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56)
흑백무제 1356화(1355/1368)
1356화. 천리의 그물은 성기다 (6)
기백 넘치는 노무사의 일갈은 환희로 가득한 명유의 마음조차도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이제 너를 붙잡고 싸울 이유 따위는 없다. 우리의 신께서 이 땅에 강림하셨으니까.”
쿵!
가벼운 일 보에 태산이 흔들렸다.
“그러나.”
명유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왼손은 앞으로 뻗고 주먹 쥔 오른손은 허리춤에 안착시켰다. 음황무가 아닌 권법가(拳法家)의 기수식이었다.
“불경하기 그지없는 네놈들의 검이 신성한 분께 닿도록 놔둘 수는 없지.”
남궁승이 차갑게 웃었다.
“구차하구나.”
“뭐라?”
훅!
천화보가 펼쳐졌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꽃잎들이 바람을 따라 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다. 수많은 잔영을 만들어 낸 남궁승은 명유의 머리 위에도, 등 뒤에도, 코앞에도, 측면에도 있었다.
명유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허튼수작!”
그의 양손이 원을 그렸다.
파파파파팡!
태극권과 같은 움직임이었지만, 일순간 터져 나가는 권풍이 팔방을 점했다.
남궁승의 그림자가 권풍에 맞아 모조리 스러졌다. 상단전 영력으로 포착한 남궁승의 진체 하나만을 남긴 쾌속한 공격이었다.
허상이라고는 하나 무극의 힘이 실리면 실체와 같은 공격력을 자랑할 수 있을 터. 명유는 남궁승의 기습 자체를 봉쇄한 것이다.
번쩍!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검.
명유의 몸이 회전하며 참격을 회피하고, 곧장 치고 들어가 붕권(崩拳)을 날렸다.
퍼어어엉!
남궁승의 입에서 피가 튀었다.
쏟아져 나온 핏물이 명유의 얼굴로 날아간다. 그러나 그 핏물은 명유의 음황기로 인해 삽시간에 모조리 증발했다.
“생을 포기한 귀신 따위가…….”
우둑.
명유의 눈이 흔들렸다.
뒤로 넘어가던 남궁승의 몸이 덜컥 멈추었다. 남궁승이 왼손으로 명유의 손목을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누가 생을 포기했다더냐.”
남궁승이 미소를 지었다.
순간 명유는 말할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다.
피범벅이 된 새하얀 수염, 안색도 창백하기 그지없다. 그런데도 남궁승은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광기 어린 그 미소는 분명한 생(生)의 증거였다.
“이제야 나를 되찾았거늘.”
“이놈!”
파악!
남궁승의 손아귀를 쳐 낸 명유가 그의 상반신을 향해 연환권을 날렸다.
퍼퍼퍼퍼펑!
절벽도 무너트릴 것 같은 힘이다. 숨이 끊어지기 전까진 절대 멈추지 않을 듯한 쾌속의 연환타, 천하제일고수라도 무방비로 받아 내면 절명할 수밖에 없는 공격이었다.
남궁승의 몸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밀려나지 않았다.
‘검막(劍幕)!’
검첨에서 흘러나오는 실낱같은 검기가 신체 전반에 유연하고도 질긴 방패를 덧씌우고 있었다.
대단한 검기공이었다. 병장기를 근간에 둔 기공술로 신체를 보호하는 고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토록 유연하고 완벽한 기공술을 보여 주는 사람은 천하에 둘도 없을 것이다.
“이제야 나는 내 싸움터를 찾았다.”
명유의 눈이 또 한 번 흔들렸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남궁승의 왼손, 그 손에서 무형의 예기가 돋아나는 것을 느낀 것이다.
남궁승이 좌수를 휘둘렀다.
서걱!
명유의 머리카락이 한 움큼 잘려 나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검에 머리카락이 잘렸다. 고개 숙여 피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우둑!
명유의 다리 근육이 크게 부풀었다.
발목을 틀어 회전력을 끌어올린 그가 허리를 뒤틀며 일장을 내질렀다.
퍼어어엉!!
음황신장 직격타다.
검막으로 막는다 해도 한계가 있다. 남궁승이 또 한 번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파아앙!
명유는 곧장 남궁승을 쫓아갔다.
‘안 좋아.’
감이 좋지 않았다. 쓰러트릴 수 있을 때 빨리 쓰러트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피이이이잉!
곡선으로 날아온 무형탄이 명유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묵비의 궁사였다. 명유는 급한 와중에도 무형탄의 궤도를 읽고 피해 낸 것이다.
“남궁 어르신!”
번쩍!
푸른빛에 휩싸인 한 자루 검이 명유의 몸통을 향해 쏘아졌다.
그 속도는 실로 벼락을 방불케 했다. 대경한 명유는 빠르게 몸을 틀었지만, 쏘아진 검은 그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서걱.
상처가 얕다.
그러나 상처를 통해 들어온 검기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피부를 뚫는 침처럼 부드럽게 파고든 검기가 단숨에 심맥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우우우웅!
다급히 음황기를 끌어올려 검기를 뽑아낸 명유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세상이 어두워졌다.
멀찍이 날아갔던 남궁승이 어느새 명유의 머리 위에서 나타난 것이다.
퍼펑!
명유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한 쌍의 육장으로 자신을 공격해 오는 노무사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아니, 힘이 대단한 건지 기백이 대단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뭐가 됐든 그의 힘으로 받아 내기 힘든 것은 분명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다 죽어 가던 노인이 어찌?!’
남궁승이 질풍처럼 쇄도했다.
아무것도 없는 두 손이 마치 검을 쥔 것 같은 모양새로 변했다.
아니, 남궁승은 검을 쥐고 있었다. 오른손에 한 자루, 왼손에 한 자루다.
‘이럴 수가.’
명유는 더 이상 온 산을 뒤덮은 마기를 느낄 수 없었다.
생명의 위기를 느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극단적으로 발달한 그의 영력은 오직 남궁승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마치 활짝 피어난 꽃처럼 전신에 수백 자루의 검을 두른 채 달려오는 남궁승의 존재는 공포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수많은 검 중 가장 날카로운 두 자루 검이 노검사의 양손에 들려 있었다.
‘무형검(無形劍)…….’
남궁승이 두 손을 휘둘렀다.
번쩍! 번쩍!
모든 것을 통과하고 모든 것을 베어 낸다.
공기도, 내공도, 영력도 무형검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실제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휘두르는 동작에 무게감이 가득했다.
서걱! 서걱!
명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깨와 허벅지에 일격을 맞았다.
얕은 상처였다. 조금 전처럼 검기가 침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충격은 그때보다 백 배는 더 심했다.
‘읽을 수가 없다.’
무형검의 형태는 보인다. 하지만 그 검이 공격을 가하는 순간, 검형(劍形)이 사라진다.
살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투기(鬪氣)는 세상을 덮을 만큼 대단했지만, 살기는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반응이 한 박자씩 늦어지는 것이다. 지금껏 남궁승의 허무하기 그지없는 살기를 읽어 내며 움직였는데, 한순간 깨달음이라도 얻었는지 완전히 다른 무공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래, 이거다.’
명유의 눈에는 투명한 검처럼 보이는 그 신검(神劍)이, 남궁승에게는 실검(實劍)처럼 보였다.
화려하지 않다. 그저 올곧게 선, 검병부터 코등이까지 아무런 장식도 되어 있지 않은 수수한 철검이었다.
남궁승은 그 검이 실로 나답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나답진 않지.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일 뿐.’
내가 되고 싶은, 휘두르고 싶은 검을 드디어 손에 쥐었다.
그 순간, 그는 진리에 도달했다.
‘종리 무상. 그대는 칼을 어찌 휘둘렀소.’
남궁승이 좌검을 휘둘렀다.
번쩍! 콰콰쾅!
명유를 스치고 나아간 무형검기가 대지에 거대한 고랑을 만들었다.
창궁무애검도, 제왕검형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무지막지하게 강하다. 마치 제왕검형 최후의 초식을 펼친 것 같았다.
그러자 환청처럼 종리백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리가 구부정하오. 그러니까 쓸데없는 곳에서 힘이 줄줄 새지.”
남궁승은 눈을 감았다.
‘나도 알고 있소이다.’
종리백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시 진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우검을 휘둘렀다.
번쩍! 쩌어억!
무형의 검영(劍影)이 공간을 베었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땅이 쩍 갈라졌다. 길이만 이십여 장에 달하고 그 깊이는 추측할 수조차 없을 만큼 깊은, 인간의 능력으로 선보일 수 없는 검기였다.
남궁승이 눈을 떴다.
진리에 몸을 실으니 어딘지 붕 뜬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오감은 선명했다. 마치 물 위에 떠다니는 것 같았다.
명유가 일그러진 얼굴로 뭐라 소리치며 달려왔다.
오감이 선명한데도 그의 외침이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들렸지만 관심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흐트러졌구나.’
상대의 눈빛, 표정, 기도가 광포하기 그지없었다. 지금껏 보여 준 적 없던 격정이 거기에 있었다.
남궁승은 차분하게 두 검을 교차시켰다.
주먹을 휘두르던 명유가 기겁하며 몸을 틀었다. 공격을 가하려는 위치에 갑작스레 무형검 두 자루가 치솟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읽힌다.’
다음 공격은 어떨까? 좌궁보에 전사경으로 힘을 받아 치고 들어오지 않을까?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명유는 거짓말처럼 좌궁보로 움직이며 전사경을 발휘, 좌측으로 치고 들어왔다.
남궁승은 냉정하게 우검을 휘둘렀다.
‘무겁다.’
검 끝에 바람이 걸린 것 같았다.
천풍(天風)이었다. 상쾌하고 무거운 바람이 명유를 휘감고 있었다.
푸화아악!
대량의 선혈이 튀었다. 그 피가 상대의 것인지 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번 일격이 아주 괜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제대로 검을 휘둘렀다는 생각에 크나큰 환희를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왼손에 힘이 빠졌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팔꿈치에 구멍이 뚫렸다. 적이 물러나면서 날린 지풍을 막지 못한 것이다.
‘참으로 잘 싸우는구나.’
명유의 상반신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치명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상처다. 천풍을 담은 우검 일격을 제대로 피하지 못한 것이다.
‘기쁘다. 너 같은 상대를 만나서.’
그때였다.
“남궁 어르신!!”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남궁승은 묵비가 왜 그리 외쳤는지 알고 있었다.
명유의 공격은 왼팔만 노린 것이 아니었다. 우검의 일격을 받아 냈을 때, 명유의 주먹이 자신의 옆구리를 한 움큼 쥐어뜯고 지나갔다.
근육은 물론 내장 일부까지 찢어졌을 만큼 깊게 들어온 일격이었다.
‘가벼워졌어.’
고통도, 절망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뜯겨 나간 살점만큼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이 정도로 힘이 빠진다면 다음에 휘두를 검은 또 얼마나 대단한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까.
남궁승은 궁금했고, 자신의 호기심을 그저 덮어 둘 생각이 없었다.
그가 우검을 휘둘렀다.
번쩍!
이번에는 바람이 아니다. 벼락이었다.
‘다음은?’
몸에 완전히 힘이 빠진 채로 또 한 번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무형의 검이 산산조각으로 흩어지며 황홀한 꽃바람을 일으켰다.
천풍으로 시작해 천뢰(天雷)로, 천뢰에서 천화(天花)로 끝맺은 무형검격.
남궁가 최고 비전은 아니지만 삼천심검(三天心劍)이라 불리는 천검(天劍)의 검격들이 명유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이구나!’
남궁승은 활짝 웃었다.
창궁무애검도, 제왕검형도 나만의 검도라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다.
책임감을 내려놓고 난생처음 치러 본 나만의 싸움에서, 그는 자신의 진짜 검을 볼 수 있었다.
천풍, 바람과 같이 자유로운.
천뢰, 벼락처럼 강렬하고 순수한.
천화, 흩어지는 꽃잎만큼이나 아름다운.
‘아아!’
가문의 몰락과 망가져 버린 자식들, 그리고 명예.
그것을 위해 종군하면서 쌓인,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피로가 영혼마저 검게 물들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진정한 나의 검을 찾은 남궁승의 영혼은 순백으로 빛나고 있었으며, 한 번도 이르지 못한 진리를 거머쥔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검에 미쳐 살 이유가 무에 있었나…… 그저 내가 내 인생을 살았다면 진리를 휘두를 수 있었을 텐데.’
남궁승의 눈이 흐릿해졌다.
‘언제나 진리는 내 곁에 머물고 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