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59)
흑백무제 1359화(1358/1368)
1359화. 천리의 그물은 성기다 (9)
쿠르릉!
하늘에서 연신 천둥소리가 들렸다.
땅에선 지진 같은 울림이 쉴 새 없이 올라오고, 산 곳곳에 터를 잡은 짐승들은 어느새 저 멀리 달아나 새 한 마리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한 태산의 정상에서, 사문향은 서 있었다.
어느새 준비된 금빛 곤룡포를 입은 그의 모습은 역천의 힘을 모은 자답지 않게 성스럽고 신비로워 보였다.
‘이것이구나.’
사문향은 눈을 감고 자신의 가슴을 매만졌다.
본디 심장이 있던 곳에 동그란 구슬이 자리한 게 느껴졌다.
‘마기…… 마력(魔力)이 용솟음친다.’
심장은 사람의 육신이 썩지 않게 만들어 주는 기관이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피는 온몸을 돈다. 심장이 피를 뿜지 않으면 사람은 죽는다.
고래로 사람들은 심장이 혼의 근원이요, 생명 그 자체를 상징한다고 믿어 왔다.
당연히 그 말은 사실이 아니다. 멈추는 즉시 죽을 정도로 중요한 장기지만, 그 안에 마음이 깃들었느니 하는 말 같은 것은 그저 막연한 믿음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그 케케묵은 믿음이 사문향에게는 현실이 되었다.
‘모든 것이 이곳으로 모였다.’
생명력도, 마음도, 혼도, 의지도, 무공도, 삶도, 과거도, 미래도.
사문향이라는 존재 자체를 정의하는 모든 것이 심장에 담겨 있었다. 아니, 역천신주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사문향은 깨달았다. 더는 자신과 역천신주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저 신주를 이용하려고 했을 뿐이거늘, 신주는 나를 선택했군.’
사문향이 미소를 지었다.
세상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칭송할, 성스럽다는 표현 이외의 수식어를 찾기 힘든 미소였다.
“그래, 나를 부모로 인정한 것이냐.”
사문향의 관점에서 부모는 곧 주인이다. 고로 그는 역천신주가 자신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에 지극한 만족을 느꼈다.
그는 언제나 그러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여인에게서 생산한 자식들 모두가 그의 종이었다. 종들 중 쓸 만한 놈들은 키워 주었고, 재능이 없는 놈들은 들개의 먹잇감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지금, 사문향은 짧지 않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쓸 만한 자식을 손에 넣었다.
“하하하하!”
웃음을 터트리는 사문향의 머리 위로 구름이 미친 듯이 회오리쳤다.
“사음은 사음이다. 사음이야말로 혈교의 근본이야. 천하에 내 씨를 뿌리지 않고서야 어찌 혈교인(血敎人)이라고 존재할 수 있겠는가.”
혈교가 천하를 지배해도 정작 쓸 만한 종들을 생산하지 못하면 한 세대도 못 가서 무너지게 될 것이다.
사음은 신의 씨앗을 온 천하에 뿌리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그것은 임무 이전에 생물이 지닌 자연스러운 한계이자 최선의 능력이었다.
“비로소 나는 신이 되었구나.”
역천신주의 힘이라면 수도 없이 많은 종을 부릴 수 있을 것이다. 신주의 힘에는 한계가 없으니까.
사문향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괴술사와 조홀이 엎드려 절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표정에 환희가 가득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까마득히 떨어진 태산 인근에서 수많은 교도가 무릎을 꿇은 채 신의 존재를 찬양하고 있었다. 아직 마기가 제대로 드리워진 것도 아니건만, 그래도 녀석들은 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사문향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제 시작이다.’
신화는 배신했고, 광혈은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보았으며, 사음 역시 큰 타격을 입었다.
이제는 상관이 없다.
역천신주는 말 그대로 역천의 힘을 지녔다. 마(魔)에 있어 진정한 역천이란 불로불사(不老不死)라지만, 역천신주와 하나가 된 사문향은 그 이상의 경지가 있음을 깨달았다.
소생(甦生)이다.
죽어 가는 사람을, 심지어 죽은 사람조차도 다시 살려 내는 기적.
끊어진 생명은 혼과 백이 분리되어 대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한 이치다. 역천신주는 그러한 이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의지의 화신이며, 절대적인 천리의 반대에 속한 또 하나의 진리다.
“나는 영원토록 살아가리라. 생사를 주관하는 신으로서 천하를 나의 의지대로 주무를 것이다.”
사문향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환희 가득한 표정 위로 어쩐지 녹슨 듯한 분위기가 어렸다.
“참으로 길었구나.”
그때였다.
-과연 그럴까.
흠칫 놀란 사문향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지?’
잘못 들었을 리는 없다. 역천신주와 하나가 된 그는 대자연의 상식에서도 벗어난 이단의 신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마기를 뿜어내고 있는 그가 잘못 보거나, 잘못 듣거나, 잘못 느낄 리 없다.
‘누구지? 누가 내게 말을 건 것이지?’
-생물이 지닌 자연스러운 한계이자 최선의 힘을 가졌다면, 결국 너는 아직도 천도(天道)의 그물 아래 숨 쉬고 있다는 뜻이 아니더냐.
사문향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늘?”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전하며 점점 두꺼워지는 구름이 마치 거대한 눈알처럼 보였다.
투명한 눈으로 하늘을 노려보던 사문향은 이내 표정을 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잘못 보고 잘못 들을 수가 없다. 잘못 느끼는 것조차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문향은 인정했다. 역천신주와 하나가 되었지만, 아직 진정한 하나가 된 것은 아니라고. 그래서 환청이 들릴 수도 있다고.
설령 환청이 아니더라도 하늘이 말을 걸 수는 없다.
‘나는 지금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서 있다.’
우우우웅.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두 눈에 투명한 막을 씌웠다.
그러자 사방 천지를 날아다니는 반투명한 존재들이 보였다.
그것은 생명을 지니지 못한 것들이었다. 상단전이 과하게 발달하여 신기가 들린 자들이 곧잘 보는 귀신(鬼神)의 정체가 바로 저것들이었다.
죽었음에도 소천하지 못한 것들. 이승에 한이 남아 저승에 가지 못한, 이제는 그 이유조차 잊어버린 멍청한 것들이다.
“좋구나. 이리 선명하게 보일 줄이야.”
광혈교는 초혼의 대법을 이용해 죽은 고수의 혼을 산 사람의 육신에 강림시켰다.
이제 사문향에겐 그런 대법조차도 필요치 않다. 대법이란 역천에 이르기 위한 여러 길 중 하나일 뿐이다. 존재 자체가 역천이 되어 버린 사문향에게 있어 혼을 끌어오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초혼이 어렵지 않기에, 그 외의 일은 더더욱 쉽다.
우우우우웅!
사문향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불길한 마기가 사괴술사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허억!”
고개를 쳐든 사괴술사가 거품을 물었다.
창백해진 얼굴, 두 눈은 뒤로 홱 돌아갔다. 누가 봐도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사문향이 차분하게 말했다.
“이겨 내라.”
마치 명령과도 같은 한마디였다.
그 말에 사괴술사의 떨림이 멈추었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사이하기 그지없는 술력이 뿜어져 나왔다.
역천마기(逆天魔氣)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쿠르릉! 쿠르르릉!
사괴술사의 몸에서도 천둥이 쳤다.
동시에 그의 술력이 짙어졌다. 마기를 술력으로 치환하며 경지를 강제로 상승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치이이이익!
순식간에 술력이 발전하고 전신의 피부가 어두워졌다.
그제야 눈을 똑바로 뜬 사괴술사가 사문향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신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감정의 울림 따위는 조금도 엿보이지 않는다. 한순간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후우우우웅.
사문향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조홀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조홀의 변화는 사괴술사처럼 요란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세 그대로 몸을 부르르 떨며 빠르게 마기를 받아들였다.
훅!
사문향의 눈이 휘어졌다.
조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실로 막강했다. 십이 성 대성을 눈앞에 두고 있던 군황사공이 단숨에 대성에 이른 것은 물론, 보유한 진기의 밀도가 더욱 상승하고 내외상까지 순식간에 치유되었다.
고금에 비할 데 없는 고차원적인 마기를 어렵지 않게 제 것으로 만들었다. 사문향으로선 극미량의 마기만을 전해 줬을 뿐이지만, 그런 기운을 의심 없이 받아 낸 것만으로도 조홀의 충성심과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신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조홀의 목소리는 사괴술사의 그것과 같았다.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환희에 젖어 있던 표정도 얼음을 깎아 놓은 것처럼 딱딱해졌다.
사문향은 수하들의 표정 변화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무한에 가까운 자신의 힘으로 놀라운 경지를 쌓은 수하들의 경지를 강제로 상승시켰다는 사실이었다.
눈물만큼도 안 되는 힘으로도 저만한 고수들을 변화시켰다면, 온 천하를 내 것으로 삼는 것도 결코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하하!”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린 사문향이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광혈의 망나니 놈도 알아차렸을 터이고.”
천화룡은 예전부터 마공보다는 마학(魔學) 그 자체에 심취해 있었다. 초혼술, 강시 제조 등의 술법은 물론 이 세상의 진리를 파헤치고 뒤집는 학문에도 관심이 깊었다.
그 아비보다 말이 잘 통할 수밖에 없는 놈이다. 하물며 그놈 역시 마공으로 성마의 경지를 뚫었으니, 조만간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알아서 제물들을 가져다 바칠 것이다.
사문향이 손으로 태산 아래를 가리켰다.
“가자꾸나. 오늘은 진한 술을 한잔 먹고 싶다.”
그렇게 사문향이 태산을 내려갔다.
그의 뒤를 인형처럼 무심한 얼굴의 두 남자가 따랐다.
* * *
“…….”
산동에 진입한 후 한나절이 넘어서야 겨우 태산 인근에 도착한 연위는 말없이 일대를 둘러보았다.
“……참혹하구나.”
수많은 죽음이 곳곳에 가득하다.
전쟁이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한데도 시체들은 닷새는 족히 지난 것처럼 부패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태산 인근의 땅 전체가 죽은 땅이 되었다. 땅 자체에 사기(死氣)가 그득하다. 부패한 시체들보다 시커멓게 변질된 땅이 더 끔찍해 보였다.
연위는 차분히 죽은 땅을 밟았다.
훅.
발을 디딜 때마다 시커먼 먼지가 피어올랐다.
앞으로 수십 년은 이 땅에 풀 한 포기도 자라지 않을 것이다. 아직 수많은 나무를 잃지 않은 태산도 조만간 제 자식들을 저승으로 보내야만 할 것이다.
“참으로 잔혹하구나.”
연위의 얼굴에 분노의 기색이 떠올랐다.
“이것은 마치 역병과도 같다. 불로도, 비바람으로도 몰아낼 수 없는 역병이다.”
놈의 그림자가 환상처럼 보였다.
껄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수많은 추종자를 이끌고 나아가는 마신(魔神)의 모습.
‘맞설 수가 없다. 그러나 맞서야만 한다. 한시라도 빨리 놈을 멈춰 세워야만 천하가…….’
그때였다.
“……?!”
연위가 뒤를 돌아보았다.
“끄응…….”
한 줄기 신음이 들려왔다.
그는 곧바로 신음이 들린 곳으로 뛰어갔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신법 속도가 기존보다 훨씬 더 빨랐다.
잠시 후.
“이보시오. 정신이 드시오?”
“당신은……?”
정신을 차린 자는 다섯 개의 매듭을 찬 중년의 거지였다. 딱히 내외상을 입은 게 아닌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연가의 가주 연위라 하오.”
“여, 연가주님이셨구려.”
눈도 흐릿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듯했다.
“내가 왜 정신을…… 그저 동태를 살피러 왔을 뿐인데…….”
연위의 눈이 흔들렸다.
이 거지는 태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직접 확인하고자 왔을 뿐이다. 그런데도 정신을 잃었다.
‘마기!’
연위가 침착하게 그를 일으켜 세웠다.
“가득상은 어디 있소?”
그 순간, 거지의 눈이 번쩍 뜨였다.
“방주님! 방주님이 위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