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52)
흑백무제 1352화(1351/1351)
1352화. 천리의 그물은 성기다 (2)
“…….”
연호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는 익숙…… 응?”
그는 내심 무척 놀랐다.
“평소와는 다른데.”
그렇다. 평소와는 달랐다.
그는 몇 번이나 이런 꿈같은 세상에 놓인 적이 있었다. 스승의 사념과 만나기 직전에도 그러했고, 사문향과 싸우기 전 스스로를 돌아보았을 때도 꿈속을 내 세상처럼 거닐었다.
하지만 그 풍경이 지금처럼 선명했던 적은 없었다.
메마른 황야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그 땅 위에 나뭇잎을 잃은 을씨년스러운 나무 한 그루가 말라비틀어진 채 서 있었다.
연호정의 눈이 흐려졌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본래의 기억이 들쭉날쭉하다.
자신이 연호정이라는 것도, 연가의 사람이라는 것도, 지금껏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지도 기억한다.
하지만 이 꿈 같은 세상에 들어오기 직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연호정은 이내 생각을 포기했다. 억지로 떠올리려 해 봤자 기억나지 않으리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한숨을 쉬며 다시 세상을 둘러보던 그는 문득 동하는 마음이 들어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크구나.”
멀리서 봤을 때는 적당히 큰 나무 같았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높이만 십 장이 넘었고 굵기도 엄청났다.
하지만 역시나 메말랐다. 나무 표면이 죄다 썩어서 지금도 가루가 날렸다. 주먹으로 치면 이 커다란 나무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가만히 나무를 보던 연호정은 어인 일인지 마음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보면 볼수록 아련했고 서글픈 기분마저 들었다. 가슴속에 무언가가 꽉 들어차서 숨이 막히는 듯했다.
연호정은 천천히 나무에 손을 가져다 댔다.
푸스스.
닿지도 않았는데 손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표면에 가루가 많이 날렸다.
연호정은 차마 나무를 만지지 못했다. 이 황량한 곳에서 다 죽어 가는 나무 따위, 굳이 신경을 쓸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무너트리기가 싫었다.
한참 동안 나무를 보던 연호정은 탄식했다.
“도대체 나는 왜 또 이런 곳에 떨어져, 이 나무를 보고 있는 건지.”
그때였다.
“네가 이룬 경지가 위험하기 때문이다.”
연호정은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끝을 알 수 없는 황량한 들판만이 펼쳐져 있었다.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신기(神氣)가 들리면 이승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지. 타고난 신기가 왕성함에도 그것을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쇠약해져 죽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누구십니까?”
“하지만 너는 후천적인 노력과 치열한 삶을 바탕으로 지극히 인간답게 신기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신기는 산불처럼 거센 와중에 육신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니, 그릇 밖으로 넘쳐흐르는 신기가 자꾸만 너를 무의식으로 끌어 내리려 하는 것이다.”
연호정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나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리는데도.
“말하자면, 네가 이와 같은 영역에 들어왔을 때는 언제나 과다한 신기(神氣)가 문제였다는 것이다.”
“……!”
“천만다행히도 너의 무의식은 스스로를 잃지 않았다. 증오와 한을 내려놓는 과정에서 넌 순간순간 강해지고 단단해진 것이다.”
“…….”
“그래서 무의식에 잡아먹히지 않고 이곳까지 당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증오, 그리고 한.
내려놓는다, 불사른다, 풀어낸다.
익숙한 단어, 익숙한 말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깨달았지만 익숙한 목소리였다.
연호정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스승님……?”
그리고 그 순간, 연호정은 온몸이 찌릿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다 죽어 가는 나무, 그 황량한 광경 속에.
스승님이 있었다. 천인룡이 있었다.
“스승님!”
“오냐.”
선명했다.
스승님의 눈과 코, 입이 선명했다. 표정도, 존재감도, 신선처럼 고운 자태도 모두 선명하기 그지없었다.
연호정은 그 자리에서 절을 올렸다.
“제자 호정이 스승님을 뵙습니다.”
“허허허.”
인자한 웃음소리가 귀에 착 들어와서 박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반선이라 하기도 민망하구나. 선무지도(仙武之道)를 열고 우화의 문 앞까지 당도한 녀석이 아직도 나를 스승으로 여기는 게냐?”
“그 무슨 황망하신 말씀이십니까? 제게 스승님은 오직 한 분뿐입니다.”
천인룡이 미소를 지었다.
“일어나거라.”
연호정은 조심스레 일어났다.
이승에서 다시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공손하고 예의 있는 자태였다. 다시 뵙지 못할 거라 생각한 분을, 이런 세상에서나마 다시 뵈었기에 더더욱 이 순간이 소중한 것이다.
“한데 스승님께서는 어찌 이곳에……?”
“보이느냐?”
천인룡이 나무를 쓰다듬었다.
연호정이 손을 대려 했을 때와 달리 나무는 부스러지지 않았다.
“나는 이 나무 아래서 스승님과 만났다.”
“예?”
“너에게는 태사부가 되는 분이지.”
연호정의 얼굴에 감격이 깃들었다.
자신이 왜 이런 세상에 떨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존경하는 스승님께서 태사부님과 만났던 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광이었다.
천인룡이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께서는 빈말로도 재능 있는 분이 아니셨다. 오히려 둔재에 가까웠지. 그런 스승님께서 내게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나는 내심 걱정스러웠다.”
“무엇이 말입니까.”
“이미 스승으로 삼은 분의 마음이 상처 입지 않기를 바랐지. 사신무를 하룻밤 안에 익힐 수 있을 줄 알았거든.”
무시무시한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천인룡은 실로 그런 자신감을 가질 만한 사람이었다.
약관에 이른 나이로 무극에 올라 혈교의 마공들을 집대성한 천년지재이니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꽤 창피하셨겠습니다.”
“허허허! 그랬지. 내 생각과 달리 사신무는 너무나도 어렵고 난해한 무공이었다. 하룻밤? 하룻밤은커녕 일 년이 지나도 끝을 보지 못했다.”
“정말 어렵긴 어려운 무공이었습니다.”
“어렵기도 어려웠지만, 사신무를 전수한다는 것은 단순히 무공만 전수하는 것이 아니었어. 사신무장으로서의 정신, 이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까지도 전수하는 것이었지.”
“…….”
“가장 큰 놀라움은 사부님의 재능이었다. 사부님은 타고나긴커녕 여느 범부만도 못한 재능을 갖고도 사신무를 그 경지까지 연마하셨다. 그게 내게는 큰 놀라움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 이제는 알 때가 되었지.”
천인룡이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사신무는 단순한 무공이 아니야. 사신기(四神氣)의 시작은 일종의 양생술과 같았다. 오장육부를 관장하며 인간을 건강케 하는 무공이니 양생술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
“그리고 양생술은 필연적으로 인간과 대자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합니다.”
“정확하다. 사부님께서는 무에 재능이 없으셨지만, 세상을 보는 안목은 무척이나 뛰어나셨지. 오직 그 안목만으로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신 분이 사부님이셨다.”
연호정은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천인룡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태사부님을 보고 계신 것일까? 아니면 지난날을 추억하고 계신 것일까.
천인룡이 고개를 내렸다.
“호정아.”
“예, 스승님.”
“이제 충분히 달리지 않았느냐?”
“……예?”
“너는 이미 증오와 한을 다 내려놓았다. 그것이 네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이유다.”
“……?!”
“과다한 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랬다면 굳이 너를 이 세상의 끝까지 데려올 필요가 없었지. 그저 행복한 꿈이나 꾸며 과거를 회상하는 정도로 끝이 났을 것이다.”
“그게 무슨……?”
“이곳은 네가 바라서 온 세상이다. 너는 너 자신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네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연호정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저는 당최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할 수가…….”
“사문향을 살려 주려 했지?”
“……!”
“그를 향한 분노가 세상을 불태울 지경이었음에도 너는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증오와 한을 다 내려놓은 것이다.”
연호정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제야 기억이 났다. 이곳에 오기 전 자신이 사문향과 무시무시한 싸움을 벌였다는 것이.
한순간 찾아온 기억은 그의 힘도 되살려 주었다.
화아아악!
연호정의 몸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쿠르릉!
황야 저 끝에서 산처럼 거대한 무언가가 몸을 일으켰다.
황룡이었다. 산맥보다도 더 굵고 길쭉한 몸체를 일으키는 황룡의 모습은 장관이 따로 없었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천인룡이 툭 던지듯 말했다.
“황룡제라 불리던 그 당시의 내 황룡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
“너는 혈교지란을 끝장낸 그 시절의 나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이다.”
“스승님…….”
“달리 말하면, 인간의 껍데기를 벗고 이승을 떠날 준비가 된 것이니라.”
“제가 선도(仙道)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그렇다.”
연호정은 경악했다.
사람을 수도 없이 죽이고 내 이득을 위해 다소 냉정하고 잔혹한 짓까지 저질렀다. 그런 자신이 선도에 닿았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천인룡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보아라, 너는 누구 못지않은 자격을 손에 넣었음에도 스스로의 잘못을 되돌아보는 성품을 지녔다. 이러니 내 어찌 너를 외면할 수 있었겠느냐? 너처럼 착한 아이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실로 천운이었다.”
“……스승님.”
천인룡이 나무를 두들겼다.
“이 다 죽어 가는 나무가 무엇인 줄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너의 무의식이다.”
“……!!”
“네가 나무에 손을 댈 때, 나무는 죽어 간다. 하지만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니야. 나무가 사라지면 너는 비로소 무의식을 제거하고 완전한 스스로를 갖추게 된다.”
등선이다.
무의식을 없애 버린 인간은 그 영역마저도 자신의 의지로 지배할 수 있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한다는 말이다.
연호정이 떠듬떠듬 말했다.
“제가…… 등선을 한단 말입니까.”
“그렇다.”
“무의식을 없애 버린다면, 제게도 선도가 열린다는 말입니까?”
“정확히는 없애는 게 아니다. 무의식이 있을 자리마저도 내 의지하에 지배하는 선인(仙人)이 되는 것일 뿐.”
천인룡의 눈이 반짝였다.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그 경지에 이를 때까지.”
“…….”
“많이 울고, 많이 절망했을 것이다. 너는 그처럼 지독한 삶 속에서도 강인한 성품으로 지금에 이르렀다.”
“스승님…….”
“때가 되었다.”
천인룡이 몸을 돌렸다.
뒤돌아선 그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인연은 잊고 하늘에 오르라.”
하늘, 하늘.
연호정은 천천히 나무로 다가갔다.
스승을 지나쳐 나무 앞에 선 연호정은 떨리는 눈으로 나무를 바라보았다.
높고 굵은, 그러나 지독히도 연약해 보이는 나무.
그 순간, 연호정은 스승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나다.’
이미 삭을 대로 삭아 버린 무의식은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아니, 기쁘게 울고 있었다.
일부로서 종말을 맞이하지만, 또 다른 나의 일부가 진정 위대해질 수 있음을 깨달은 무의식의 울음이 황야를 진동케 했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스승님.”
“그래.”
“저는 선택했습니다.”
“그렇다면 거침없이 행하라.”
스륵.
천천히 올라가는 손. 그 손이 나무에 닿았다.
그리고.
화아아악!
세상이 빛으로 가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