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61)
흑백무제 1361화(1360/1368)
1361화. 스러지는 세상 (2)
“오셨습니까.”
연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자네……?”
가득상이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제 꼴이 영 별로지요?”
별로인 정도가 아니었다.
가득상의 몸은 피투성이였다. 치료가 진즉 끝났음에도 전신에서 어우러져 나오는 기파가 지극히 거칠었다.
그나마 사지라도 멀쩡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내상의 정도를 보면 그조차 위안이 안 되는 소리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득상의 내상은 심해지고 있었다. 자꾸만 솟구치는 탁기를 자력으로 불사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연위는 곧장 가득상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가주님.”
“입을 닫고 눈을 감게. 마음을 편히 먹도록 해.”
우우우웅.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검극사기가 가득상의 명문혈을 통해 체내로 들어갔다.
순간 가득상의 몸이 움찔 떨렸다. 약해진 몸에 고순도의 진기가 들어와서 지독한 통증을 유발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음 한 자락 흘리지 않았다.
잠시 후.
화아악!
가득상의 몸을 좀먹던 탁기가 전신 모공을 통해 증발되었다.
“이 정도면 당장 운신하기엔 부족함이 없을 것이네.”
“감사합니다.”
내력 회복에 이점이 있는 개방 비전의 단약으로도 잡지 못한 탁기를 심검지기(心劍之氣)가 섞인 검극사기로 날려 버렸다.
대단한 기공술이었지만, 가득상은 그에 감탄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것에 일일이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적과 조우했습니다.”
“물론 그렇겠지만…….”
“사음교주와 만난 것은 아닙니다. 놈을 따르는 고수들과 부딪쳤어요.”
가득상이 서글픈 눈으로 좌측을 바라보았다.
좌측 멀리 보이는 마을 곳곳에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놈들이 마을을 공격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모조리 죽이고 불태우기를 반복했어요.”
“…….”
“놈들을 막다가 제법 다쳤습니다.”
그나마 천운이 있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연위가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면 무공을 상실했음은 물론 평생 골병을 앓다가 죽었을 정도로 가득상의 상태는 심각했다.
하지만 가득상은 자신의 상태보다 마을을 침공한 적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 괴로운 것 같았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황폐화된 마을을 보는 그의 눈은 지독한 절망감과 자책감으로 가득했다.
물끄러미 가득상을 바라보던 연위가 툭 던지듯 말했다.
“방주의 위에 올랐다고 들었네.”
“그랬지요.”
“방주가 되었다는 것은, 자네가 더 이상 후개가 아니라는 뜻이겠지?”
가득상이 연위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네가 적을 막지 못해 자괴감에 빠진 것은 알겠네. 죄 없는 사람들이 죽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에 좌절했다는 것도 알아.”
“…….”
“하지만 자네는 방주야. 더는 예전처럼 마음대로 웃고 떠들 만한 위치가 아니라는 것이네. 웃어야 할 때도 표정을 없앨 줄 알고, 울어야 할 때도 웃을 줄 아는 것. 그게 바로 수장이라네.”
“…….”
“자네는 아직 중원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이라네. 잠깐이라면 몰라도 매 순간 이런 식으로 무너져 버리면 방도들이 누굴 믿고 따르겠는가.”
가득상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도들 역시 가득상처럼 무기력해 보였다. 와중에 이번 전투로 팔이 날아간 방도도 있었고, 목발을 짚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방도도 있었다.
아마 그들 역시 가득상과 같은 심정일 것이다. 그러고도 어떻게든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가득상이 한숨을 쉬었다.
‘나 때문이다.’
연위의 말이 옳다.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적에게 죽었다. 적을 막지 못한 것은 중원 무림인으로서 치욕이다.
그러나 살았다면, 죽지 않았다면 다시 달려야만 했다. 한 단체의 수장인 그가 방도들을 독려해야만 했다. 그래서 저토록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다잡아 줘야만 했다.
‘그들을 위해 슬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나는 아직 살아 있어. 내가 해야 할 일이 많다. 이런 곳에서 절망에 잡아먹혀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될 일이야.’
연위 역시 민초를 사랑하고 협을 숭상하는 남자다. 그 역시 마을이 참변을 당했다는 사실에 크게 분노하고 슬퍼할 것이다.
그래도 그는 티를 내지 않는다. 분노와 절망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은 움직여야 할 때다.
활기차게, 제대로 된 마음으로.
“제가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럴 수 있네. 앞으로 또 그럴지도 몰라. 수장이란 그런 경험을 토대로 단단해지는 것일세.”
“명심하겠습니다.”
연위의 어조가 한층 진지해졌다.
“이제부터 자네가 할 일은 중원 전체를 아우르는 정보력으로 각 문파에 사음교주의 상황을 전달하는 것일세. 나아가, 절대로 그자와 싸워선 안 된다고 알리는 것이야.”
“예.”
“그리고 또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네. 자네 입으로 말해 보게.”
가득상의 눈이 본래의 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앞으로 저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대비하는 일입니다.”
“옳은 말일세.”
“하지만 그런 방법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가득상은 언제, 어떤 순간에도 불굴의 의지를 보여 주는 사람이다. 언뜻 가볍고 경박해 보이기도 하지만, 속내는 누구보다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조차도 적의 전력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방법은 항상 있다네. 우리가 찾지 못할 뿐.”
연위가 한층 단단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자네는 사음교주와 싸운 것이 아니야. 솔직히 말하겠네. 교주와 싸웠다면 자네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나와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네.”
“…….”
“그걸 자네라고 모르지 않을 거야. 그런데도 적을 막기 힘들다고 말하고 있네. 적의 숫자가 많이 줄은 것으로 아는데, 자네가 유독 그들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있나?”
차분하게 가득상의 정신을 풀어 주면서도 얻어 낼 것은 얻어 낸다. 자식을 제외한 남들에게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닌데도 유독 말을 많이 하는 것은 그만큼 현 상황이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가득상이 어두운 얼굴로 답했다.
“놈들은 뭔가가 달랐습니다.”
“뭐가 달랐지? 예상보다 더 강했나?”
“강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뭔가가 달랐습니다.”
“……?”
“처음 그놈들과 마주했을 때, 저는 항룡신공의 구결조차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연위의 눈이 흔들렸다.
“그게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돌아가신 사부께서 뼈에 새겨질 정도로 연마시킨 항룡신공의 구결을, 놈들과 마주한 순간 잊어버렸습니다.”
“……!”
“그렇다고 놈들이 무슨 대단한 술수를 쓴 것도 아닙니다.”
가득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놈들의 이질적인 기운이, 눈빛이 저로 하여금 무공의 구결조차 잊게 만들었습니다.”
“자세히 말해 보게.”
“놈들의 무공은 흑제성이나 무림맹의 정예 병력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대단했습니다. 그건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압니다. 하지만 놈들의 눈빛과 기도는……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것이라 뭐라 말하기가 애매합니다.”
“…….”
“확실한 건, 누구라도 그런 기운을 대하면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가득상은 초절정고수다.
워낙 바빠서 남들만큼 무공 수련을 깊게 하지도 못하지만, 그렇기에 더 대단하다고 볼 수 있었다. 이제 겨우 마흔을 눈앞에 둔 나이에 구대문파 장문인에 육박하는 무공을 지녔으니 그의 재능도 무시 못 할 수준이었다.
그래서 이 발언이 공포스러운 것이다. 그 재능과 정신력이 누구 못지않게 대단한데도 적을 마주하자마자 무공 구결도 잊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는 말이니까.
‘설마?’
우우우웅.
상단에 자리한 연가신단을 살짝 풀어 가득상을 주시했다.
순간 연위는 볼 수 있었다. 가득상의 미간 사이에 찍힌 푸른 점을.
‘겁에 질렸다?’
미간에 보이는 저 점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면 분노에 사로잡혔다는 뜻이요, 검은색으로 물들었다면 절망에 빠졌다는 뜻이다.
가득상의 그것은 암청색에 가까웠다. 공포와 절망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초절정고수의 상단전에 충격을 줄 정도로 적의 존재가 대단하다는 뜻.
연위의 신통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직접 본 것과 멀리서 내다보는 것은 차이가 있다. 그래서 연위조차도 가득상이 왜 이런 상태인지, 적의 기도가 어떤지 투명하게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의 상단전은 연가신단을 형성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제를 벗어날 때가 많았다. 능력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다.’
가득상의 저 마음을 심검지기로 달래 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긴장을 놓으면 본래대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건 전적으로 스스로 이겨 내야 할 문제였다.
“가 방주.”
“……예.”
“내가, 그리고 호정이 놈들과 마주했다면 과연 절망했을까?”
가득상의 눈이 흔들렸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우리 부자가 적을 눈앞에 두고 무공 구결마저 잊을 정도로 충격을 받겠는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럴 것이네. 우리는 그러지 않아. 자네가 본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일세. 내, 그 정도 자부심은 있어.”
“…….”
“또한 그것은 비단 나나 호정만의 얘기가 아닐 것이네. 무극에 이른 고수들이라면 어떻게든 놈들과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이야.”
“예,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자네가 할 일은 무극수들을 잘 다루는 것이로군.”
“……!”
“자네 정도 되는 고수조차 적병을 상대하며 크나큰 충격을 받았어. 그렇다면 자네보다 더 강한 고수들을 움직여야지.”
연위가 마을을 가리켰다.
“그래야 저 마을에서 벌어졌던 일을 막을 수 있지. 그렇지 않은가?”
가득상의 눈이 점점 맑아졌다.
“예, 그렇군요.”
“정신을 차리게. 자네에겐 자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십만개방의 방주라는 직책은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야.”
“…….”
“우리를 써먹어 보게. 벅차다면 제갈 군사와 호정, 흑제성의 군사들까지 움직여서 우리를 이용하게. 그게 자네가 할 일이네.”
가득상의 턱이 불거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또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나는 차후 천하에서 가장 위대한 정보 단체의 수장이 될 남자가 성장 중인 모습을 보고 있었을 뿐이야. 못난 모습이라 생각하지 말게.”
이렇게까지 말해 주는 사람이 있는데도 떨쳐 내지 못하고 머리를 싸매고만 있는다면, 진정 방주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가득상이 가까이 있는 방도에게 외쳤다.
“지금 당장 본 방 전체에 오색비상령(汚色非常令)을 내린다! 이제부터 외부와의 교류를 일절 금하며, 사음교와 광혈교만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한다! 전 중원에 흩어진 방도들 전원에게 명령을 하달해!”
“아, 알겠습니다!”
가득상이 연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공포를 이겨 내기 시작한, 협의 넘치는 십만개방의 방주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가주님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말씀하시게.”
“놈들은 지금 산동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진군하는 방향을 봤을 때 하북으로 향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하북…….”
“지금 당장 신화교주 기천웅을 만나 주십시오. 수배는 제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