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55)
흑백무제 1355화(1354/1368)
1355화. 천리의 그물은 성기다 (5)
쾅!
남궁승의 입에서 피가 튀었다.
‘힘들구나.’
창궁대연신공의 막강한 방어력으로도 쉬이 막을 수가 없다.
최강의 무공, 제왕검형을 구사하려 했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제왕검형은 단 한시도 심기체(心氣體)가 어긋나선 안 되기 때문이다.
쓰려고 한다면야 못 쓸 것도 없지만, 문제는 상대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통하지 않을 무공을 대량의 내공까지 소모해 써 봤자 반격만 당할 뿐이다.
치이이익! 퍼펑!
명유의 권법은 완벽했다.
음황기의 독기를 배제하고 그 자리에 상단전 구결을 집어넣어 완성시킨 그만의 무공은, 중원의 여느 무공과 상리가 다른 형태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남궁승이 밀리고 있다는 건, 그의 무공이 완성형에 이르렀다는 뜻이었다. 한순간의 빈틈도 허용치 않으며 그 자신 역시 절대 방심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쿵!
태산 아랫자락을 진동시키는 진각과 함께 음황신권의 절초들이 유성처럼 쏟아졌다.
순간 남궁승은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권풍의 유성. 직선으로 돌진하는 게 있는가 하면 곡선을 그리며 다가오는 것도 있고, 중간에 휘어져서 엄한 곳을 노리는 것도 있다.
제멋대로인 권풍 투로이기에 더욱 막아 내기가 힘들다.
‘후퇴.’
파앙!
억지로 천풍보를 써서 후방으로 물러났다. 적의 영력이 몸을 옭아매고 있었지만, 대량의 내공을 쏟아부어 기어이 그물을 벗어났다.
콰콰쾅!!
애꿎은 땅과 허공을 폭발시킨 음황기가 팔방으로 충격파를 일으켰다.
남궁승이 좌수를 휘둘렀다.
후우욱!
비산하는 충격파를 잠재움과 동시에 천뢰보를 써서 돌격한다.
그런 그가 펼치는 검법은 창궁무애검이 아닌 고독일검(孤獨一劍)이었다. 남궁가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빠르고 살기 넘치는 살법이었다.
명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튼 상체를 탄력 있게 휘감아 하단에서 상단으로 장을 올려 쳤다.
콰앙!
대단한 일격이었다.
남궁승은 고독일검의 힘이 산산이 쪼개지는 것을 보았다.
힘이 쪼개지니 투로도 흐트러지고, 투로가 흐트러지니 자세까지도 흔들린다.
장대한 내공으로 신체를 완벽하게 통제했으나, 통제하는 그 순간을 적이 놓칠 리 없었다.
쉬익! 펑!
“큭!”
순식간에 치고 들어와 내친 일장에 가슴을 맞았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극수들에게 있어 병기의 길고 짧음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검을 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권법가보다 거리 싸움에 이점이 있다.
상대는 그것을 뚫고 들어와 상처를 입힌 것이다.
‘집중력이…….’
정신은 들었지만, 싸움을 잘 풀어 나가는 건 막막하기만 했다.
쩌저저저정!
창궁무애검의 검력을 맨손 백타로 튕겨 내는 적의 실력이 참으로 놀랍다.
‘적이지만 실로 놀라운 경지에 이르렀구나.’
만전의 상태에서 싸웠다면 어떨까?
‘내가 우위에 있었겠지.’
성천의 삼제라는 칭호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전 중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라는 뜻, 하물며 별호조차 검제다.
검의 제왕. 만병지왕이라는 검을 쥐고 휘두르는 자가 얼마나 많던가. 그 수많은 검사 중 최고 자리에 올랐으니 상대가 누구라도 두렵지 않다.
당연히 지금 눈앞의 상대도 마찬가지다. 본래의 그였다면 이미 창궁무애검을 폭풍처럼 휘둘렀을 것이며, 심기체의 문제 따위는 생각할 것도 없이 제왕검형까지 뽑아냈을 것이다.
‘아무 의미 없다.’
남궁승은 자신의 이 마음이 서푼짜리도 안 되는 노강호의 자존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승부는 언제나 지금이 중요하다. 만약이라는 것은 필요치 않아. 나는 어찌하여 이리 약해졌을까.’
쩌저정! 퍼어엉!
또다시 일격을 허용했다.
이번 일격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권장으로 몰아치다가 돌연 회전하여 각법을 내쳤는데, 일격을 맞은 옆구리가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아프다.’
아프고 부끄러웠다.
내공이 미친 듯이 폭주하는 것 같았다. 상대의 사공은 참으로 기괴하고 막강하여, 침투하는 순간 수십 자루의 칼로 단전을 쿡쿡 찌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농락을 당하는 것 같아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리고 화가 난다는 사실에 남궁승은 또 한 번 부끄러웠다.
‘도대체 뭐 하는 것이냐. 목숨이 걸린 싸움에서 이리 잡생각이 많아서야 쓰겠는가.’
그걸 알면서도 무념무상(無念無想)에 이르지 못한다. 오히려 생각이 더 많아지고 집중력도 더 흐트러졌다.
극에 이른 피로 때문이었다.
무극수답게 내공 회복력은 대단했지만, 육신과 정신에 켜켜이 쌓인 피로는 검제라 불리는 무사도 무너트릴 만큼 무서웠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내가 이렇게 무기력한 성정이었나.’
적의 주먹이 어깨를 후려쳤다.
좌측 어깨가 뜯겨 나갈 것 같은 일격이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틀지 않았다면 실제로 뼈가 으스러지고 근육이 찢겼을 것이다.
그때, 남궁승의 검이 호선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서걱!
명유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살기 한 줌 없이 휘둘러진 검이 어느새 그의 귓불을 스치고 지나갔다. 자세가 비틀어지지 않았다면 아마 얼굴을 꿰뚫었을 것이다.
“이놈.”
파파파팡!
분노한 와중에도 내치는 권장의 조율이 완벽했다.
남궁승은 다시 수세에 몰렸다.
‘걸물이구나.’
상대의 분노가 느껴졌다. 그런데도 공격은 이전과 다르지 않다. 더 강하게, 더 빠르게 내치지 않고 차분하게 자신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싸움에 절대 감정을 싣지 않는다. 지금껏 해 왔던 그대로 차분하게 적을 상대하는 것, 무극수라도 힘든 일이었다.
‘이런 상대라면.’
적의 서열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른다.
중요한 건 이놈이 보여 주는 무인으로서의 자세가 중원의 어떤 무사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신화교의 전대 고수도 그렇고 이놈도 그렇고, 비록 적이지만 참으로 대단하다. 이런 고수들을 보유한 삼교의 저력이 새삼스레 놀라웠다.
‘그래서 내, 질 수가 없도다.’
내공도, 체력도, 정신도 다 엉망진창이다.
심지어 호흡으로 차오르는 내력의 양도 반절 이하로 줄었다. 내력 회복이 더디니 상처도 낫지 않고, 검을 휘두를수록 몸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치리링! 사사삭!
창궁무애검, 칠천향검(七天饗劍)이 펼쳐졌다.
한순간 일곱 줄기의 검기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명유의 몸을 노려 왔다. 목덜미, 쇄골, 옆구리, 등, 정수리 등등 일곱 마리의 뱀이 아가리를 벌리고 쇄도하는 것 같았다.
“이익!”
명유가 다급히 회전하며 음황신장을 펼쳤다.
콰콰쾅!!
막강한 장력에 칠천향검의 검력이 모조리 스러졌다.
남궁승은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다. 중요한 건 자신이 반격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정신이 또렷한 와중에 흐릿했다.
모순적인 상황이다. 남궁승 스스로도 자신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했다.
‘힘이 없다.’
온몸이 힘이 빠졌다.
힘이 빠진 와중에도 검은 움직였다. 마치 검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며 주인을 인도하는 것 같았다.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쩌저정! 서걱! 서걱!
일방적으로 밀렸던 승부가 조금씩 조금씩 박빙이 된다.
명유가 으스스한 목소리로 외쳤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의 흉내를 내는 게 아니다!”
죽어?
‘죽긴 누가 죽었단 말이냐.’
하지만 놈에게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두 눈은 흐릿했고 몸은 흐느적거렸다. 천풍보와 천뢰보, 천화보를 때에 따라 펼치고 있지만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우스꽝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묘하다.’
팔이 움직였다.
검이 움직이는 대로 휘둘러지는 팔이 물결처럼 파동을 일으키는 것 같다. 마치 뼈 없는 연체 동물처럼 제멋대로 꿈틀거리는 듯하다.
서걱! 서걱!
명유의 몸에 검상이 하나, 둘 늘어난다.
순간 남궁승은 강렬한 쾌감을 느꼈다. 무기력에 가까운 상태인데도 검이 상대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감각만큼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손맛이 좋았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남궁승은 종리백을 떠올렸다.
‘종리 무상. 그대도 이러했소?’
죽은 종리백이 껄껄껄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호탕한 웃음과 함께 그 커다란 칼을 아무렇게나 휘둘러 댄다. 그런 광경이 환상처럼 떠올랐다.
‘아니라면, 그대는 무엇이 그리도 좋다고 웃으며 세상을 떠났소이까.’
종리백이 뭐라고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남궁승은 그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다만, 진리(眞理)에 달한 그의 두 눈만큼은 확실하게 마음에 새겨졌다.
‘진리…… 평생 날붙이를 휘둘러 왔지만, 나는 아직도 진리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겐가.’
그때였다.
화아아악!
이 기묘한 상태를 단번에 깨트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운이 온 산을 뒤덮었다.
‘마기?’
대단한 마기다.
아니, 대단하다는 표현으로도 형용할 수 없다. 남궁승은 단 한 번도 이와 같은 마기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실로 지옥이구나.’
세상이 지옥이 된다면, 그래서 저 하늘조차 억압한 마기가 천지를 불구덩이로 만들어 버린다면.
저 마기는 온 천하를 뒤덮어 나무도, 꽃도, 사람도, 짐승도 살지 못할 황폐한 세계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뭔가가 잘못되었어. 당가주가 실패한 모양이군.’
하지만.
‘상관없다.’
괘념치 않는다.
지금은 이 ‘상태’가 중요했다. 무서운 마기를 느꼈다고 정신이 팔릴 이유 따위 없단 말이다.
그때였다.
쐐애애애액! 퍼엉!
뭔가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 땅에 박혔다.
폭음이 대단했다. 그 안에서 피어오르는 내공량도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아직 무극에 이르지 못한, 그러나 무극을 코앞에 둔 거대한 새싹의 기공술이었다.
‘궁술?’
명유가 소리쳤다.
“모든 것이 끝났다! 역천신주가 완성되었어! 귀궁신녀, 이만 포기하거라!”
귀궁신녀?
‘묵비.’
연 성주의 부관이었다가 휘하 장수가 된, 사적으로 가장 친한 여고수.
“남궁 어르신!!”
다급한 목소리에 놀라운 생명력이 가득하다.
그 순간, 남궁승은 깨달았다. 명유가 왜 자신을 향해 죽었다고 말했는지.
‘살 의지가 없구나.’
묵비의 생명력 넘치는 목소리와 너무나도 대비되는 자신의 상태.
그렇다. 그는 죽었다.
삶을 포기하고 검에 모든 것을 걸었다. 마치 저 종리백처럼 오로지 칼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는 종리백과 달랐다.
종리백은 오로지 무사로서 살다가 무사답게 죽었다. 그는 시작부터 끝까지 칼을 든 무사였다.
그러나 남궁승은 달랐다.
‘나는 무사답게 살지 못했구나.’
가문의 책임자로서 살다가 어느 날 모든 책임을 내려놓고 검에 미쳐 살았다.
하지만 자식 농사를 잘못 지어 가문이 잘못된 길을 걸었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검을 내려놓고 다시 세상에 나와 무도한 적들과 싸웠다.
‘내 삶은 오직 책임만이 가득했다.’
적과 싸우는 순간순간이 가문의 오명을 씻어 내기 위한 ‘가짜’ 싸움이었다. 남궁세가의 태상가주로서 싸웠지, 남궁승 자신의 싸움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 허물 속에서 싸우고 싶지 않다…….’
단 한 순간이라도.
설령 이 싸움에서 목숨을 잃더라도 진정한 나로서, 검제 남궁승으로서 싸워 보고 싶다.
처음 검을 잡았던 그 시절, 그 마음 그대로.
번쩍!
남궁승의 두 눈이 정광을 되찾았다.
“나를 보아라!”
태산을 뒤덮은 마기조차 주춤하게 하는 노장의 일갈.
명유가 움찔하며 남궁승을 바라보았다. 멀리 떨어져 시위를 당기던 묵비 역시 남궁승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검만을 바로 세운, 진정한 중원의 검제가 거기에 있었다.
“나는 네놈에게 이 싸움 이외의 것을 신경 쓰라고 명한 적이 없다.”
“…….”
“나의 끝을 보여 주마. 제대로 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