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6)
136화. 욕심의 대가 (6)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다향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색이 선명하지만 부담스럽지는 않은 향이었다. 존재감은 뚜렷하되 신경을 곤두서지 않게 하는 향이었다.
연호정이 보는 제갈문호도 그러했다.
드넓은 천하에서 최고의 무가(武家)로 칭송받는 여섯 가문 중 하나, 호북 융중산에 거하며 공명(孔明崆峒)의 전설을 잇는 가문의 수장은 그런 인상이었다.
제갈문호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좋은 차로군.”
“입맛에 맞으신다니 다행입니다.”
“찻잎이 좋아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이 정도 향과 맛을 내지 못하는 법이지. 다도(茶道)에 일가견이 있는 것 같네.”
“그 정도는 아닙니다. 많이는 타 봤지만, 깊게 익히지는 못했습니다.”
제갈문호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많이 타 봤다?”
“예.”
보통 차를 타는 것은 아랫사람이 할 일이다. 어지간한 귀빈이 아니고서야 손수 차를 타서 대접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런데도 연호정은 차를 많이 타 봤다고 한다.
“고상한 취미로구만.”
“취미는 아닙니다. 그냥 누구한테 부탁하느니 그 시간에 제가 타서 마시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요.”
“그런가?”
“그렇습니다.”
“하하, 성미가 급하다고 해야 할지, 합리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만.”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별종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왜일까?
딸의 목숨을 구해 준 청년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딸의 친구라서 그런 걸까?
묘하게 정이 가는 청년이었다. 어쩌면 무인보다 문사에 가까운 외양 때문일는지도 모르겠다.
“육대세가는 칠성각에 거하고 있지. 다만 칠성각이라도 각자 머무르는 곳들이 워낙 떨어져 있다 보니 왕래가 쉽지 않네. 바쁘기도 오죽 바빴지만 말이야.”
“…….”
“꼭 한번 찾아오고 싶었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묘한 대답이다.
겸양의 발언이 아닌데도 딱히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천성 때문일 것이다.
맺고 끊는 것이 명확한 성격인 것 같았다. 말하자면, 제갈문호가 선호하는 유형 중 하나이기도 했다.
‘게다가 무슨 일로 고맙다고 하는 건지도 알고 있어. 눈치도 빠르다.’
딸에게 들은 것과는 다소 다른 인상이었다. 딱히 긴장한 것 같지 않은데도 상당히 딱딱한 분위기였다.
“허허, 내가 불편한 모양이군.”
“그렇진 않습니다.”
“음? 그런가? 그러면 다행이네만.”
제갈문호의 입가에는 깊은 주름이 파여 있었다.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 얼굴이었다. 마주하는 이의 마음을 무장 해제시키는 지략가의 표정이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언젠가 만나게 될 줄은 알았지만, 이리 벌써 만날 줄은 몰랐는데.’
백도무림맹의 두뇌.
과거, 사음교의 난이 벌어지기 전에 흑제성은 무림맹과 사사건건 부딪쳤다.
흑제성은 세력 확장에 한창이었고, 무림맹은 느닷없이 득세하는 흑도 무림을 견제할 필요를 느꼈다.
필연코 부딪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휘하 무사들이 많이 죽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흑암제로서 죽을 때까지, 무림맹의 군사(軍師)는 제갈문호가 맡고 있었다.
‘과연.’
회귀 후 이 정도로 잘 정제된 혜안(慧眼)은 처음 본다.
뛰어난 지혜를 갖추었지만 그보다 협(俠)을 중요시하는 아버지와도, 뛰어난 지혜를 철저하게 본인의 욕심을 위해 사용하는 모용군과도 다른 눈빛.
지식의 결정체다. 제갈문호의 눈빛은 그래서 인상적이었다.
“대단하십니다.”
“음?”
무의식중에 나온 말이지만, 연호정은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지식이 많아지고 잔꾀를 활용할 방법을 알아 가다 보면, 사람은 순수를 잃기 마련입니다.”
“…….”
“가주님께서는 다르시군요.”
“허허, 다르다?”
딸의 친구요, 강호의 후배가 대놓고 자신을 평가하고 있다.
흔한 경험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제갈문호는 연호정이 자신을 어찌 보는지 크게 궁금했다.
“그래, 자네가 보는 나는 어떠한가?”
“글쎄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아연이와 준이가 선한 이유를 오늘에야 알겠습니다.”
“뭐라? 하하하!”
제갈문호는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 눈에는 내가 순수하고 착한 사람처럼 보이는 모양이지?”
“사람은 보고 싶은 걸 본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저 스스로 가주님께서 그런 사람이기를 마음 깊이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허허! 내게 왜 그런 모습을 바라나?”
“한 번쯤은 괜찮지 않겠습니까? 냉혹하지 않은 군사가 무림맹을 휘어잡아 보는 것도.”
“……!”
“군사란 휘하 병사를, 수하들을 장기의 말처럼 부려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군사들은 대개 냉혹해지기 마련이지요. 냉혹하지 않으면, 좋은 머리로도 효율적인 군략(軍略)을 짜기가 어려울 테니까요.”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그래서 선한 군사는 흔치 않습니다. 충분히 강해지지 않으면 본인의 순수도, 올바름도 지키지 못하거든요.”
제갈문호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무림맹의 군사로 내정되었다는 건 어찌 알았나?”
“신기제갈(神機諸葛)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런 제갈세가의 정점인 가주님을 두고, 다른 사람을 군사로 세우는 우(愚)를 범할 리가 없잖습니까.”
“허허허.”
제갈문호는 그저 웃고야 말았다.
그 웃음에는 상대에 대한 감탄과 놀라움이 묻어났다.
“소문이 축소된 감이 있군. 열혈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대뜸 위험한 소리를 할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그랬습니까?”
“자네, 내 말을 안 믿는구만?”
“천하제일 구주명가를 상대로 배짱을 부리려면 앞뒤 안 가리고 다 죽일 생각은 기본으로 깔고 있어야 합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위험해 보일 수 있지요.”
“허허.”
“가주님께서 저를 한없이 열혈인 후기지수로만 보셨을 리가 없습니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제갈문호가 탁자를 살짝 쳤다.
“합격일세.”
“…….”
“눈치만 빨라서도 안 되고, 착하기만 해서도 안 되네. 마냥 호전적이기만 해서도 안 되며, 지나치게 소심해서도 안 되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독립유군을 이끌 만한 자로서 믿음직하다는 말일세.”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독립유군…….”
“금일 아침, 모용가주가 독립유군의 창설 의의를 밝혔네. 이런저런 말은 많았지만, 무슨 이유가 되었든 꼭 만들고야 말겠다는 의도가 느껴졌지.”
“그렇군요.”
“자네에게는 미리 말했으리라 생각하네.”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제갈문호가 고소를 지었다.
“기실, 나는 독립유군의 창설을 반대하네. 그것은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아.”
“…….”
“다만, 자네라면 괜찮겠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힘에 부치시는 모양입니다.”
“음?”
“모용가주의 위세가 보통이 아니로군요.”
제갈문호의 눈이 번뜩였다.
“위세라…… 그렇지, 보통이 아니지.”
“독립유군의 존재는 향후 무림맹 휘하 단체를 조직할 때, 자칫 나쁜 선례가 될 수 있습니다. 제 아버지도 그렇고, 가주님께서 그리 걱정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
“필요 이상으로 뛰어난 모습을 보여 주지도, 쓸모없는 부대라는 오명을 뿌리지도 않겠습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일 것 같군요.”
그 말을 끝으로 연호정은 차로 목을 축였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틀렸군.”
“예?”
“이제 갓 어린 티를 벗어 낸 호랑이인 줄 알았네. 인제 보니 자네, 노련하기 짝이 없는 대호(大虎)였구만.”
“과분한 평가 감사합니다.”
“과분하다니? 그 이상을 표현할 수 없는 내 어휘력이 원망스러울 지경이라네.”
제갈문호 역시 차를 한 모금 삼켰다. 그 한 모금에 지난 걱정과 시름을 어느 정도 떨칠 수 있었다.
“하나만 묻겠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이거군.’
제갈문호는 지금 할 말을 묻기 위해 온 것이 분명했다. 자신도 모르게 두 눈에 힘이 들어갔다.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해 주었으면 하네. 진실하게, 거짓 없이.”
“말씀하십시오.”
“모용세가와 모종의 거래를 맺었나?”
“…….”
“부디 솔직하게 말해 주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모용가주와의 거래는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제갈문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연호정의 이어지는 말에, 딱딱하게 굳었던 그의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 떠올랐다.
“그리고 세 번 다 제가 이겼지요.”
“……이겼다?”
“아직까지는 연전연승입니다. 워낙 만만치 않은 사람이니 언제 깨질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갈문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모용가주는 과거, 본가를 집어삼킬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뭐, 뭐라?!”
이런 얘기는 처음 듣는다. 제갈문호의 얼굴에 솔직한 놀라움이 깃들었다.
‘괜찮겠군.’
연호정은 상대의 표정을, 눈빛을, 감정과 성격을 살폈다.
‘굳이 군사가 아니더라도, 이 사람이라면 괜찮겠어.’
그는 자신이 작년에 걸쳐 겪었던 일을 가감 없이 풀었다.
후기지수 회합에서 후개와 만났던 일, 명가를 상대하며 모용세가와 손을 잡았던 일, 이후 명허림을 잡는 와중 남궁세가와 또 한 번의 갈등이 생길 뻔한 일까지.
나아가 모용군이 자신을 감시하는 동시에 쓸 만한 장기 말로 쓰기 위해 부대의 수장으로 추천하려 들었다는 것까지 모두.
얘기를 다 듣고 난 후, 제갈문호의 얼굴은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모용가주…… 참으로 위험한 인물이구먼.”
“위험하지요. 뛰어나기도 하고.”
“하면 자네가 모용가주와 거래를 했다는 것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건 성미에 안 맞아서 말입니다. 복수도 할 겸, 제 자유도 찾을 겸 담판을 지은 겁니다.”
“허허, 허허허!”
제갈문호는 감탄 어린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그 모용가주를 상대로 담판을 지었다? 허허허!”
무엇이 그리 유쾌한지 모르겠다. 그는 한참을 말없이 웃기만 했다.
“대체 자네, 정체가 뭔가?”
웃음기가 어린 질문이었다.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그 무공만으로도 도통 연배에 어울리지 않거늘, 인제 보니 중원을 횡단하며 별의별 사건에 개입하고 있었구먼.”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워낙에 사고 치는 걸 좋아합니다.”
한참 동안 연호정을 바라보던 제갈문호가 빙긋 웃었다.
“아쉽군. 아쉬워.”
“……?”
“일부러 그리 딱딱하게 굴지 않아도 되네. 난 방금 포기했거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연이 말일세.”
“…….”
“자네는 뛰어난 사람일세. 딸 가진 아비로서, 자네처럼 뛰어난 사람을 사위로 들이는 건 바라 마지않을 일이지.”
“……콜록.”
“하지만 자네는 본가의 큰 손님이 될 수는 있어도, 정작 아연이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는 없을 것 같네. 지닌바 재주가 너무 뛰어나거든.”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전 혼인 생각이 없습니다.”
제갈문호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도 우리 아연이와 좋은 친구로 남아 주시게. 훗날 정 마음이 간다면 내 사위가 되어도 좋네.”
이 양반들은 하나같이 자식을 혼인시키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오늘 만남, 아주 흥미로웠네. 시간을 내 주어 고맙네.”
“아닙니다.”
“이만 가 봄세.”
“조심히 가십시오.”
“아! 가기 전에, 이거 하나는 알려 줌세.”
“예?”
제갈문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어쩌면 독립유군은 하나가 아닐지도 모른다네.”
“……?!”
“자네가 맡을 유군 말고, 또 하나의 유군이 만들어질 수도 있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구파에서 맡습니까?”
“모용가주가 욕심을 안 부린다면.”
“…….”
“쉬게나.”
제갈문호가 파군각을 나섰다.
그를 배웅한 연호정은 고소를 지었다.
“이보시오, 모용 나으리. 욕심부리다가는 자기 패도 잃는 게 도박이오. 너무 막 나가는 것 아닌지?”
그때, 얼빠진 대답이 들려왔다.
“예?”
연호정이 눈을 끔뻑였다. 어느새 옥청이 와 있었다.
“뭐냐?”
“……?”
“거처로 안 갔냐, 너?”
“가르침……을 받아야지요.”
“가르침?”
“……예?”
“내가 네 사부라도 돼? 나한테 가르침을 왜 받는데?”
옥청은 당황했다.
“그, 그게…… 아니, 어제 분명 연 공자께서…….”
“가르침을 받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지?”
“……대가요?”
연호정이 음험하게 웃었다.
며칠 동안 할 일도 없는데, 너 잘 걸렸다.
그가 친근한 듯 옥청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네 사부가 검선 어른 맞지?”
“예? 아, 예에.”
“무당 무공의 전능자라! 멋진 심득(心得)을 깨우치고 있겠어.”
“예에.”
“아름답겠지. 매혹적이겠지. 도사라서 속세의 셈법에 익숙하진 않겠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세상을 배워 보는 건 어떤가?”
“무, 무슨 말씀인지 저는 잘…….”
“클클, 알게 될 거야. 어떻게, 가르침 지금부터 시작할까?”
“예? 헛, 예! 그럼 감사하지요!”
“일단 무당 무공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펼쳐 봐. 자세하게, 아주 상세하게 말이야. 어린애가 봐도 묘리(妙理)를 깨달을 수 있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