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5)
135화. 욕심의 대가 (5)
하남과 호북, 안휘 세 개 성의 접경지대에 있는 대별산은 사시사철 다양한 경관을 자랑한다.
봄에는 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진다. 가을에는 단풍이 고개를 들며, 겨울의 설경은 장관 중의 장관이다.
계절마다 뚜렷한 경치를 자랑하니 명산(名山) 소리 듣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지금 이 계절, 겨울.
무림맹이 자리 잡은 대별산 곳곳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이틀 동안의 폭설이 주춤하니, 이제야 구경할 맛이 난다.
무림맹에 모인 젊은 청춘들은 무림맹 안의 언덕을 오르거나 맹외(盟外)로 나가 산 전체를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니 추위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겨울에만 볼 수 있는 대별산의 절경을 포기한 사람도 많았다.
윤호(尹縞)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콰앙!
윤호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화산파를 대표하는 절학 매화삼십육검(梅花三十六劍)의 화려한 검초가 일권(一拳)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경쾌하고 빠른 검결로 상대를 압박하는 매화검 특유의 초식이 압도적인 힘에 박살 나 버린 것이다.
퍼어억!
“끄어어억!”
정말이지 이번만큼은 이러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아파도 너무 아팠다. 싸움 중에 고통을 느낄 만큼 집중력이 얕지 않은데, 이 인간이 내치는 권각(拳脚)은 하나같이 끔찍한 고통을 유발했다.
“아프냐?”
무릎을 꿇고 부들부들 떨던 윤호가 고개를 들었다.
태양을 등지고 선 푸른 눈의 귀신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아프다. 내 정신이 아파.”
“커헉! 헉헉!”
“이제 그만 와라.”
“하, 한 번만 더…….”
“싫어.”
퍼억!
훨훨 날아간 윤호가 파군각 입구 담벼락에 부딪히곤 땅으로 떨어졌다. 꽁꽁 얼어붙은 바닥에 대자로 엎어진 윤호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연호정이 옥청에게 외쳤다.
“야! 말코!”
“예, 예?”
“이 새끼 문밖에다가 던져 놔.”
“이 겨울에 말입니까? 내가고수라도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는…….”
“시벌, 승부를 내는데 죽을 각오도 안 하고 왔겠어? 치우라면 치워, 인마!”
“옙.”
옥청은 후다닥 윤호를 들었다.
왜일까? 윤호의 몸이 유독 가볍게 느껴졌다. 윤호와는 몇 번 만난 사이지만, 몸이 이렇게 가벼운 줄은 몰랐다.
‘죽은 건 아니겠지?’
다행히 생기(生氣)는 활발하다. 진짜로 죽일 듯이 걷어찼으면서도 정신만 잃게 만든 모양이다. 입은 거칠어도 은근히 정이 있는 사람이다.
“저…….”
“뭐.”
“제, 제가 화산파 거처에 데려다 놓고 와도 되겠습니까?”
“그러든가 말든가.”
“감사합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안 와도 돼.”
옥청은 재빨리 신법을 펼쳤다. 무당파 최고의 신법 제운종(梯雲縱)이었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검은 더럽게 가벼운 놈이 신법 하나는 발군일세. 아닌가? 저놈은 무공이고 몸이고 다 가벼운 놈인 건가?”
묵비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독특한 신법이네요. 역동적이지는 않은데 어느새 저 멀리 갔어요.”
“저게 남존무당(南尊武當)의 제운종이다. 무당파의 무공은 하나같이 깊은 무리(武理)를 담고 있지. 제운종도 마찬가지야.”
“예전에 아버님께 듣기로, 무당파의 검은 무척이나 부드럽다고 하던데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지.”
“아니란 말인가요?”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부드럽고 끊김이 없다. 무당파 무공의 특성은 맞아. 하지만 나라면 절대 거기서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럼요?”
“강유(强柔)는 하나다. 무림에서 전사경(轉絲勁)에 가장 능한 것이 무당파야. 언뜻 유연해 보이지만, 원형(圓形)의 힘을 한 점에 모아 내치면 그 파괴력은 능히 천하제일을 논할 만하지.”
“오…….”
“한없이 부드럽기만 한 무공으로는 도(道)에 이를 수 없어. 무당파가 괜히 남존이라 불리는 게 아니야. 그래서 무당의 무공은 입문은 쉬워도 경지에 이르긴 어렵지.”
“그런 건 어떻게 알아요?”
“오다가다 주워들은 얘기야.”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주워들은 얘기를 저렇게 확신하듯 말할 사람은 아니니까.
“근데요.”
“응?”
“많이 귀찮은가 보죠?”
“네가 일일이 잡고 싸워 봐. 안 귀찮은가.”
“그것도 수련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유명 문파의 후기지수들이니 각파의 비전을 익히고 있을 거 아니에요.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도 되지 않을까요?”
“성장? 각파 비전의 오의(奧義) 근처에도 못 간 쭉정이들만 줄지어서 들락거리고 있는데 성장은 개뿔.”
“음, 그런가요.”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앞으로 비무하자고 기웃거리는 놈 있으면 그대로 쏴 버려. 어디 한 군데 구멍이 나면 감히 싸울 생각도 못 하겠지.”
“진심은 아니죠?”
“머리통을 날려 버리라고 하려던 걸 참은 거다.”
“몸에 구멍을 뚫으면 사건이 너무 커지는 거 아니에요?”
“알 바냐. 어차피 네가 쐈는데.”
이런 무책임한 사람을 봤나.
쿵.
광룡부를 놓고 평상에 앉은 연호정이 목을 주물렀다. 아무리 각파의 비전 오의를 깨우치지 못한 이들이라지만, 오늘만도 무려 열다섯이 넘는 후기지수들과 싸웠다.
“피곤하긴 하군.”
차라리 생사결을 벌였다면 이렇게 피곤하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적당히 상대하려니 더 죽을 맛이었다. 짜증이 있는 대로 뻗치는지라 단숨에 날려 버릴 생각으로 무공을 구사하다가도, 묵비 말마따나 진짜 작살을 내 놓으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파질 걸 알기에 중간에 힘을 빼 버리길 반복한 탓이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뭐…… 성장은 무리지만.’
짜증 나는 싸움의 연속으로 나름대로 깨달은 것도 있었다.
‘나는 이제 흑암제가 아니야. 흑도에서 생활하던 방식대로 살 수는 없어.’
이방인에서 흑도 무림의 제왕이 되기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적을 물리치고, 얼마나 많은 전우를 잃었던가.
그래서 그의 무공에는 자비가 없었다. 한번 싸움이 벌어지면 무조건 생사를 가른다. 흑암제의 싸움에 적당히라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회귀한 후, 백도 무림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금은 달랐다.
죽일 생각만으로 무공을 전개하다가는 큰일이 난다. 설령 자신은 멀쩡하더라도 가문에 피해가 갈 수도 있는 것이다.
‘힘 조절에는 능하다. 하지만 상대를 물러서게 할 방법은 모르지.’
스스로 물러나게 하는 깨달음의 무공.
연호정에게 부족한 것이 그것이었다. 적의 섬멸을 위해 극단적으로 발달한 무공은 지극히 패도적이고 살기가 넘쳤다.
‘아버지는 다를 거야.’
중도(中道)의 무공. 만무(萬武)를 아우르는 진짜 검객.
세인들이 판관검이라고 추켜세워 주는 이유가 있다. 악인에게는 심판의 일검을 내리치지만, 죽일 이유가 없는 적은 스스로 물러나게끔 만든다.
백도를 살아가는 지금의 연호정에게 가장 필요한 수법이라고 볼 수 있겠다.
“배워야 할 점을 안다는 건 좋은 거야.”
“무슨 말이에요?”
“아니다.”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들어가서 쉰다.”
“그래요.”
그때였다.
두 남녀의 몸이 멈추었다.
묵비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이번에는…… 다른데요?”
“다른 정도가 아니야.”
연호정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가 파군각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우웅.
담벼락 너머, 바닥에 깔린 눈이 바람에 따라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자연적인 바람이 아니었다. 무인이 내뿜는 강렬한 기파가 걸음걸음마다 쌓인 눈을 날려 버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 기운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 낯익은 듯하면서도 낯선 기운, 육대세가 가주급의 존재감이었다.
잠시 후,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 공자를 만나러 왔네만.”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평범한 체격에 작지도, 크지도 않은 키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허허로운 기도. 마치 산중도인의 기도와 비슷하면서도 훨씬 속기(俗氣)가 강하다. 무인보다는 문사(文士)의 기도에 가까운 자였다.
그러나 그 무공은 의심할 나위 없는 초절정고수의 그것이다.
연호정을 보는 중년 사내의 눈이 반짝였다.
깊고 깊은 지혜, 빳빳한 대나무처럼 강단 넘치는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굉장한 무공이로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휘감아 올라가는 그 바람 같은 기파, 당장 본가에서도 자네를 상대할 만한 자가 많지 않을 듯하네.”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마침맞게 잘 찾아온 것 같군. 자네가 연호정인가?”
연호정은 그제야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연호정이 절도 있게 포권을 쥐었다.
“연씨 성에 호정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제갈세가의 가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묵비가 깜짝 놀라 사내를 보았다.
사내, 제갈문호가 미소를 머금었다.
“혹, 시간이 괜찮으면 차 한잔 얻어 마셔도 되겠는가?”
* * *
“후우우.”
내뱉는 숨결이 그 어느 때보다도 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었다. 기존의 것을 허물고 새로운 것을 쌓아 올리려 할 때 겪는, 무인이라면 누구라도 겪게 되는 숙명이었다.
우우우우웅.
모용우의 몸에서 푸른 기운이 솟구쳤다.
일전 그가 익힌 소황진기의 색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맑고 청아한 느낌을 주는 기운이었다.
하늘과 땅, 그 가운데 사람이 있으니 천지(天地)를 농락할 힘을 거머쥘 자격은 오롯이 인간뿐이라.
모용세가의 가주지학, 건곤무해(乾坤武解)상의 신공 건곤팔극심법(乾坤八極心法)의 기운이 모용우의 전신에 충만하게 차올랐다.
“대단하구나.”
모용우가 고개를 돌렸다.
걸어오는 모용군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감탄이 일었다.
“고작 이틀 만에 네 내공을 건곤팔극심법의 광주리 안에 전부 담아낸 것이냐?”
“예.”
“실로 대단한 재능이구나. 네 깨달음이 누구 못지않은 탓도 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놀라운 속도야.”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시작입니다. 아직 검은 휘둘러 보지도 못했으니, 오히려 늦었다고 봐야 합니다.”
“네가 아닌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다면,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뛰어다닐 생각부터 하냐며 호통을 쳤을 것이다.”
모용군은 흐뭇하게 웃었다.
“이제 며칠 안 남았구나.”
“예?”
“무림맹 건립 회의 말이다.”
모용군의 얼굴을 살피던 모용우는 그가 자신에게 시킬 일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허허허.”
십 년이 넘도록 삐딱선을 타다 돌아온 탕아다.
어깨에 힘이 들어갈 만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어떤 일을 시켜도 훌륭하게 완수하겠다는 조용한 기백이 전신에서 어우러져 나왔다.
“무림맹은 건립될 것이다. 군소 문파의 대표들과도 상의해야겠지만,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주인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찬성표를 던질 테니 대세를 거스를 순 없겠지.”
“…….”
“무림맹이 건립된 후, 네가 맡아야 할 조직이 하나 있다.”
모용우의 눈이 빛났다.
“무엇입니까?”
“독립유군이다.”
“……?!”
“무림맹에는 두 개의 독립유군이 생길 것이다. 그중 하나를 네가 맡았으면 한다. 물론,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유군…….”
“오래 맡을 필요는 없다. 전투 부대의 대장직은 네가 올라가야 할 무수히 많은 직책 중 가장 아래에 거하고 있다. 경험이라고 생각하거라.”
“알겠습니다.”
“다만, 네가 유군의 수장이 되면 다른 유군보다 더 많은 전공을 세워야 한다. 그 부대를 흡수하거나 해산시킬 수 있을 정도로. 할 수 있겠느냐?”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하! 너를 믿는다.”
“한데 다른 독립유군의 대장으론 누구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모용군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연가의 장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