”
명유의 얼굴이 밝아졌다.
“결정을 내려 주어 고맙소.”
역천신주를 생성하는 지금, 이곳의 최고 책임자는 사괴술사였다.
명유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산 아랫자락으로 신법을 펼쳤다. 지금껏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 역시 마음이 조급했던 것이다.
사괴술사가 탄식했다.
“역시 나는 사왕분들에 비하면 너무 순탄한 인생을 살아온 것 같소. 가장 방심하지 말아야 할 순간에 방심하다니.”
“그대는 혈교 역사를 바꾼 인물로 기억될 것이오.”
조홀의 눈에 사기가 스쳤다.
“그러니 한 점의 실수도 없이 일을 진행하시오. 교주님은 물론 그대의 안전도 내가 지킬 터이니.”
사괴술사는 조홀의 말을 십 할 믿었다.
조홀은 비록 이사왕이지만, 지닌바 무력은 일사왕 단공 이상이었다. 실제로 사왕을 통치하는 사음제 후보 일 순위가 조홀이었다.
그런 그가 사음제의 직위를 포기한 것은 야율대극의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자신이 더 강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고 야율대극이 자신을 뛰어넘을 거란 말과 함께 사왕으로 남았다.
단공에게 일사왕 자리를 양보한 것 역시 그와 호형호제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형은 단공이었다.
말하자면 조홀은 사왕 중 가장 신중하고 배려가 있는 자였으며, 그만큼 사음교를 향한 충성심이 뛰어났다.
그런 조홀이 분노하면,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질 것이다.
사괴술사가 사문향을 바라보았다.
얼굴은 달라졌지만 특유의 칙칙한 피부와 굴강한 신체가 몹시 믿음직스러웠다.
‘부디 대업을 이루소서.’
* * *
호법사제들의 움직임은 실로 기기묘묘했다.
얼핏 혈린의 신법과도 닮았다. 분명 땅을 박차고 달리는데도 허공을 부유하는 느낌, 마치 거대한 유령 군단을 보는 듯했다.
묵비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대단한 부대다.’
음울하면서도 사악하고, 차가우면서도 들불처럼 거세게 타오른다.
그 기세가 실로 엄청났다. 평지의 전면전으로는 감히 무림 최강을 자부하는 의정군이지만, 그런 의정군이라도 저들을 상대로 멀쩡하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들은 교주를 지키기 위해 함께 온 사제들이었다. 전투 부대로 한정하면 산천단을 이길 부대가 없지만, 개개인의 역량으로 치자면 호법사제와 영귀사제들이 최고다.
묵비는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저들을 상대할 수는 없어.’
마음 같아서는 용아포 몇 발로 숫자라도 줄이고 싶지만, 그녀는 지금 혈린을 쫓고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혈린은 멀어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눈이 돌아가는 속도였다.
‘빠르다. 하지만 곧 한계일 것이다.’
우우우웅!
묵비의 두 눈이 형형해졌다.
그녀는 혈린의 영력이 거의 바닥까지 메말랐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교도들과 보조를 맞추며 온 것이다. 힘을 최대한 비축하기 위해서.
혈린의 영력이 메마른 것은 바로 광옥 때문이었다. 지금껏 모은 역천사주 중 가장 큰 힘을 담은 구슬이었기에, 나아가 잠도 자지 않고 이동하며 광옥의 힘을 제어했기에 영력이 고갈된 것이다.
묵비에게 있어선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었다.
번쩍!
용비순행(龍飛瞬行)의 신법을 수도 없이 펼쳤다.
연가에서 받은 내력 회복단과 영단을 수시로 복용하며 이곳까지 왔다. 군병들에게 나눠 주려 했지만, 힘이 강한 장수가 전장을 이끈다는 말에 억지로 씹어 삼켰다.
체력은 떨어졌지만 힘은 넘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만한 힘을 비축하고도 적을 놓친다면 그런 꼴불견이 없을 것이다.
후우우우웅!!
홍련궁의 시위가 당겨지자 거대한 바람이 모여들었다.
혈린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자신의 등을 노리는 막강한 힘을 포착한 것이다.
‘망할 계집이!’
마음 같아선 당장 돌아서서 몇 합 만에 때려눕히곤 팔다리를 죄다 뽑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극단적인 영력 소모 탓에 싸워도 이기기 어려울뿐더러, 지금 그의 임무는 적을 죽이는 게 아니라 광옥을 무사히 운반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호법사제들이 와서 다행…….’
그때였다.
쾅!
폭음과 함께 쏘아진 무형의 화포가 돌풍을 일으키며 혈린의 이십 장 앞 대지에 적중했다.
퍼어엉! 콰르릉!
비탈길이 무너져 내리며 수많은 돌과 바위가 비처럼 쏟아졌다.
혈린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보법을 밟아 갔다.
파바바박!
묵비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혈린의 움직임은 절묘함 그 자체였다. 좌우를 수십 번 오가며 떨어지는 바위를 모조리 피해 산을 오르는데, 마치 어디로 움직여야 무사할지를 미리 알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묵비 역시 작정을 한 몸이었다.
까드드득!
다섯 발의 철전을 시위에 건 그녀가 황룡의 홍천기를 한계까지 집약시켰다.
혈린의 움직임이 다급해졌다.
타아아아아앙!!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파공성이 울린다.
벼락처럼 쏘아진 철전 다섯 발은 제멋대로 휘어지며 혈린이 피할 방위를 선점해 나아갔다.
파바바바박!
놀랍게도 혈린은 그마저 피해 냈다. 뒤를 보는 것도 아닌데 어찌 그런 게 가능한지 알 도리가 없었다.
‘영력!’
아니, 이제 묵비도 안다. 천하에서 가장 빠르고 정교한 자신의 화살을 무극수들이 어떻게 피해 내는지.
바로 상단전을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상대의 살의에서 공격선을 읽고, 공격선을 이해하며 종국에는 무공 자체를 이해하는 행위가 무극수에겐 가능했다.
‘그러나 투로는 알아도 전술까지는 모를 것이다.’
묵비가 손을 뻗어 홍천기를 집약시켰다.
순간 비탈길에 꽂힌 다섯 발의 화살 사이로 강력한 역장이 일었다.
그것만큼은 혈린도 예측하지 못했는지 크게 당황한 게 보였다. 넓게 퍼진 화살 사이를 질주하는 몸이 느려진 것이다.
‘이런 무식한!’
이건 영력을 이용한 허공섭물이 아니다.
말 그대로 넘치는 공력으로 펼치는 힘의 허공섭물이었다. 상단전도 운용되고 있겠지만, 그보다는 내력으로 짓눌러 버리겠다는 의도가 가득했다.
파아앙!
내력으로 짓누른 즉시 용비순행을 펼친 묵비가 홍련궁을 등 뒤에 걸고 허리춤에서 단창을 뽑았다.
혈린의 얼굴에 각오의 빛이 어렸다.
‘어쩔 수 없군.’
우우우우우웅!!
그의 몸에서 지독한 사기가 뿜어졌다.
메마른 영력과 바닥까지 떨어진 내력을 긁어모아, 지금 몸뚱이로는 절대 펼쳐선 안 될 무공을 펼친다.
화아아아악!!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핏빛 기운에 독기(毒氣)마저 어렸다.
혈음사공이었다. 교주의 핏줄 중에서도 재능 있는 자들만이 완성할 수 있다는 혈음사공을 그만의 술력으로 버텨 가며 배운 것이었다.
쾅!
허공섭물에서 벗어난 혈린이 몸을 돌리며 좌장을 뻗었다.
“죽……!”
순간 혈린의 눈이 흔들렸다.
‘어디?!’
궁사가 사라졌다.
적이 사라졌다는 걸 인지한 순간, 혈린은 어두운 그림자가 자신의 몸을 덮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곳에 단창을 시위에 건 채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나찰 귀신이 있었다.
“영력이 없어도 경험만 있으면 상대를 예측할 수 있지.”
혈린의 얼굴에 다급함이 일었다.
파아아아아앙!!
시위를 떠난 단창이 용아포의 힘과 함께 벼락이 되어 떨어졌다.
콰쾅!!
폭음과 함께 혈린의 몸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순간 묵비의 눈이 번뜩였다. 궁수로서 연마된 그녀의 눈은 혈린의 오른손에서 번뜩이는 묘한 빛의 구슬을 포착할 수 있었다.
‘저거다!’
파아앙!
용비순행을 펼치며 또 한 번 시위를 당긴 묵비.
연위가 그랬던 것처럼 구슬을 깨 버릴 요량으로 활을 겨눈 그때였다.
훅!!
묵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등 뒤에서 밀려오는 엄청난 사기가 그녀의 사지를 묶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