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58)
흑백무제 1358화(1357/1368)
1358화. 천리의 그물은 성기다 (8)
역천신주가 완성된 그 순간.
고수들은 기감으로, 하수들은 직감으로, 그리고 태산 인근 마을에 있는 범부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무언가가 달라졌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태산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기운을 느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공포에 질렸다.
“물러나라! 뒤로 물러나!”
진양의 명령에 흑제성의 무사들이 서둘러 퇴각했다.
호법사제들과의 전투로 벌써 수백 명이 전사했다. 마침 들이닥친 산천단 병력 때문에 진형(陣形)부터 변경해야만 했다.
‘저것들!’
강량의 눈이 흔들렸다.
미친 듯이 싸우던 호법사제들 역시 가만히 서서 태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데 놈들의 상태가 심상치가 않았다.
떨리는 눈, 표정은 환희로 가득하다. 지금 당장 칼에 맞아 죽어도 하등 상관없다는 듯 양팔을 들어 올린 채 태산을 향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몰아치던 산천단 역시 서서히 속도를 늦추더니 태산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들 역시 호법사제들과 같은 동작을 한 채 같은 표정을 지었다.
강량은 그들이 인형 같다고 생각했다.
오직 하나의 표정만 지을 수 있는 인형.
그리고 그것은 이쪽도 비슷했다.
‘말도 안 돼.’
태산을 보는 강량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어렸다.
‘뭐지, 이 기운은?’
먹구름처럼 퍼져 나가는 마기.
강량 역시 수많은 마인을 보았고 상상을 초월하는 마공을 접해 봤지만, 이토록 원초적인 두려움을 자극하는 마기는 본 적이 없었다.
“강량!”
진양도 똑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는 강량보다 사태의 심각성을 더 뚜렷하게 인지했다.
“퇴각이다! 아예 산동에서 벗어나야 해!”
“……?!”
“뭘 그렇게 보고 있어! 빨리 움직여!”
강량은 아차 싶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태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홀리기라도 한 것 같다.’
강량이 외쳤다.
“흑제성 병력은 서남부로 빠져라! 어서!”
그제야 정신을 차린 흑제성의 무사들이 강량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물러났다.
그리 대놓고 움직이는데도 호법사제들은 그들을 막지 않았다. 막을 생각 자체를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때, 진양이 산천단 쪽을 향해 날아갔다.
강량은 깜짝 놀랐다.
“형님!”
“먼저 가라!”
“이런 미친! 뭐 하자는 거요!”
“먼저 가!”
무슨 일인가 싶어 진양이 향하는 곳을 보니, 그곳에는 의정군이 있었다.
의정군의 군병들 역시 말 위에서 태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개중엔 머리를 움켜쥐고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드는 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반쯤 정신을 놓고 있었다.
‘제기랄!’
강량은 이를 악물었다.
마음 같아선 진양이 아니라 자신이 가고 싶었지만, 이미 흑제성 병사들을 인솔하는 중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가자!”
그렇게 강량을 보낸 진양은 온몸에 화기를 일으켰다.
‘지독하다!’
의정군과 산천단은 태산과 더 인접해 있었다.
‘마기의 밀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고 있어.’
태산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호흡조차 힘들어졌다. 답답하다고 이 기운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역시 저들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진양이 버럭 소리쳤다.
“의정군!!”
강력한 내공이 담긴 일갈.
여국이 퍼뜩 놀라 진양을 바라보았다.
“후퇴! 후퇴해! 잡아먹힌다!”
그때였다.
퍼어엉!
하늘을 향해 쏘아진 적회색 광채가 폭발하며 넓게 퍼져 나갔다.
무형탄이라는 이름이 무색한 궁사였다. 묵비가 도착한 것이다.
“의정군 전원 남서쪽으로 후퇴해라! 어서!”
쩌렁쩌렁한 그녀의 목소리는 진양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선명했다.
그제야 의정군 전원이 정신을 차렸다. 파랑을 일으키는 묵비의 내공은, 그 안에 실린 영력은 진양을 한참이나 초월하고 있었다.
“퇴각하라!”
“퇴각! 퇴각해!”
군병들은 정신을 차렸지만, 군마들은 여전히 비틀거렸다. 그나마 주인의 내공과 연동된 군마가 아니었다면 진작 다리가 꺾여 주저앉았을 것이다.
묵비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너희가 익힌 무공은 무림의 정종신공이다! 마기 따위에 홀리지 마!”
위엄 넘치는 장수의 일갈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대단한 위엄 외에 사람의 정신을 뒤흔드는 또렷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군병들의 정신은 조금씩 활기를 되찾았다. 그들과 이어진 군마들 역시도 점차 힘을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의정군도 퇴각을 시작했다. 진양은 의정군의 선두에 서서 흑제성 병력이 향한 곳으로 길을 잡았다.
후미에 선 묵비가 힐끔 산천단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선 다 죽여 놓고 싶지만.’
넘치는 공력으로 파천궁을 갈겨 놓으면 저 중 삼분지 일은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저놈을 건드려선 안 돼.’
산천단과 함께 온 또 다른 사왕, 단향의 존재가 그녀의 섣부른 행동을 막았다.
단향 역시 다른 교도들처럼 환희에 젖어 태산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정상이었다. 만약 묵비가 공격을 감행하면 그 즉시 잡으러 올 것이다.
‘제길.’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적을 죽이는 것보다 아군의 전력을 온전히 지키는 게 우선이었다.
‘당가주님은 어찌 되셨을까.’
묵비의 얼굴에 걱정이 깃드는 그 순간.
‘……?!’
그녀는 저 멀리 남궁승의 시체가 있는 곳에서 누군가가 비틀거리며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파아아악!
용비순행으로 날아간 그녀가 단숨에 당관에게 다가갔다.
“가주님!”
“쿨럭! 사, 살아 있었냐.”
“제가 모시겠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당관이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남궁승의 시체가 거기에 있었다. 마치 온몸의 생기가 모조리 빠져나가기라도 한 양, 푹 꺼진 그의 시체는 벌써 반나절은 지난 것처럼 보였다.
“검.”
“예?”
당관이 한옆에 떨어진 검을 가리켰다.
“저걸 챙겨라.”
어검으로 날린 남궁승의 검이었다.
묵비는 곧장 검을 챙겨 허리춤에 묶었다.
“아무래도 네 다리 좀 빌려야겠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빠르게 당관을 업은 묵비가 땅을 박찼다. 사람 하나를 업었음에도 그녀의 신법은 놀라우리만치 빨랐다.
당관의 눈이 흐려졌다.
‘도주라니.’
죽을지언정 결코 물러나지 않는 사천당가의 무사가, 심지어 가주가 등을 돌려 도주하고 있다.
작전상 후퇴도 아니요, 싸우기 싫어서 물러나는 것도 아니다.
압도적인 힘에 대항할 수 없어 도주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가문을 쇄신하기 전의 그였다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었을 것이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아버지의 복수, 사천 사람들의 복수를 위해 이곳에 왔다. 한데도 꼴사납게 후배 등에 업혀 실려 가고 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비참함에 내상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비참함보다 더한 무기력함이 그를 괴롭혔다.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기운이다. 만약 교주 놈이, 혹은 사음교 중 누구라도 이 기운을 멋대로 다룬다면…….’
저 멀리 적들이 보였다. 그들의 소리 또한 들렸다.
하나같이 태산을 향해 손을 뻗으며 뭐라 소리치는,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광신도들의 노랫소리가.
‘중원이 멸망한다.’
당관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 * *
“잠깐!”
서둘러 걸음을 멈춘 연위.
창백해진 그의 안색은 흡사 분을 바른 것 같았다. 두 눈은 언제나처럼 깊고 강렬했지만, 흔들리는 마음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아버지?”
“느껴지느냐?”
“예?”
“……그래, 느껴지지 않겠지.”
극속의 움직임으로 산동 턱밑에 다다랐다. 하지만 아직 태산까지의 거리는 꽤 멀었다.
‘아직’ 반선의 영역에 도달하지 못한 차남으로서는 느끼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마기란 말인가.’
지독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예상했다. 그래서 쉬지도 않고 달려왔다.
하지만 지금, 그 불길함은 명확한 실체가 되어 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무섭구나. 이건 극선(極善)과 극선(極仙)의 정반대에 있는 힘이다.’
아니, 그조차도 넘어섰다.
이 마(魔)는 극마(極魔)이자 극마(克魔)였다. 극에 이른 마기였고, 또한 마를 넘어선 마였다.
‘이건…… 상대할 수가 없어.’
의지의 문제도, 감정의 문제도 아니다.
명백한 현실이었다. 연위는 저 형용할 수 없는 마기를 느끼며, 그 자신은 물론 세상 누구라도 대적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러나.
‘과연 가능할는지.’
저토록 분명한 마(魔)가 드러나기 전까지, 연위는 반드시 태산에 이르러 마를 분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애초에 저 마기는 누구도 없앨 수 없다. 적어도 인간의 육신을 지닌 자라면 절대 불가능하다.
‘사음교주. 사음교주다. 그자가 천리를 찢고 마천(魔天)을 여는 술수를 행했다.’
지이이잉!
연가신단이 고속으로 회전하며 태산 정상에 다다른 괴력난신을 포착했다.
선명히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른한 환희에 젖어 있었다.
양팔을 활짝 펴고 하늘을 보며 웃는 그의 모습은 연위조차도 공포를 느낄 만큼 섬뜩했다.
‘구슬이구나.’
나아가 연위의 눈은 포착했다. 사음교주 사문향의 몸속에 틀어박힌 불길하기 그지없는 하나의 구슬을.
강소성 전쟁에서 그가 직접 부순 구슬과 비슷한, 동시에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어둠으로 가득한 구슬이었다.
‘구슬이 그자와 하나가 되었어. 그렇다면 더더욱…….’
연위의 두 눈이 안정을 되찾았다.
‘망가질 것이다.’
사음교주의 힘은 막강하다. 저 구슬을 만들기 전에도 온 천하에 당해 낼 자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람이었다.
백 년을 살았든 천 년을 살았든, 사람의 육신으로 지옥의 마기를 제대로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망가지기 전까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어. 저자가 손을 한 번 휘두르기만 해도 일대가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지옥으로 변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지옥이 어떤 형태로 드러날지는 상상조차 가질 않는다.
‘힘센 어린아이가 화포를 들고 다니는 격이야. 한시라도 빨리 막아야 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지만.’
연위의 얼굴에 막막함이 일었다.
‘뭘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조차 모르겠다.’
적의 모습도 보았고, 적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알겠으며, 적이 발산하는 기운이 얼마나 독한지도 느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통천진인 이상의 통찰력을 손에 넣었지만, 그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때였다.
“아, 아버지?!”
연지평의 목소리에 집중이 깨진 연위가 그를 돌아보았다.
“괜찮으십니까? 코피가……!”
“음?”
연위가 코밑을 훔쳤다.
진한 피가 손을 적셨다.
‘이런.’
상단전 이능을 너무 과하게 쓴 부작용이었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머리가 뻐근해졌다. 내공은 여전히 충만한데도 다리에 힘이 쑥 빠졌다.
연위는 다리를 풀며 말했다.
“방향을 틀어야겠다.”
“예?”
“너는 저곳, 저 방향으로 쭉 달려라. 네 속도로 쉬지 않고 달리면 이틀쯤 뒤에 네 형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중간에 방향을 모르겠다면 개방도를 이용해라. 그들도 저 근처에 있을 테니까.”
“아버지는요?”
연위가 다시 북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산동으로 가겠다.”
퍼져 나오는 마기를 막을 순 없지만, 그렇다고 저 마기의 희생양이 될 민초들을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할 일이 끝나면 따로 연락을 취하겠다. 지금 바로 움직여라.”
“아버지…….”
“그리고.”
연위가 믿음직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형을 만나면 말해라. 결코 허튼수작을 부리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거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