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60)
흑백무제 1360화(1359/1368)
1360화. 스러지는 세상 (1)
눈이 뜨였다.
동시에 속이 울렁거렸다. 흐릿한 시야가 미친 듯이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었다.
‘허백.’
암무단주 허백의 등에 업혀 있다. 그리고 그 주변을 호종대가 에워싸고 달렸다.
연호정은 다시 눈을 감았다.
우우우웅.
황룡신왕기가 꿈틀거리며 그의 육신에 활력을 선사했다.
정신을 잃은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황룡신왕공은 그의 몸을 빠르게 복구해 내고 있었다.
사문향과의 싸움으로 부러졌던 뼈도, 갈려 나간 피부와 근육도, 헐어 버릴 정도로 당한 내장까지도 거의 다 치료가 되었다.
‘인간이 아니군.’
기(氣)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치유력 또한 상승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밀도 높은 기운은 과도한 치유력으로 오히려 인체를 파괴하기도 한다. 만약 제때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황룡신왕공의 엄청난 기가 신체 말단부터 파괴했을 것이다.
‘인간이 아니니 완벽하지도 않은 것이지.’
사문향을 제외하면 당대 천하, 아니 고금을 논해도 첫손을 다툴 만한 경지에 올랐다. 연호정은 담담히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완벽하지는 않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한계가 있는 법이다. 연호정은 사문향과 싸우며 그 한계를 넘어섰다.
덕분에 알아서는 안 될 깨달음을 거머쥐었고 동시에 기의 밀도까지 올라갔지만, 이 힘은 연호정이 다룰 수 없는 힘이었다.
인간의 몸으로 신선의 힘을 다룬다?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껍데기를 버릴 기회를 얻었나.’
스승은 말했다. 단 한 점의 무의식마저 온전한 의식 아래 두는 순간, 너는 인간의 탈을 벗고 신선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맞는 말이지만 틀린 말이기도 했다.
정확히는, 신선이 되지 않으면 그는 언제고 파멸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천리의 그물은 성긴 듯 보여도 촘촘하고 질겨서, 단 하나의 이단(異端)조차 용납하지 않으니까.
이승에 허락되지 않은 힘을 가진 자를 하늘은 용인하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에서 도려내 버리는 것이 하늘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스승님이나 사문향은 끝까지 인간이었던 스스로를 버리지 않은 셈이었다. 무려 삼백 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왔으니까.
신선의 영역에 한 발 걸쳤으나 인간의 영역에도 한 발을 걸친 존재들.
그러나 지금의 연호정은 확실히 인간보다 신선에 가까운 존재였다.
‘아마 스승님께서도 알고 계셨겠지.’
그런데도 자신의 선택을 존중해 주셨다.
연호정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한 스승의 애정에 변함이 없음을. 그걸 아는데도 자신의 선택을 존중해 주신 것은 애정 이상의 신뢰가 있기 때문이리라.
‘그도 그렇지만.’
또한 스승님은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인간의 탈을 벗어 던지더라도 끝까지 그 선택을 후회하리라는 걸. 자신은 그렇게 태어난 놈이며, 그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놈이라는 걸.
그럼에도 꿈속에 나타나 주신 것은, 그래도 하나뿐인 제자가 하루빨리 평온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제가 죽더라도 한 번은…… 꼭 한 번은 다시 뵐 수 있기를.’
마음을 정리한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잠깐 쉬지.”
허백의 눈이 흔들렸다.
“성주님?!”
“어지럽다. 쉬고 싶어.”
“성주님!!”
파바바박!
허백과 호종대 전원이 신법을 멈췄다.
허백이 조심스레 연호정을 내려놓았다.
“괜찮으십니까?”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북동쪽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여전히 흐릿했다.
세상이 온통 뿌옇다. 그래서일까? 산천초목도, 하늘과 땅도 다 하나처럼 보였다.
“그렇구나.”
시야가 차츰 선명해졌다.
“놈이 성공했군.”
메마른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 음성은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사문향과 상대하며 오른 경지로 인해 거대한 힘을 손에 넣었지만, 그만큼 무언가를 상실해 버린 것 같았다.
한중명이 무릎을 꿇었다.
“성주님!”
호종대원들도 전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별다른 말도 없었지만 성주를 향한 절대적인 충성심이 느껴졌다. 성주가 위험에 처했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한 자신들을 자책하고 있는 것이다.
“일어들 나라.”
호종대원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호정은 여전히 북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이 마르구나.”
“여기 있습니다.”
허백이 건넨 수통을 단숨에 비워 낸 그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텁텁하군. 진흙탕 속에서 숨을 쉬는 것 같아.”
“…….”
“마기(魔氣)라…… 이 정도 마기는 어디에서도 느껴 본 적이 없는데.”
연호정은 눈을 감았다.
“대단한 놈이야. 존재 자체가 악(惡)이지만, 최고가 되기 위해 수백 년을 인내한 그 독기만큼은 인정해 줄 수밖에 없겠다.”
심지어 기어이 꿈을 달성해 버렸다.
집념이라는 말로도 다 표현하기가 힘들다. 천하에 사문향 같은 인간은 둘도 없을 것이다.
연호정은 스승의 말을 떠올렸다.
‘이 나조차도 그가 지닌 역천의 힘이 어떻게 개화할지 모르겠다. 진정 혈옥처럼 시공을 뒤틀 수도 있고, 순식간에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 수도 있다. 오히려 그놈의 힘이 약해질 수도 있을 것이며, 잘못 다루면 그놈의 영혼조차도 찢겨 나갈 것이다.’
과연 그럴까?
‘스승님은 알고 계셨을 것이다.’
지금 느껴지는 이 마기의 순도는 대자연에 속한 어떤 기운과도 비교할 수 없다. 당장 연호정이 지닌 황룡신왕기도 이 마기보다는 순도가 낮았다.
그렇기 때문에 연호정은 알 수 있었다.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 수는 있어도 시공을 뒤틀지는 못해.’
황룡신왕기가 이 마기만큼의 밀도를 지녔다면 시공을 넘나들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황룡신왕공이 대자연의 이치를 따르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정(正)이든 마(魔)든 극치에 달하면 경계의 구분이 사라지는 법이다.
즉, 사문향은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미래로 넘어갈 수도 없다.
‘그래서 좋고, 그래서 끔찍하지.’
만약 자신처럼 사문향이 과거로 돌아가 역사를 바꿔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연호정이, 나아가 그와 함께했던 수많은 사람이 지금껏 바꿔 왔던 모든 게 무(無)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쳐도, 진짜 문제는 이쪽에서 대항할 수단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세상에서 날뛰는 것도 아니요, 역사를 뒤바꾸는 자를 무슨 수로 이기겠는가.
그런 면에서 시공을 뒤틀지는 못하니 다행이다.
문제는 사문향의 저 끔찍한 힘이 현실에 전부 풀릴 수 있다는 것이다.
‘놈이 풍기는 마기의 한 조각만으로도 평범한 사람을 구제 불가의 악인으로 만들 수 있다. 일류고수를 단번에 절정의 마인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야. 놈은 그런 마기를 무한정으로 발산할 수 있다.’
우우웅.
황룡기가 고개를 쳐들었다.
감정이란 것에 점점 무뎌져 가는 와중에도 황룡기는 마(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연호정의 사고, 의지가 마를 인식한 순간 황룡기는 이미 꿈틀거리고 있었다.
‘무한정…… 그래, 그 빌어먹을 구슬은 그럴 수 있지.’
연호정은 역천신주의 존재를 포착하고 있었다.
‘사문향, 알고 있나? 너는 그 구슬을 다스리고 있는 게 아니야.’
아마 모를 것이다. 아니, 모를 수밖에 없다.
사문향은 반선의 영역에서 역천신주를 받아 냈다. 반은 인간이란 말이다.
‘인간이지. 인간일 수밖에 없지. 인간이기에 너는 끊임없이 집념을 불사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모르는 것도 많을 수밖에.’
연호정은 씁쓸함을 느꼈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 간다는 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뭐가 됐든, 놈이 흩뿌릴 재앙이 상상을 초월하리란 것은 분명한 사실이렷다.”
허백과 한중명, 호종대원들은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누구도 연호정의 말에 질문을 던지거나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연호정은 그런 부하들의 반응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스승님.’
그는 스승의 또 다른 발언을 떠올렸다.
‘완성(完成)이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야. 네가 너로서 완성되었을 때, 비로소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문향을 무너트릴 수 있다고.’
‘그러니 잠시 세상은 잊고 스스로를 완성시켜라. 어떻게 완성시켜야 할지 모르겠다고 초조해하지 말고, 충분히 쉬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해라.’
연호정은 생각해 보았다. 지금 내 상태로 녀석을 이길 수 있을까?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것은 곧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이길 자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확신할 정도는 아니다. 내 마음은 그러한데 정작 상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지 않다.
‘이 정도 마기를 무한정 뿜어내는 놈이라면 어떤 순간에도 지치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역천의 극치인 이 마기를 제한 없이 쓰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육신을 지녔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막아야겠지.’
연호정은 스승의 말을 잊지 않았다. 스스로를 완성시키기 전까지는 사문향과 싸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완성하고자 어딘가에 틀어박혀 명상을 하거나 밭을 가는 등,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답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 그렇다면 내가 나답게 살아가며 힘을 얻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다.
연호정은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너희도 쉬어라.”
“예?”
“지금 이곳으로 본성의 병력들이 오고 있다.”
“……!!”
“강량과 진양, 그 너머에 묵비와 의정군까지 오고 있군. 반나절은 족히 걸릴 테니 푹 쉬도록 해라.”
“성주님…….”
“다만, 어지간하면 움직이지 말고 운공으로 몸을 보하도록 해라. 지금 너희는 느끼기 힘들겠지만, 조만간 이곳까지도 마기가 전해질 것이다. 그 마기에 홀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심신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좋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들은 굳이 묻지 않고 제자리에 앉아 운공에 들어갔다. 연호정의 말이라면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들라고 해도 따를 사람들이었다.
‘올 사람이 더 있군.’
천기(天氣)가 스며들어 속삭인다.
천리의 그물 아래 가장 진하고 강한 인연으로 얽힌 사람, 혈육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
‘지평.’
보이고 또 보인다.
‘아버지는 산동으로 향하시는구나.’
아버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명하신 분이니 당해 내기 힘든 적과 싸우지는 않으시겠지만, 피눈물을 흘리는 민초들을 외면하기엔 지니신 협심(俠心)이 지나치게 빼어났다.
그렇게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성격대로, 각자가 원하는 바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던 연호정은 어느 순간, 저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형님!”
“연 공자!”
진심 어린 걱정이, 그리고 반가움이 가득 묻어 나오는 얼굴로 다가오는 든든한 인연들.
오대신장 중 셋과 흑제성의 병력, 그리고 의정군이었다.
‘많이 줄었구나.’
의정군도 수십 기나 되는 군병들을 잃었지만, 흑제성 병력은 더 많이 줄어들었다.
연호정은 그 사실에 깊은 슬픔을 느꼈지만, 예전만큼 죽을 듯이 괴롭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엄청난 혐오감을 느꼈다.
스륵.
어느새 정신을 차린 호종대와 허백이 연호정을 호위하듯 섰다.
“오랜만이군.”
다시, 또다시.
흑제성의 수뇌부들이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