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50)
흑백무제 1350화(1349/1351)
1350화. 천안(天眼)의 개화 (16)
“……!”
당관의 눈이 흔들렸다.
‘적?!’
사삭.
혈린과의 거리를 절반이나 좁혔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가주님?!”
멀리서 덩달아 멈춰 선 묵비가 당관을 돌아보았다.
당관의 시선이 우측으로 향했다.
‘적이다. 그것도 엄청난 숫자…….’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가늠이 되질 않는다. 어쨌거나 무극에 오른 적이 출현했다.
심지어 그 적과 함께 막강한 군기가 느껴졌다. 넘실거리는 그 군기의 밀도는 능히 무극수 하나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대단했다.
“가주님!”
“적이다.”
“예?”
“저기 남쪽에서 적이 출현했다. 하나는 무극에 이르렀고 함께 온 병력의 군기도 엄청나. 족히 수천은 되는 듯한데.”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당관의 말을 듣자마자 적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들이 최단 거리를 주파하여 태산에 이른 것처럼 강소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주한 적측의 부대도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강소성 전투의 패잔병들일 겁니다.”
“패잔병이라고 하기엔 기세가 너무 강한데.”
“그래서 저들을 쫓고 있었습니다. 그냥 놔둬선 안 될 놈들이라.”
“그러다 중간에 우회해서 이곳으로 왔다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당관의 얼굴에 갈등이 일었다.
‘제기랄, 첩첩산중이라더니.’
뭐가 됐든 산에 오르는 것이 맞다. 그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만한 병력이 출몰하면 산 아래에서 싸우고 있는 아군 측 병사들은 몰살을 면치 못할 것이다.
지금 태산 밑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어느 정도 균형이 맞았다. 거칠게 말하면 개판이지만, 힘이 박빙이라 오랜 시간 싸워야 결과가 날 것이다.
그런 와중에 저만한 군세가 합류하면 저울이 한 번에 기울 터. 무섭게 세를 불린 적의 전력은 한순간 아군을 압도할 것이다.
‘그냥 놔두면 다 죽을 것이다. 아무리 이 일이 중요하다 한들 그만한 희생을 감수할 만한가?’
아직 역천신주이니 혈옥이니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였다.
다만 놈들의 행태가 너무 수상했고, 특히 태산의 지력까지 뒤흔든 것이 컸다. 놈들이 이곳에 자리하여 꾸미는 술수는 필시 상상을 초월하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속히 판단을 내려야만 해. 이대로 갈지, 아니면…….’
그때였다.
“제가 가겠습니다.”
당관이 묵비를 바라보았다.
묵비가 손으로 산 위쪽을 가리켰다.
“어서 놈을 쫓아가십시오. 제가 하산하겠습니다.”
“내 말을 허투루 들은 거냐? 내가 가도 놈들을 막기는 힘들다. 그저 시간이나 벌 수 있을까 싶은 수준이야.”
“지금 이 산 정상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만한 술수를 부리는데 고수를 배치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요.”
당관은 묵비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로 저 위쪽에서도 엄청난 강자의 기도가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주님과 함께 간다면 도울 일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 혼자서는 무리예요. 차라리 제가 하산하는 게 낫습니다.”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둘 다 올라가거나 둘 다 내려가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거다.”
“비록 제 재주가 대단치는 않지만, 가주님께서 못하시는 걸 할 수 있습니다.”
나름의 생각이 있다는 뜻이었다.
당관은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놈은 달리고 있었다.
“괜찮겠냐?”
“물론입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당관이 품에서 단약 두 개를 꺼내 들고는 하나를 묵비에게 던졌다.
“내력 회복단이다. 사천에서 가장 잘 듣는 회복단이니 취해라.”
“저보다는 가주님이…….”
“닥치고 처먹기나 해라.”
하긴, 무극에 오른 자의 내공은 언제나 상상 초월의 회복력을 보인다. 당관은 묵비가 걱정할 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럼.”
곧장 회복단을 입에 넣은 묵비가 짧게 고개를 숙이곤 땅을 박찼다.
파아아앙!
순식간에 하늘을 날아 산 아래로 내려가는 그녀의 몸놀림은 당관이 보기에도 대단한 것이었다.
‘어떻게든 잘 헤쳐 나가거라.’
당관은 묵비를 믿었다. 그녀의 재능도 그렇지만, 특히 연호정과 함께하며 수많은 전장을 승리로 이끈 경험과 판단력을 믿었다.
어쩌면 정말로 자신이 가는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낼지도 모른다.
‘간다.’
훅!
당관은 다시 달렸다.
혼자 달리는 산길, 부담은 두 배가 되었고 소모된 체력 또한 확실하게 체감되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뼈를 묻을 수도 있겠군.’
그는 잠시의 대화로 멀어진 만큼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그래도 놈이 보이지 않았다. 기척은 느껴지지만, 처음부터 거리가 원체 많이 벌어져 있었다.
파바바박!
범부는 감히 오를 엄두도 내지 못할 가파른 비탈길을 몇 걸음 만에 주파한 당관.
‘……!’
혈린과의 거리가 상당히 좁혀졌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젠장.’
우우우웅.
만류귀원신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력은 아직 남았지만, 호흡으로 차오르는 내공이 확연히 줄었다.
그 또한 체력 때문이었다. 도대체 몇 날 밤을 지새우고 몇 날 밤을 걱정했으며 몇 번의 생사투를 겪었는가.
무극수가 아니라 무극수 할애비라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당관의 경지를 생각하면 오히려 지금 이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위기의 순간.
당관은 연호정을 떠올렸다.
‘싸가지는 나보다 약했을 때도 이보다 더 힘든 상황을 잘만 헤쳐 나갔다.’
사실이었다.
그놈은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태에서도 적을 발견하면 또 돌진해서 도끼를 휘둘렀다. 힘으로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아군을 소환했고, 아군이 없으면 함정이라도 팠으며, 함정 팔 시간도 없으면 어떻게든 물고 늘어져 적을 지치게 만들었다.
독기로는 그야말로 천하제일인 놈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연호정을 보며 당관은 수도 없이 감탄했더랬다.
‘나는 당가의 가주다. 그놈보다 더 잘해 냈으면 잘해 냈지, 못했다는 소리는 듣지 말아야 해.’
그리고 연호정의 무공.
상상력을 기반으로 인간의 한계를 완전히 초월해 버린 그 절대적인 무공을 생각하자 저절로 힘이 회복되는 듯했다.
‘내 상단전 운용법은 싸가지의 그것과 비슷하다. 한계를 두지 않는 정신력이야말로 지금의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일 것이다.’
솔직히 지친다. 몸도, 마음도, 정신도.
당관은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외면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겨 낸다.’
모든 것을 인정한 직후, 그것을 이겨 내겠단 마음을 먹었다.
당씨 혈족 특유의 자존심, 절대 지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 그의 신공에 불을 붙였다.
우우우웅!!
흔들리던 만류귀원신공이 다시 제자리를 잡는다. 강력한 의지만으로 심신은 물론 내공 상태까지 바로잡은 것이다.
무극수라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당관이기에, 상단전을 운용하는 방식 자체가 남다른 그였기에, 당씨 혈족으로서의 자존심과 의지가 범부와는 차원이 다른 그였기에 가능한 술수였다.
‘된다.’
화아아아악!
호흡으로 들어오는 내공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절반 이하로 떨어졌던 내공이 무섭게 차오른다. 체력적인 부분은 어쩔 수 없지만, 넘실거리는 기도에 짜릿함마저 느꼈다.
‘나는 언제고 싸울 수 있다.’
스스로 한계를 초월했음을, 누구 못지않게 강해질 수 있음을 깨닫는 당관.
그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어렸다.
무공을 연마한 이래, 이렇게 거대한 기쁨과 쾌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어떻게든 하면 되는 경지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고, 얼마나 많은 싸움을 벌였는가.
번쩍!
두 눈이 본래의 색을 찾으니, 당관 특유의 자신만만한 표정도 돌아왔다.
내력이 풍부하니 소모된 영력도 조금씩 탄력을 받는다. 만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현상 유지는 될 것이다. 아니, 이 기분을 쭉 이어 가면 소모된 영력도 어느 정도는 차오를 것이다.
가장 문제는 체력이지만.
‘진짜 위험한 순간이라면…… 써야겠지.’
일시적으로 체력을 회복할 수단은 많았다. 그 수단 대부분이 위험해서 문제일 뿐.
그러나 내가 맡은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법이다.
파아아아앙!!
심신이 안정을 찾고 내력과 영력이 충만해지자 그의 속도가 한 배 반은 더 빨라졌다.
“헉! 헉!”
혈린의 얼굴이 노래졌다.
이제 완연한 백발에 주름까지 많아진 그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가득했다.
‘온다! 놈이 온다!’
등 뒤에서 뻗어 나오는 검붉은 어둠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만전의 상태라도 절대 이기지 못할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틀거리며 다가오는 놈의 영력을 느끼니 정말이지 소름이 끼쳤다.
‘저런 말도 안 되는 그릇을 품고 있다니.’
파파팡!
이를 악물고 원정의 기운을 더 끌어다 썼다. 원정이 완전히 깨진 것은 아니라 앞으로도 목숨 부지에 문제는 없겠지만, 꽤 비참한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훅!
혈린의 신법이 더 빨라졌다.
하지만 당관의 신법은 그보다 더 빨랐다.
기척만 느낄 수 있었던 거리가 어느덧 시야에 잡히는 거리까지 줄어들었다.
그 순간, 당관과 혈린 두 사람 모두 직감했다.
바로 여기가 승부처라는 것을.
‘위험!!’
우우우웅!
소중히 품에 넣은 구슬에서 기이한 사기가 번뜩였다.
그 순간, 혈린은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선택을 내렸다.
콰아앙!!
원정을 완전히 깨 버리고 그 모든 기운을 담아 내달렸다.
당관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작정을 했군.’
파파파파팡!!
충만한 내력으로 추뢰신법을 펼쳤다. 그의 신법 속도가 또 한 번 빨라졌다.
하지만 극한의 속도를 내고 있는데도 상대는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평생 살아갈 생명력을 한순간 다 쏟아부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치이이익!
당관의 손에서 불그스름한 안개가 일렁였다.
이렇게 된 이상 계속 쫓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아예 끝을 봐야만 했다.
그의 손이 전방으로 뻗어졌다.
우우우우웅!!
엄청난 영력이 혈린의 전신을 쇠사슬처럼 휘감기 시작했다.
만천화우의 영력을 사람에게 쓴다. 항무에게도 한 번 썼던 기예로, 상대의 몸을 주박처럼 묶어 버리는 행위였다.
혈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태산 정상에 거의 다 이르렀다. 한데 이런 무시무시한 허공섭물에 당해 발이 묶여 버린 것이다.
‘안 돼. 더 이상은 움직일 수가 없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니, 구슬이 두근거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만큼은……!’
그때였다.
‘……!!’
혈린은 황량한 안개 너머, 한 쌍의 지독한 청색 안광을 보았다.
환상인지 실제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혈린은 그 눈빛을 본 것만으로도 족했다.
‘부디 못난 소신을 용서하시옵소서.’
혈린은 혼신의 힘을 다해 구슬을 던졌다.
파아아앙!
엄청난 속도로 허공을 날아가는 구슬.
당관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번쩍!
순식간에 혈린의 머리통을 밟아 터트리고 나아간 그가 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공섭물로는 천하에서 당할 자가 없는 고수의 영력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때.
콰앙!
소리 없이 날아온 장력이 당관의 몸을 저 멀리 날려 버렸다.
“제기랄!”
기척도 없이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그곳에는 조홀이 있었다.
“사괴!”
“걱정 마시오. 잘 받았소이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사괴술사의 손에 구슬이 들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채정마진 안에서 가부좌를 튼 사문향에게 건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번쩍!
사문향의 두 눈이 뜨였다.
흰자위까지 시커멓게 물든 그의 두 눈은 역천의 암흑을 품고 있었다.
“……드디어 구슬이 다 모였구나.”
쿠르릉!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둥과 함께 구름이 흩어졌다. 그것은 마치 하늘의 눈이 뜨인 것만 같았다.
그 눈은 사문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