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49)
흑백무제 1349화(1348/1351)
1349화. 천안(天眼)의 개화 (15)
조홀의 눈이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뭔가가 진행되고 있다.’
우웅! 우웅!
채정마진 안에서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은 사문향의 주변으로 어두운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기운은 참으로 기괴했다. 분명 어두운 게 맞는데, 흑색인지 회색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어떻게 보면 아예 무색투명한 것처럼도 보였다.
마치 형체를 갖추지 못한 뱀들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몸을 흔드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뱀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조홀이 사괴술사를 바라보았다.
사괴술사는 눈을 감고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 무슨 발음인지 알아듣기도 어렵다.
다만 그의 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걸 보면 아마도 중요한 고비를 넘기려는 것 같았다.
‘괜찮으려나.’
그가 힐끔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운무가 가득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이 안 된다. 그러나 그의 기감은 자욱한 운무조차 뚫고 올라오는 살기와 전의를 느끼고 있었다.
이전보다 더 강하고 격렬해진 기운.
‘팔사(八邪)가 간 것이 다행이군.’
희미하게 느껴지는 초고수의 존재.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푸른 검기가 저곳에 있다. 무림 측 초고수가 또 등장한 것 같았다.
조홀의 얼굴에 약간의 초조함이 어렸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느낌이다. 이 또한 저 빌어먹을 하늘이란 놈이 개입한 것인가.’
애초에 그는 운명이니 순리니 하는 것들을 믿지 않았다. 혈신을 제외한 초월적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그였다.
하지만 이곳까지 오며 사문향과도, 사괴술사와도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 보이지 않는 섭리가 있음을 인정했으며, 부서지지 않는 절대적인 원칙 또한 존재함을 알았다.
그들이 그렇다면 그게 맞을 것이다.
사괴술사는 사음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학식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가 섭리를 찢고 이 세상의 절대 원칙을 부술 수 있다는 생각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진정 하늘은 존재하는가.’
단순한 비유 따위가 아닌 하나의 개념으로서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하늘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우리를 실패시키고자 하겠군.’
만약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어떠한 초월적인 의지가 개입한 일이라면, ‘아직’ 인간인 우리가 그 힘을 이겨 낼 수 있을 것인가?
‘이겨 내야만 한다. 이곳에는 교주님이 계셔.’
사문향을 보는 조홀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대업을 이루실 수 있도록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때였다.
쿠르릉.
저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폭음이 메아리가 되어 산 전체로 퍼져 나갔다.
‘팔사.’
팔사왕 명유의 음황기(陰荒氣)가 느껴졌다.
음황무 특유의 독기를 완전히 배제한 후 상단전의 영력을 이용, 자신만의 무공으로 재해석한 남자가 명유였다.
‘누군가가 올라오는군.’
우우웅!
조홀의 두 눈에 군황사기(群荒邪氣)가 어렸다.
‘십사.’
메마른 영력, 줄줄 새는 생명력이 느껴졌다.
올라오는 속도도 꽤 느리다. 그래도 어느덧 중턱까지는 올라온 듯했다.
조홀의 얼굴에 다시 초조함이 떠올랐다.
‘과연 무사히 올라올 수 있을까?’
지금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설령 모두가 죽어도 사문향에게 이상이 생기면 안 된다. 그는 신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만약 실패한다면, 우리는 역천사주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한다. 몇백 년이 걸릴지 모를 일이야.’
그때였다.
“……!!”
조홀이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록 각자가 다른 무공을 익히고 있지만 근본은 같다.
그 근본의 힘이 외치고 있었다. 이 땅에 또 다른 힘이 도착했다고.
조홀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단향.”
묵비와 의정군보다도 늦게 도주한 오사왕 단향과 아직 건재한 산천단, 그리고 단향 휘하의 절정고수들인 뇌영단이 태산에 이른 것이다.
* * *
“형님!”
“안다!”
수천 리 길을 달려왔음에도 그들의 투지는 굳건했다.
오히려 운명의 땅에 이른 지금, 그들의 힘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떨어진 체력도, 소모된 내공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강량이 외쳤다.
“의정군을 도와라!”
“존명!”
모용군과 함께 섬서로 향했다가 비로소 이곳, 산동에 이른 흑제성의 병력은 상당했다. 당장 흑제성 주요 병력의 이 할에 달하는 숫자였으니 문파 몇 개라도 쓸어 버릴 만한 전력이었다.
지치고 힘들지만 두 눈에 떠오른 결기는 강량과 진양 못지않다.
파바바박!
그 먼 거리를 달려왔는데도 일사불란하게 이동한다. 철저하게 훈련받은 군대를 보는 듯, 거의 이천에 달하는 흑제성 산하 병력이 호법사제들의 후미를 향해 돌진했다.
강량이 힐끔 태산 자락을 바라보았다.
‘누님.’
마침 딱 당관과 남궁승의 도착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묵비가 보였다.
‘와 줘서 고맙소!’
솔직히 긴가민가했다. 아무리 흑도의 정보력이 빠르고 날카롭다 한들, 대륙을 가로질러 강소성까지 도달하는 데엔 시간이 걸릴 테니까.
심지어 도달해도 강소성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사실상 반쯤은 포기한 지원 요청이었다.
그러나 묵비와 의정군은 모든 것을 내던지고 운명처럼 이곳에 이르렀다.
‘이제 우리도 밥값을 해야지!’
파아아앙!
강량과 진양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호법사제들을 향해 질주했다.
이천에 가까운 병력을 달고도 선두에서 돌진하는 그들의 모습은 무모해 보였다. 그러나 흑제성의 철왕단(鐵王團)과 비천단(飛天團)의 무사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과거 흑도의 수장들은 수하들을 부릴 줄만 알았지, 일선에 나서서 칼을 휘두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조직에서 수장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지만, 용맹을 보여 줘야 할 때는 또 보여 줘야 하는 것이 흑도였다.
지금 그들은 숱한 훈련과 전투 속에서 당당히 앞장서는 흑도의 수장들을 보고 있었다.
지친 건 마찬가지일 텐데도 조금도 힘든 내색 없이 우악스러운 대도와 날카로운 검을 들고 전진하는 두 고수의 뒷모습에, 흑제성 병력의 사기가 무섭게 끓어올랐다.
진양이 외쳤다.
“다 조져 버려!”
부우우웅!
땅을 박차고 날아오른 그가 상천뇌화도(翔天雷火刀)를 구사했다.
번쩍!
광범위한 영역을 아우르는 불꽃 같은 도기가 호법사제들을 뒤덮었다.
콰앙!
진양의 눈이 깊어졌다.
후미의 호법사제 중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놈들, 역시 보통이 아니야.’
정면에서 막았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하지만 후방에서 물고 늘어졌는데도 딱 필요한 만큼의 병력이 몸을 돌리고 내공을 발출해 충격을 분산시켰다.
마치 이런 공격은 이렇게 막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래도 빈틈이 생겼을 것이다.’
진양의 생각은 정확했다.
그리고 그와 똑같은 생각을 한 강량이 그 빈틈을 정확히 파고들어 귀화마검식을 펼쳤다.
번쩍! 번쩍!
거대한 낫과 같은 검기가 좌우로 휘둘러지며 호법사제 넷의 목을 절단했다.
강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힘을 제대로 실어서 내친 검격이었다. 검기의 범위로 봤을 때, 최소한 대여섯은 죽어야 했다.
‘정말 보통이 아니군.’
개개인의 무력도 뛰어나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건 힘을 분산시키는 저 기묘한 내공법이다. 소수면 소수, 다수면 다수의 힘을 내공 경파로 상쇄하는 기술은 그간 본 적이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사사삭!
호법사제들이 칼을 휘둘렀다.
그들의 칼은 저 북방식 만도(彎刀)와 비슷했다. 중원의 박도(朴刀)보다 얇고 짧지만 부드럽게 휘어져 있어, 마상(馬上)에서 적을 베기 좋은 형태였다.
그러나 그들은 마상이 아님에도 무시무시한 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쩌저저정!
대도를 신들린 듯 휘둘러 도기를 부숴 버린 진양이 다시 한번 상천뇌화도를 휘둘렀다.
화르륵!
불꽃을 일으키며 낮게 치받아 가는 도기.
호법사제들의 눈이 사이하게 빛났다.
콰콰쾅!!
만도를 역수로 쥐고 땅에 꽂아 방패 같은 기운을 방출했다.
하지만 진양의 도기는 그 내력 방패의 일부를 뚫고 들어가 호법사제 셋의 발목을 잘라 냈다. 발목이 잘린 호법사제들은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지만 비명을 지르지도,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지도 않았다.
진양은 섬뜩함을 느꼈다.
‘이런 귀신 같은 놈들이 있나.’
그때, 호법사제의 부대가 반으로 쪼개졌다.
화아악!
정확히 중간부터 뚝 갈라져 한쪽은 의정군을, 다른 한쪽은 흑제성 병력을 향해 돌진했다.
누구도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였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 건지 보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철왕단과 비천단이 들이닥쳤다.
쩌저저저정! 콰쾅!
피 보라가 일었다.
강량과 진양이 아우르지 못하는 곳에서 수십 명이 죽어 나갔다.
호법사제는 열 명의 사상자가 났고, 철왕단은 이십여 명, 비천단은 삼십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힘으로 부딪쳤지만 큰 손해를 보았다. 호법사제 개개인의 무력이 철왕단과 비천단을 압도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화아악!
강량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세 줄기 검기가 원형으로 회전하며 여섯 개로 늘어났다.
육검(六劍)의 귀화마검식. 본격적인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퍼퍼펑!
내치는 검결이 지극히 실전적이고도 패도적이었다.
귀왕진기 특유의 기괴한 기운이 호법사제들의 사기를 흐트러트리고 목에 구멍을 내 놓았다.
진양이 외쳤다.
“진정해라! 내공을 낭비해선 안 돼!”
그의 말이 옳았다.
귀화마검식의 육검기는 내공 소모가 상당하다. 호신강기처럼 여섯 줄기의 검기로 몸을 보호하며 지속적으로 예기를 증폭하는 이 술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위력이 상승하는 대신 내공 소모가 크다는 단점이 있다.
장기전에 유리한 동시에 불리하기도 하다는 것이다. 특히나 이런 대규모 싸움에서 자칫 잘못하다간 눈먼 칼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
강량이라고 그걸 모르지 않았다.
“형님이 지켜 주시오!”
화르륵! 쾅!
신경질적이기까지 한 칼질에 호법사제 둘의 몸이 사선으로 쪼개졌다. 쪼개진 그들의 시체는 순식간에 불이 붙더니, 그대로 시커멓게 눌어붙었다.
극한에 이른 열양공, 기천웅의 깨달음을 덧붙인 진양의 힘이었다.
“지키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중요한 건 이기는 거다!”
“그러려고 이러는 거요!”
퍽! 쩌저저저정! 콰득!
손잡이로 호법사제 하나의 머리통을 찍고, 쏟아지는 만도를 튕겨 내며 기어이 쳐들어가 또 한 놈의 목을 꺾었다.
검법만이 장기가 아니다. 숱한 실전으로 연마된 강량은 근접 체술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중앙을 뚫겠소!”
“괜찮겠냐?”
“이놈들의 내공 제어 능력이 너무 뛰어나! 부대 하나를 몇 조각으로 찢어 놔야 상대해 볼 만할 것이오!”
“좋다!”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설령 그것이 잘못된 전술이라 한들, 생사가 오가는 지금 고민을 길게 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진양이 함성을 내지르며 대도를 휘둘렀다. 화염 폭풍을 일으키는 도기에 호법사제들이 연신 밀려 나가고, 그 틈을 노린 강량이 소름 끼치는 검기로 착실하게 적을 죽여 나갔다.
중앙을 뚫어 적을 두 부대로 쪼개 버리겠다는 작전이 성공 직전에 이르렀을 때.
“이런 시발!”
진양이 쌍소리를 뱉었다.
“적의 지원군이다! 엄청난 숫자야!”
저 멀리 태산 남부에서 오천에 가까운 병력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화왕 단향과 산천단, 그리고 뇌영단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