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53)
흑백무제 1353화(1352/1368)
1353화. 천리의 그물은 성기다 (3)
연호정이 다시 세상을 바라보았다.
‘좋구나.’
황량한 땅 곳곳에서 새싹이 피어나고 있었다.
어둑했던 하늘에도 빛이 찾아든다. 바람은 여전히 거셌지만, 내리쬐는 태양 빛은 너무나도 맑았다.
사사삭.
바람에 흩날리던 모래와 먼지는 더 이상 없다. 어느새 수많은 꽃이 들판을 가득 메웠다. 갖가지 꽃씨가 휘날리고, 작고 화려한 벌레들이 요란한 날갯짓 소리를 내며 이곳저곳을 날아다녔다.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산보다 더 거대했던 황룡이 있던 자리에는 화사한 색조로 물든 산이 우뚝 서 있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상쾌해지는 것 같은, 정말 멋진 산이었다.
그리고 나무.
다 죽어 가던 나무에 다시 생명이 깃든다.
부스러진 표면에선 광택이 났다. 헐벗은 나뭇가지는 어느새 초록빛 잎사귀로 뒤덮였다.
그 나뭇잎 하나하나에 생명이 가득했다. 적당히 널찍하고 탄탄한 나뭇잎들에선 겨울의 시련 앞에서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강단이 느껴졌다.
높고 우람하고 화려하다.
그의 무의식이 생명을 얻고 있었다.
“어째서냐.”
연호정이 천인룡을 돌아보았다.
천인룡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연호정이 어떤 선택을 내려도 그리 웃었을 것이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아시겠지만, 제가 보통 반골이 아닙니다.”
“등선할 수 있는 기회였다.”
“압니다.”
“그 문을 열면 이승의 모든 연을 내려놓고 빛이 될 수 있었다.”
“그 또한 압니다.”
“한데 어찌하여 그런 찬란한 미래를 거부하고 네 무의식을 되살렸느냐?”
“저는 사람입니다.”
담담한 목소리에 강력한 힘이 깃들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그저 단 한 명의 사람일 따름입니다.”
“모두가 사람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신선이 되는 것이지.”
“나중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사람이 좋습니다.”
“너는 알고 있을 것이다. 신선이, 아니 빛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무한한 영광만이 가득하지요.”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하지 못할 일들이 가득하다. 새로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압니다.”
“아는데도, 어째서 그 빛의 길을 포기하였느냐?”
“스승님의 가르침도 제대로 좇지 못한 못난 제자가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
연호정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광경이 어때 보이십니까?”
“평화롭고 아름답구나.”
“그렇습니다.”
“한데 이 광경이 왜?”
“저는 제 사람들과 이런 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자신의 진심을 무의식 앞에서, 스승 앞에서 말한다.
맑고 평화로운 눈으로 들판을 둘러보던 연호정의 눈이 조금씩 젖어 들었다.
“저는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었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행복이 무엇인지 압니다. 부족한 이놈을 이끌어 준 스승님과 무뚝뚝하지만 언제나 저를 걱정해 준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수많은 친구들이 있었기에 저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
“저는 제가 느낀 그 행복의 백 배 이상을 그들에게 돌려주고 싶습니다.”
“…….”
“스승님께선 제게 행복해지라고 하셨지요.”
“그랬지.”
“저는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행복을 다 얻고 가렵니다.”
“설령 평생 선도가 닫히더라도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것이 정녕 네가 선택한 길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천인룡이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연호정은 처음 보았다. 스승님이 이토록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리는 것을.
대견함, 감탄, 기쁨, 흡족함 등등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감정들이 웃음 안에 가득했다. 신선이 되신 분이지만, 누구보다도 인간다운 웃음을 지을 줄 아는 분이셨던 것이다.
웃음을 멈춘 천인룡의 얼굴은 너무나도 인자했다. 등선 직전에도 보여 주지 않았던 인간적인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호정아.”
“예, 스승님.”
“앞으로 또 만날 날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래서 아쉽습니다.”
“빛을 선택했다면 아쉬움도 몰랐을 것을.”
“그래서 행복이 뭔지도 압니다.”
천인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못 볼 수도, 백 번 천 번을 더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앞날이라는 것은 모르는 일이니까.”
“예.”
“그리고 백 번 천 번을 더 봐도 항상 이 말을 할 것이다.”
천인룡이 활짝 웃었다.
“너와 같은 제자를 둔 것이 자랑스럽다.”
“…….”
“하늘에 대고 감사한다. 내가 너를 발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것을, 네가 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속삭여 주신 것을.”
“…….”
“너와의 인연, 그 순간순간에 감사하고 행복했다.”
연호정은 울컥 눈물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저도, 저도 그렇습니다.”
“하긴, 네 말도 옳다. 그래도 내 명색이 스승이랍시고 숙고하여 가르침을 내렸거늘, 그 가르침을 다 소화하기도 전에 훌쩍 뛰어넘어 버리면 안 되지. 청출어람은 아직 멀었다, 이놈아.”
“하하하!”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크게 웃었다.
온 세상에 기쁨만이 가득했다. 행복이 가득했다.
서로가 서로를 완성시켜 준 사제들의 세상은 놀랍도록 생동감이 넘쳤고 지극히 ‘인간’적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차츰 웃음을 멈추었다.
“호정아.”
“예.”
“사문향은 힘든 상대다.”
“알고 있습니다.”
“이 나조차도 그가 지닌 역천의 힘이 어떻게 개화할지 모르겠다. 진정 혈옥처럼 시공을 뒤틀 수도 있고, 순식간에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 수도 있다. 오히려 그놈의 힘이 약해질 수도 있을 것이며, 잘못 다루면 그놈의 영혼조차도 찢겨 나갈 것이다.”
“…….”
“그놈이 만든 물건은 그렇게나 위험한 것이다.”
“그렇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속히 힘을 되찾아야만 한다.”
“예?”
“완성(完成)이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야. 네가 너로서 완성되었을 때, 비로소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문향을 무너트릴 수 있다고.”
“…….”
“만약 사문향이 죽지 않고 큰 힘을 손에 넣는다면, 지금 상태로는 어떻게 해도 패배한다. 그것만큼은 장담할 수 있다.”
“그렇습니까.”
“그러니 잠시 세상은 잊고 스스로를 완성시켜라. 어떻게 완성시켜야 할지 모르겠다고 초조해하지 말고, 충분히 쉬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천인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가 보아라.”
황룡에 오를 적, 사념으로 나타나셨을 때 연호정은 스승을 보내 드렸다.
이승에서 다시 만나 수많은 대화를 나눴을 때도 연호정은 스승을 보내 드렸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자신의 세상 속에도 스승님은 살아 계신다. 이번에는 그 스승님께서 자신을 보내 주려 하고 있었다.
연호정은 정중히 절을 올렸다.
“다시 뵐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인사를 올립니다.”
“오냐.”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당당히 나아가라.”
그렇게 연호정은 몸을 돌렸다. 끝도 없이 펼쳐진 들판밖에 없었지만, 그는 이곳에서 어떻게 나가는지 알고 있었다.
잠시 후.
연호정이 사라졌다.
홀로 남은 천인룡이 나무를 쓰다듬었다.
너무나도 올곧게 자란 나무. 보기만 해도 감탄이 나오는 이 나무를 제자가 키워 냈다니, 정말이지 이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호정아.”
천인룡의 눈이 흐려졌다.
“선택이란 네가 키운 저 나무에 달린 나뭇잎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크게 한숨을 쉰 천인룡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제자가 만들어 낸 이 멋들어진 공간에 안타까운 한숨 따위를 남기고 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천인룡은 사라졌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 세상의 문도 잠시, 아주 잠시 닫힐 것이다.
* * *
연호정이 무의식을 되살려 크게 깨달은 그 순간.
하늘이 내린 천적 역시도 운명의 순간을 앞에 두고 있었다.
콰아앙!!
엄청난 폭음에 태산이 울부짖는다.
사괴술사는 초조했다. 산 중턱도 아니고 채정마진 인근에서 사왕급 고수 둘이 충돌한 상황이다. 자칫 잘못하면 역천신주의 제작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우우우우웅!
사괴술사의 손에서 뻗어 나온 사기가 일대에 회색빛 장막을 드리웠다.
지친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술법 방어였다. 사음교의 고급 술법 중 하나인 음화대벽(陰火大壁)이었다.
쿵. 쿵.
두 고수가 발하는 충격파가 다소 약해졌다.
사괴술사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사문향을 돕기 위해 쏟아 넣은 술력이 너무 커서, 음화대벽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물론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교주님! 어서!’
채정마진 안에 있는 사문향은 진즉 눈을 떴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손에 넣은 두 개의 구슬은 허공을 배회했고, 그 안에 깃든 화옥의 기운은 섞이지 않은 채 마진 내부를 미친 듯이 두들기고 있었다.
사괴술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교주님!’
그때였다.
번쩍!!
하늘에서 번개가 쳤다.
찢어진 하늘 좌우에서 먹구름이 몰려왔다. 실제 사람 눈에 보이는 두껍고 어두운 구름이었다.
쿠르르릉.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천둥은 덤이었다. 단순한 기상 이변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불길한 기운이 가득했다.
다시 눈을 뜬 사괴술사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희열이 깃들었다.
‘드디어!’
천기(天氣)가 어그러지고 인세에 허락되지 않은 천기(天機)가 쏟아져 내려온다.
그 천기(天機)는 사방으로 퍼지려다가 무언가에 붙들리기라도 한 양 무섭게 꿈틀거리더니, 점차 태산으로 내려앉았다.
정확히는 태산의 정상, 채정마진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사괴술사가 활짝 웃었다.
“되었구나!”
잠시 후.
후우우우웅!!
두 개의 구슬과 하나의 기운이 서서히 하나로 합쳐졌다.
치이이익!
무서운 열기를 뿜어내던 구슬은 점점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문향의 눈 역시 온통 새빨갛기만 했다.
번쩍!
구슬에 혈광이 가득 찬 순간.
“아아아아아!!”
사문향이 비명을 질렀다.
비명이었지만 단순한 비명은 아니었다. 그 안에는 극상의 고통과 처절한 쾌락, 순수한 혼돈과 얼룩진 빛이 가득했다.
“아아아! 으아아아아!”
목소리가 점차 둔탁해지고 갈라진다.
사괴술사의 눈이 흔들렸다.
‘뭐, 뭐지?!’
혈옥, 역천신주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한데 어찌하여 교주님께서는 저리도 고통스러워 하시는가?
지잉! 지잉!
허공에 뜬 역천신주가 부르르 떨며 명멸했다. 그에 맞춰 사문향의 비명도 뚝뚝 끊어졌다.
그 모습은 마치…….
‘마치, 구슬과 하나가 된 것 같기라도 한……?!’
그리고 잠시 후.
스륵.
사괴술사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역천신주가 아무런 저항감 없이 사문향의 가슴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보였다.
아니, 빨려 들어갔다는 표현보다는 스며들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마치 태초에 하나였다는 듯, 두 존재의 합일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역천신주가 사문향의 가슴으로 완전히 스며든 순간.
콰아앙!!
“컥!”
채정마진이 박살 나며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그 여파를 이기지 못한 사괴술사가 십여 장 밖으로 튕겨 나갔다. 튕겨 나간 그의 몸은 여기저기가 부러지거나 피멍이 들었다.
사괴술사는 덜덜 떨리는 고개를 억지로 치켜들었다.
스스스.
은은하게 퍼지는 회색빛 안개 속.
번쩍!
선혈과도 같은 안광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괴술사가 환하게 웃었다.
“교, 교주님! 성공하셨군요!”
“……그래.”
안개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참으로 나른하구나. 그리고…….”
고개를 쳐든 사문향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분이 무척 좋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