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48)
흑백무제 1348화(1347/1351)
1348화. 천안(天眼)의 개화 (14)
‘제기랄.’
묵비는 등골이 시큰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직도냐.’
도대체 이곳에 얼마나 많은 적이 온 것인가. 얼마나 많은 고수가 온 것인가.
정말 저 태산의 정상에는 사음교주라도 와 있는 것일까?
우우우우웅!!
거리가 이렇게 먼데도 팔다리를 놀리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 무거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도를 더했다. 적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번쩍!
혼신의 힘을 다한 용비순행으로 거리를 벌린 묵비가 혈린을 향해 철전을 날렸다.
티이이잉! 퍽!
빗나갔다.
적의 존재에 부담을 느낀 묵비의 육신이 이전과 같은 힘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의 화살은 정확했다. 다만 혈린이 어떻게든 몸을 굴려 화살을 피했을 따름이었다.
우우우웅!
영력을 어디까지 쥐어짠 것일까.
혈린의 머리카락이 조금씩 하얘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피부도 한층 푸석해졌고, 두 눈도 퀭하니 들어갔다. 바닥난 영기를 더 끌어모으는 과정에서 원정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오기 전에 죽인다!’
묵비는 곧장 시위를 당겼다.
철전을 걸어 쏠 시간이 없다. 홍련궁이 미친 듯이 불을 뿜었다.
퍼퍼퍼퍽! 쾅!
네 발의 무형탄은 빗나갔지만 한 발은 기어이 혈린의 어깨에 명중했다.
혈린은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그저 금이 간 어깨를 한 번 움찔하고는 다시 비탈길을 올라가려 할 뿐이었다.
묵비의 눈이 번뜩였다.
‘앞으로 세 발.’
위에서 내려오는 적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용비순행에 필적하는 신법이었다.
그녀가 시위를 당겼다.
터어엉! 퍼억!
혈린의 상반신이 틀어졌다. 어깨를 또 한 번 가격당한 것이다.
원래라면 어깨에 구멍이 뚫리거나 팔이 떨어져 나갔어야 했다.
온전한 실력을 지닌 무극수를 상대하는 것과 체력과 내공 소모가 극심한 무극수를 상대하는 것은 이렇게나 차이가 난다.
‘상성도 문제야.’
수많은 고수와 전투를 치른 묵비는 이제 상대의 기파를 읽고 상성까지 꿰뚫어 볼 정도의 안목을 지녔다.
‘지금 오는 자는 허공섭물을 전문으로 하는 상단전 사용자다. 지금의 내게는 치명적이야.’
묵비가 다시 시위를 당겼다.
방금 당겼던 것보다 훨씬 더 힘이 들었다. 팔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피이이잉! 퍼억!
날아간 무형탄이 혈린의 허벅지를 두들겼다.
혈린이 순간 휘청거렸지만, 금세 자세를 바로잡은 그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어깨와는 달리 허벅다리 뼈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모양이었다.
없는 영력까지 쥐어짜 두 다리에 몰아넣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번만큼은 묵비가 과녁을 잘못 정한 셈이었다.
‘마지막 한 발.’
초조함에 등허리가 축축해진다.
홍련궁의 시위가 이렇게까지 무거웠던 적이 있었던가.
‘간다.’
그때였다.
‘……!!’
이미 늦었음을 깨달은 묵비는 땅을 박참과 동시에 몸을 돌려 무형탄을 날렸다.
파아아아앙!
극한의 위기감 때문일까? 이번 일격은 평소 그대로의 위력이 나왔다.
퍼엉!
모습을 드러낸 고수가 한 손으로 무형탄을 쳐 냈다.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역시 이 정도인가.’
만전의 무극수는 무형탄을 손쉽게 막는다. 투로가 읽히는 것은 물론, 손 한 번 휘둘러 철판도 우습게 뚫는 무형탄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명유는 크게 놀랐다.
“충격이 상당하군. 극사에 오른 고수를 상대로 이 정도 궁술이라…… 네년이 천하제일궁사(天下第一弓師), 귀궁신녀 묵비렷다?”
묵비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많이 유명해진 모양이네.”
“극사에 오르고 말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야. 이 드넓은 대륙 땅에서 천하제일 소리를 들을 정도의 위인이다. 기억해 두지 않을 도리가 없지.”
목소리는 스산한데 말투는 고풍스럽고 정중하다.
묵비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진짜 위험하다.’
이제 그녀도 안다. 고수들의 정중함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진짜 고수들은 결코 흥분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극에 올랐느냐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고수는 어떤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으며 자신의 주관을 철저하게 지킨다.
눈앞의 이자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욕을 하고 희롱이라도 쏟아 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음에 빈틈이 있는 자라는 뜻일 테니까.
‘어떤 빈틈도 보여 주지 않을 자다.’
묵비는 절로 연호정을 떠올렸다.
‘연 공자. 이런 고수를 상대로는 어떻게 싸워야 하죠?’
연호정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빈틈이 없어? 없으면 만들어야지. 어떻게 해도 답이 안 나와? 그럼 도망쳐.”
실제로 그런 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다.
그나마 연호정을 떠올리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녀에게 있어 연호정은 그런 존재였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도 긴장을 풀어 주는, 차분함을 주는 그런 사람.
명유의 눈이 번뜩였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도 빠르군. 게다가 그 내공과 실력…… 손 한번 뻗으면 바로 극사의 문에 닿겠구나.”
“…….”
“이만한 실력자를 살려 둘 수는 없지. 그 재능과 실력이 아깝지만, 네 생은 여기까지다.”
묵비의 얼굴이 대번에 차가워졌다.
“미안하지만 내 인생이 너 같은 놈에게 끝장날 정도로 박복하다고 생각하진 않아.”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그러다가 삼류가 탄 독에 어이없이 죽거나 객사하는 거지. 그런 게 인생 아니겠나?”
“적어도 내 인생은 아니야.”
“배포도 마음에 들어. 자네가 본교에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언뜻 여유로워 보이지만 묵비는 알고 있었다. 상대가 끊임없이 자신의 손과 발, 그리고 진기를 확인하고 있다는 걸.
빈틈없는 상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무인으로서 빈틈이 없어도 하수 앞에선 약간의 방심을 하기 마련인데, 이자에게는 그마저도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방심 없는 기세는 곧, 매서운 공격으로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그럼.”
파아아아악!
한 번 땅을 박차니 무려 십오 장 거리를 벌린다.
명유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내 역장 안에서 저 정도 도약을? 저 녀석은 진짜군.’
그래서 경각심이 더욱 커졌다. 이미 극사에 반쯤 발을 걸친 것이나 다름없는 녀석이 백전의 경험과 지극히 민감한 감각마저 갖췄다.
저런 녀석은 꼭 죽여 놔야만 했다. 저 정도 재능을 타고난 자들은 몇 년, 아니 몇 달만 지나도 훌쩍 성장하여 희대의 난적이 되고는 한다. 어쩌면 몇 달이 아니라 며칠 새가 될 수도 있다.
명유가 묵비를 향해 손을 뻗었다.
후욱!
묵비는 자신의 몸이 거대한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화아아아아악!!
모든 것이 명유의 손으로 빨려 들어간다. 엄청난 인력이었다. 전력을 다하면 수백 근 바위도 통째로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엄청난 위력!’
훅!
홍천기를 극성으로 운용해 두 다리를 땅에 박았다.
명유의 눈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내공량이 더 많아?’
아니다.
상대의 내공량은 자신이 예상한 그대로다. 그조차 이미 자신에 필적할 정도인바, 그보다 더 많은 양을 보유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건 신공이군.’
황룡의 조각을 받은 홍천기가 지닌 내공 이상의 출력을 내고 있었다.
명유의 눈빛이 대번에 차가워졌다.
원래도 죽일 생각이었지만, 절대 방심하지 말고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방심 따위 하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묵비가 대단한 모습을 보여 줄수록 생사대적을 상대한다는 마음가짐을 갖게 된다.
묵비의 얼굴에 식은땀이 어렸다.
‘무조건 진다.’
싸움이란 해 봐야 아는 것이라지만, 저자는 차원이 다르다.
차라리 저자보다 더 강한 자와 싸우는 게 낫겠다. 저자는 자신의 세계에선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자유롭게 놔두지 않는 자였다.
묵비에게 시선을 고정한 명유가 혈린에게 말했다.
“속히 움직이게. 자네 뒤는 내가 봐줄 터이니.”
“고맙습니다.”
파아악!
혈린이 다시 힘을 내서 달렸다.
애초에 그와 동조된 구슬은 그가 아니면 운반할 수가 없다. 명유가 그에게서 구슬을 넘겨받지 못하는 이유였다.
묵비가 이를 악물었다.
혈린은 비틀거리면서도 빠르게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이전에 비하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속도였지만, 최소한 절정고수 정도의 속도는 냈다.
‘틀렸나.’
명유가 입을 열었다.
“이래서 탁상공론이 위험하다는 거지. 직접 와 보지 않고서야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하늘이 내린 군략가도 모르는 법이야.”
“글쎄다.”
“음?”
“내가 아는 사람 중엔 싸우지 않고도 전황을 훤히 꿰뚫어 보는 군략가가 있지.”
“아, 연호정 말인가.”
명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남자인 건 인정하지. 하지만 그의 존재가 우리 싸움에 무슨 의미가 있나?”
“…….”
“나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뱉었을 뿐이야. 신경 쓰이게 했다면 미안하군.”
명유의 눈빛이 다시 바뀌었다.
진짜 죽일 기세다.
“시작해…….”
타아아아앙!!
홍련궁에서 뿜어진 불꽃이 명유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갔다.
최속의 장전, 최대의 내공, 최선의 투로를 다 담아낸 일격이었다. 빈틈은 없어도 상대가 가장 딱딱해지는 순간을 노린 회심의 일격이었다.
퍼어엉!
명유의 상반신이 작게 흔들렸다.
하지만 묵비의 몸은 여전히 그의 역장 안에 있었다. 명유에게 아무 피해도 주지 못한 것이다.
“……이번 건 꽤 아프군.”
명유의 왼손이 붉게 달아올랐다. 극사의 내공을 뚫고 타격을 준 것이다.
그가 힘차게 진각을 밟았다.
쿠르릉!!
자욱하게 피어난 먼지가 더 강한 압력을 자아냈다.
묵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안 그래도 몸을 가누기 어려울 지경인데, 이제는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였다.
‘엄청난 압력이다.’
최대 출력으로 끌어올린 홍천기를 더 강하게 뿜어내려 애썼다.
치이이이익!
묵비의 몸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놀랍게도 그녀는 생각만으로 신공의 한계 출력을 넘어섰다. 그녀의 몸이 아주 약간이지만 자유를 되찾았다.
명유의 좌수가 천천히 주먹으로 변했다.
콰릉!
허공을 가른 그의 주먹에서 회색빛 권풍이 쏟아졌다.
죽으라는 그 흔한 말도 없이 대번에 살초를 쏟아 냈다. 심지어 힘을 아끼지도 않았다.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으로 공격하는데, 반격은커녕 회피나 방어의 여지조차 주지 않을 속셈으로 보였다.
‘피해라.’
명유의 권풍이 물결을 일으키며 다가온다.
빠른데도 느리게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느린 것은 자신의 몸과 호흡이었다.
‘피해!!’
그때였다.
묵비는 등 뒤가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바람은 염왕이 부는 콧바람이 아니었다.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하늘 높은 데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천풍(天風)의 의지가 그 안에 있었다.
콰앙!
휘어져 들어온 천풍검격이 명유의 권풍과 만나 강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큭!”
충격파에 휩쓸린 묵비가 뒤로 훨훨 날아갔다가 턱, 하고 멈추었다.
“잘하는 짓이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묵비가 고개를 돌렸다.
당관이 그녀를 받쳐 주고 있었다.
“활 솜씨는 하늘을 찌르는데 기공술은 왜 그 모양이냐? 역시 기공술까지 전수해 줄 걸 그랬나?”
“당가주님!”
“이럴 때가 아니지 않나? 저 녀석은 선배에게 맡기고, 우린 그 시뻘건 놈이나 쫓자.”
묵비가 다시 고개를 틀었다.
그곳에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한 명의 노검사가 있었다.
고고한 자태였다. 한옆으로 비껴든 장검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빛깔이 모여들고 있었다.
명유의 눈이 깊어졌다.
“검제 남궁승.”
“그래, 내가 남궁승이다.”
남궁승이 검을 정면으로 들어 명유를 겨누었다.
“긴말은 필요치 않겠지.”
파아아악!
두 고수가 서로를 향해 달려들고, 당관과 묵비는 둘을 뛰어넘어 태산 정상을 향해 내달렸다.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전장, 천리가 걸린 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