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57)
흑백무제 1357화(1356/1368)
1357화. 천리의 그물은 성기다 (7)
“남궁 어르신!”
서둘러 다가간 묵비가 남궁승의 상세를 살폈다.
‘이, 이런!’
묵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남궁승의 상세는 심각했다. 옆구리가 파이다 못해 내장 일부까지 날아갔는데, 막강한 내공력으로 남은 내장이 흘러나오진 않고 있었다.
사실 어지간한 고수라도 이 정도면 죽음이 목전이라고 봐야 했다. 남궁승의 몸과 기가 워낙 대단했기에 고요한 신색이나마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쿨럭!”
밭은기침을 토한 남궁승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빠르구나.”
“예?”
“너무 빨라. 나의 싸움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묵비는 남궁승의 표정에서 진한 아쉬움을 보았다.
아쉬움 못지않은 기쁨과 환희도.
“이럴 때가 아닙니다. 어서 몸을…….”
“날 놓아주게.”
“어르신!”
남궁승이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호흡이 거칠지 않은데도 내쉬는 숨에 죽음의 기운이 묻어 나왔다. 묵비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스스로 죽음을 바라고 있다.’
그렇다. 남궁승은 더 살고 싶은 의지가 없다.
물론 내장 일부가 파여 날아간 상황이니 이미 목숨을 장담키 힘들겠지만, 몇몇 무극수들이 대자연의 기를 강제로 끌어와 극단적으로 치유력을 강화시키면 소실된 내장 조각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이 전장에서 그런 호사를 누릴 수는 없다. 다만, 희망을 잃지 않고 이 강대한 내공력으로 목숨줄을 붙잡는다면 어떻게든 훗날을 도모해 볼 수도 있을 텐데.
“나는 말이네.”
남궁승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저 사음교의 권법가가 말한 것처럼 진즉 죽어 있었네.”
“어르신.”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어. 그리고 그런 나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끼네. 태상가주로서 가문을 위해 전장에 뛰어들었지만, 어느 순간 관성적으로 싸우고 있었지.”
“…….”
“자네들처럼 고향을 위해, 내 가족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었네. 복수를 위해 싸운 것도 아니었어. 나는 그저…… 남궁의 명예만을 위해 싸웠지.”
미소가 점점 일그러졌다.
“한 줌 가치도 없는 명예 따위가 무엇이라고.”
“아닙니다. 어르신 덕분에 수많은 무사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목숨을 구했습니다. 어르신이 아니었다면…….”
“내 소소한 활약까지 부정하고 싶진 않네. 명예든 뭐든, 무림의 존장으로서 싸워야 할 때는 싸워야 하는 법이지. 나는 지난날을 후회하진 않아.”
“…….”
“그저…… 많이 지쳤을 뿐이야.”
묵비는 왠지 남궁승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녀 역시 연호정과 처음 여러 싸움을 거쳤을 때 느꼈던 감정이었다.
애초에 무림의 싸움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 자신을 위해 연호정과 함께하기를 원했고, 수많은 싸움을 거쳐 가며 스스로를 완성할 수 있었다.
더하여 그녀는 연호정과 함께 연을 맺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좋았다.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몇 번이라도 목숨을 내던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는 지난날의 피로를 모두 해소하고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남궁승은 달랐다.
가주직을 아들에게 물려준 순간부터 남궁승은 반쯤 무림을 떠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태어날 때부터 남궁세가의 사람이었고, 책임이라는 것에서 도무지 자유로워질 수 없는 처지였다.
책임, 책임, 책임.
자유를 찾고 싶어도 태어난 가문이, 후사를 이은 자식들이, 이 세상이 그를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남궁승이 원하는 인생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약해진 이유가 거기에 있지. 나는 이 싸움 자체에 큰 의문을 느꼈어. 머리로는 알지만, 당장이라도 전장에서 벗어나고 싶었네. 나는 나만의 인생을 살고 싶었어.”
“…….”
“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나다운 싸움이라도 벌여야지.”
남궁승이 미소를 되찾았다.
“처음이었네. 오롯이 나를 위해 목숨을 불태워 본 싸움은.”
“…….”
“어떠한 책임도 없이, 오직 내 검과 투쟁심만을 무기로 즐겁게 싸운 적이 난생처음이야.”
“……어르신.”
“그래서 나는 만족하네. 자네들, 이 세상을 위해 분연히 들고 일어선 사람들의 눈에는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일 수 있음을 아네. 나 또한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어.”
“…….”
“자네들이 용서하지 않는대도, 나는 후회하지 않네.”
무림맹의 무상이 할 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무상이라면, 한 단체에 속한 사람이라면 공동체를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맞서 싸워야 함이 옳다.
그러나 묵비는 남궁승을 비난할 수도, 비판할 수도 없었다.
그가 살아온 길은 모르지만 그의 피로는 알고 있었기에.
언제나 고고하게 살고 싶었던, 동시에 언제나 나만을 위해 살고 싶었던 노고수가 인생 최초로 본인을 위한 싸움을 선택했다. 뉘라서 욕할 수 있겠는가.
묵비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저희, 열심히 싸우겠습니다.”
“……그래.”
“그러니 저희 걱정은 말고 마음 편히 가세요.”
남궁승의 눈빛이 따뜻해졌다.
“전에도 느꼈지만, 자네는 참 좋은 사람이야.”
“과찬이십니다.”
“연 성주가 왜 자네를 끼고도는지 알겠어. 자네 같은 사람은 어디서도 쉽게 찾기 힘들지.”
그때였다.
쿠르릉.
하늘이 기괴한 비명을 토해 냈다.
남궁승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자네도 느꼈지? 이 심상치 않은 마기.”
“예, 느꼈습니다.”
“당가주가 실패한 것 같네. 그렇다면…… 죽었거나 극심한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야.”
“…….”
“하지만 싸움은 끝나지 않았어. 저 산 아래 수천의 적과 교전하는 아군이 있네. 게다가 듣기로, 천하 각지에 삼교의 마공을 연마한 자들이 나타나 민초들을 겁박하고 있다고 하네.”
“……!”
“어쩌면 진짜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싸움이 지금 막 시작된 건지도 모르겠군.”
남궁승이 묵비의 손을 잡았다.
“내 빈자리는 자네가 채워 주게.”
“노력해 보겠습니다.”
“노력으로는 모자라. 자네는 저 연 성주처럼 되어야만 해. 무극에 올라야만 하네.”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제, 제가 어찌 감히…….”
“연 성주는 괴물이라 그럴 수 있었다 치세. 그러나 내 보기엔 자네도 크게 뒤지지 않아. 당장 그 연배에 무극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규격 외의 재능이라 할 만하네.”
“저는 그저 운이 좋아서…….”
“운 또한 실력이지. 자네가 그러한 경지에 발을 들인 것도 그만한 능력이 되었기 때문이야. 자네의 재능을, 운명을 얕잡아 보지 말게나.”
그때였다.
‘……!!’
묵비는 손바닥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뭐, 뭐지?!’
남궁승의 장심에서 흘러나온 무언가가 그녀의 장심을 통해 스며들었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찔할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그 고통은 금세 사라졌다.
오히려 고통 이후에는 청량함이 감돌았다. 팔뚝을 타고 오른 알 수 없는 힘이 자연스레 어깨, 목을 타고 올라가 미간에 이르렀다.
‘헉!’
번쩍!
묵비의 두 눈에 매서운 광채가 번뜩였다.
그녀 자신이 키워 본 적 없는 영력이 상단전을 휘감기 시작했다. 고작 한 조각에 불과하지만, 그녀가 지금껏 쌓아 온 영력을 통째로 불태울 수 있을 정도로 무서운 밀도를 지닌 영력이었다.
‘이것이 무극수의 영력!’
연호정이 남기고 간 황룡의 조각에 비할 만한 힘이다.
“마음 같아선 모든 힘을 전해 주고 싶네만, 무극이라도 배운 무공이 달라 온전한 격체전력은 불가능하네. 나아가 자네의 단전 역시 포화 상태야. 굳이 나의 내공을 받아 낼 이유가 없지.”
“……!”
“하여, 내 심득을 모은 영력의 한 조각을 건네네. 물론 이 심득을 받았다고 무극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아니야. 모든 것은 자네에게 달렸어.”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심득을 전하는 그 과정 자체가 엄청난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던 듯, 남궁승의 두 눈은 회색빛으로 물들었고 얼굴은 시체처럼 퍼렇게 질려 있었다.
치이이이익!
그의 몸에서 밀도 높은 진기가 방출되기 시작했다.
창궁의 힘, 남궁세가 비전의 내공이 대자연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잊지 말게. 자네는 이미 무극에 오르는 방법을 알아. 알지만, 보이지 않는 것뿐이야.”
“…….”
“내 심득을 등불 삼아 걸어가게. 길은 이미 자네가 다 닦아 놓았어. 굳이 이런 도움조차 필요 없을지 모르는데도 건네준 것은,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네.”
“알겠습니다.”
남궁승이 눈을 감았다.
더는 보이지도 않는 눈을 억지로 뜰 필요도 없었다.
“이만 가게. 그리고 도망쳐.”
“예?!”
“마기가 점점 산을 잠식하고 있네. 저 마기에 닿으면 끝장이야. 한시라도 빨리 이 지역을 벗어나는 것이 좋을 것이네.”
“어르신…….”
“혼자 있고 싶네.”
이를 악문 묵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파앙!
단숨에 전장으로 향하는 묵비의 뒤로.
홀로 남은 남궁승은 문득 명유의 기척을 느꼈다.
‘용케 죽지 않았군.’
죽기 일보 직전이다. 한 번만 더 무형검에 직격을 당했다면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죽었을 것이다.
‘나다운 싸움을 완성시켜 준 자와 저승길 동반행이라……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군.’
푸스스스.
진기가 거의 다 빠져나가자 대번에 몸이 수척해졌다.
가슴과 배가 푹 꺼지고 팔다리도 얇아지는 것 같았다. 볼이 밑으로 내려앉으며 솟구친 광대의 감각이 느껴졌다.
남궁승은 아들을 떠올렸다.
‘인아.’
아들의 목소리, 표정, 손짓, 눈빛…….
왜일까? 어느 것 하나 명확하게 보이지가 않았다.
‘손에 잡힐 듯 선명했던 너의 모습이 이제는 보이지 않는구나.’
그만큼 아들에게 신경을 써 주지 못했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만큼 나는 나만이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뜻일까.
남궁승은 후회를 느꼈다.
‘내가 검에 미쳐 모든 걸 내려놓지 않았다면, 일을 하면서도 수련이 아쉬워 연무장에 틀어박히지 않았다면, 나는 너의 얼굴을 선명히 기억할 수 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검제라는 별호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남궁의 명예가 별것 아닌 것처럼, 검제라는 별호 역시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구나.’
몸이 어딘가로 푹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나는 책임에 짓눌려 무기력에 빠진 게 아니었어.’
진리는 진리고 나는 나다.
가족은 가족이며 책임은 책임이다.
‘나는 그저…… 앞을 보지 못하고 언제나 뒤돌아보기만 했던 고약한 늙은이에 불과했을 따름이다.’
진즉 죽었어야 마땅했을 놈이, 그래도 무슨 축복을 받았는지 나만을 위한 싸움까지 끝내고 간다.
남궁승은 그것이 고마웠다.
누구에게 고마운지는 모르겠다.
‘편안하구나.’
그렇게 남궁승의 호흡이 멎었다.
중원 검사 중 으뜸이라는 남궁세가 태상가주의 소천이었다.
* * *
“크으…….”
몇 번이나 피를 토한 당관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몸을 세웠다.
갈비 몇 대가 부러지고 왼팔과 오른 다리에 금이 갔다. 만류귀원신공을 재운용하여 신체를 통제하지 않았다면 절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제기랄!”
당관이 산 정상 쪽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그림자가 점차 산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거대한 먹빛 파도가 느릿하게 산을 잠식하는 듯했다.
‘감당할 수 없다.’
죽지 않은 것만도 기적이다. 당관은 방금의 일격에서 하늘조차 찢어 낼 마의 편린을 느꼈다.
이를 악문 당관은 몸을 돌려 산 아래를 향해 달렸다.
마음은 다급했지만 몸이 마음을 따라 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