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62)
흑백무제 1362화(1361/1368)
1362화. 스러지는 세상 (3)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은교는 매우 놀랐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로?”
패율은 쓴웃음을 흘렸다.
“하릴없이 마인들을 때려잡는 못난 사제를 보다 못한 사형이 저를 이리로 보냈습니다.”
알아듣기 힘든 말이지만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은교 역시 패율의 성격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네, 전보다 차분해진 것 같군.”
“그렇습니까?”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그 거칠고 살벌한 기도가 싹 사라졌어. 기의 밀도도 당시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으니, 그야말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세.”
당장 존경하는 장문 사형보다도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 그였다. 단순 실전 경험만 따져도 점창 제일이라 할 만하다.
이제는 당대 점창파 최강의 고수라 불리어도 부족함이 없지만, 패율은 그 사실에 조금의 자부심도 느끼지 못했다.
넘쳐흐르는 호승심을 마음껏 표출하며 살아온 인생.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평화를 위해 마인을 척살하는 것과 자신의 무공을 완성하겠다는 의지뿐이었다.
“선배님께서도 많이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그래 보이는가.”
“예. 완전히 다른 분이 되셨습니다.”
“듣고 싶네. 자네가 보기에 나는 어떠한지.”
“처음 뵈었을 때는 그 신과 같은 무력과는 별개로 지독한 회한에 젖어 무기력해 보이셨습니다만,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생기가 넘치십니다.”
하은교가 쓴웃음을 흘렸다.
“죽은 자식의 그림자를 쫓는 것조차 실패한 인생이라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사음교를 멸망시키겠다는 다짐뿐이야.”
“그렇군요.”
“어미로서, 무림인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패율이 고개를 돌렸다.
“산동에서 난리가 났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당가주도 그곳으로 갔네.”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산동 전쟁은 패배했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습니다.”
“…….”
“연호정 그놈 소식은 따로 들은 바가 있으십니까?”
“없네.”
“그렇군요.”
연호정이 사음교주와 한판 싸움을 벌였다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결과는 들리지 않았다.
끝내 승부를 내지 못했다는 의견이 대세였지만, 그것은 수장끼리의 승부일 뿐이다. 중원 무림의 병력은 산동 전쟁에서 패배했다.
중요한 건 그것이다.
패배했다 한들 몰살을 당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한데 중원 무림 병력이 정확히 어디로 사라졌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개방에도 물어봤지만, 그들도 모른다고 합니다. 현재 개방은 비상령이 내려진 상태로, 사음교와 광혈교에 대한 정보를 최우선적으로 뽑아내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다 합니다.”
“개방도 총력을 기울이는군.”
“어지간해선 개방이 그렇게까지 열을 올리진 않습니다. 필시 산동 전쟁에서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은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 사음교주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여쭙습니다.”
패율은 심각하지 않은 표정으로, 그러나 진지한 눈으로 물었다.
“사음교주를 만나고 돌아오셨다고 들었는데, 그자는 어떤 자입니까?”
“……모르겠네.”
하은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르겠어. 물론 그자를 보기도 했고 싸우기도 했지만, 이제 와선 그 기억이 희미하네.”
“그럴 수가 있습니까?”
“놈들은 내 기억을 일시적으로나마 봉인했네. 도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상상도 가질 않아. 다행히 연 성주의 도움으로 본래의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었지만, 사음교에 관한 기억은 여전히 흐릿하기만 하네.”
“…….”
“다만, 이거 하나만은 확신하네.”
하은교의 얼굴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보였다.
“사음교주 그자는 천하에서 가장 위험한 자야.”
“…….”
“비단 내가 그에게 패해서만은 아닐세. 이젠 그자의 얼굴조차 흐릿하지만, 그자에게 받은 인상은 아직도 남아 있네.”
“그 정도였습니까?”
“형용할 수 없는 위화감을 전신에 두른 자였어. 솔직히 말함세. 천하에 그보다 더 강한 자는 있을 수 있네. 하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자는 존재하지 않아. 그것이 내 생각일세.”
다른 사람도 아닌 음제 하은교의 발언이다. 허투루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패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 군사에게 듣기로 삼교 중에서도 가장 음험하고 위험한 세력이 사음교라 했습니다. 나머지 두 단체를 실질적으로 조종한 세력이라고 보는 만큼, 사음교주의 위험함은 필시 유례가 없는 수준일 것입니다.”
단체 하나하나가 중원 무림에 심대한 위협을 끼칠 만큼 강했다. 그런 단체 두 곳을 암중에서 조종했다? 중원 무림 두 곳을 조종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어떤 수법으로 그런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그 수완만으로도 천하에서 가장 위험하다 할 만하다.
하은교가 고개를 저었다.
“걱정만 한다고 현실이 달라지진 않지. 여기 당가 사람들도 무림맹과 적극적으로 정보를 교류하고 있네. 조만간 우리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답이 나올 것이야.”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애써 이곳까지 왔지만 당장 자네가 할 일은 없을 듯하네.”
패율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당가였다. 그리고 당가인들은 저마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다. 온 천하가 전쟁으로 내홍을 겪고 있는데도 이곳 사람들만큼은 절망하지 않은 듯했다.
“좋은 가문이군요.”
“그렇다네.”
“사천의 당가라 하면 중원 무림의 공포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만, 지금 이 모습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듯합니다.”
“당대 가주와 전대 가주의 노력이 컸다네.”
“한데…….”
패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화약 아닙니까?”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꽤 커다란 창고가 있었다.
창고 문은 활짝 열려 있었는데, 그 안에 건조한 짚이 가득하고 사람들이 그 위로 시커먼 무언가를 조심스레 쌓고 있었다.
“나는 잘 모르네.”
“화약이 맞을 겁니다. 당가의 화약은 천하 모든 화약 중 가장 균일한 품질을 자랑한다고 하던데, 양도 엄청나군요.”
“균일한 품질?”
“화약의 재료는 여러 가지입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게 초석인데, 초석의 함유량이나 재료 배합에 따라 화약의 품질이 결정된다고 들었습니다.”
“음.”
“하지만 초석은 저마다 품질 편차가 있고 당연히 그것은 화약의 품질에도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화약은 굉장한 폭발력을 내지만, 또 어떤 화약은 그보다 못한 것입니다. 관리를 제대로 못 하면 아예 쓰지도 못할 지경이 되기도 하지요.”
“자네 식견이 보통이 아니구먼.”
“성격이 이래 놔서 싸움터만 전전하던 머저리 아닙니까. 저런 종류의 지식에 관해선 이것저것 알아 두는 편이었습니다.”
“그랬군.”
“다만 궁금한 건, 저토록 많은 화약을 어디에 쓰는지인데.”
하은교가 쓴웃음을 흘렸다.
“가주는 나더러 이곳으로 와서 혹시 모를 외적의 침입을 막아 달라고 하더군.”
“외적…….”
“광혈교는 거의 멸문지화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지만, 절멸한 것은 아니라네. 소교주란 놈이 살아남았는데, 그자의 무공 역시 성천에 비해 모자람이 없었어.”
“기가 막히는군요.”
“예전만 한 성세는 누리지 못하겠지만, 소교주를 따르는 교도들도 있다고 하는 만큼 그들이 공격하면 어지간한 지역은 초토화가 될 수도 있어.”
무극수는 무극수가 아니면 막지 못한다.
광혈교의 잔당들이 혹시라도 사천을 공략하면 하은교라도 있어야만 한다. 하은교가 당관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솔직히 놈들이 다시 사천으로 올까 싶지만…… 어쨌든 대비해 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가만히 하은교의 말을 곱씹던 패율은 문득 드는 생각에 얼굴을 굳혔다.
“선배님. 저를 가주 대리에게 데려다주십시오.”
* * *
“오랜만에 뵙소.”
“잘 지내셨습니까.”
과거 낙원소 일로 당가에 내분이 일어났을 적, 패율도 이곳에 있었다.
그때 당윤과 안면을 텄지만, 대단한 친분을 나누진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의 대면은 딱딱했다.
당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간 중원에 퍼진 마인들을 척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별말씀을. 당가라는 거목을 이끄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오. 당가주께서 왜 그대에게 대리직을 맡겼는지 알겠소.”
“지나치게 뛰어난 형님의 그림자를 겨우 쫓아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패율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걱정되는 게 있어서 찾아뵈었소.”
“말씀하십시오.”
“이번 산동 전쟁은 패배했다고 들었소. 당가는 그것을 어떻게 보시오?”
“워낙 멀리 떨어진 곳이라 저희로서도 확실한 판단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군.”
“다만, 여러 정보를 취합해 본 결과 패배한 것이 맞다고 보고 있습니다.”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하오. 그래서 위험하오.”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패율이 좌측 벽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중원 전도(全圖)와 사천 전도가 펼쳐져 있었다.
“하 선배님께 듣기로 광혈교 놈들이 혈존대사라는 놈을 잡기 위해 사천 북서부에서 출몰했다던데, 맞소?”
“맞습니다.”
“이후 혈존대사를 죽이고 놈들을 몰아냈지만, 결과적으로 광혈교도 일부가 살아서 돌아갔다고 들었소. 맞소?”
“그 또한 맞습니다.”
“산동을 봅시다.”
패율이 손으로 산동을 가리켰다.
“사음교는 중원 북부와 강소성에 걸쳐 병력을 파견해 중원을 일대 혼란으로 몰고 갔소. 그 와중에 산동으로 교주와 정예 병력이 치고 들어와 산동 전체를 피바다로 만들었지.”
“…….”
“그것을 막기 위해 호정과 흑제성 병력은 물론 개방에 섬서에서 전쟁을 치렀던 병력까지 산동으로 달려갔소. 그런데도 패배했지.”
“그랬지요.”
“패배한 아군이 어디로 향했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적군은 하북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들었소. 내 감히 예상컨대, 다시 북부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오.”
“제 생각도 같습니다.”
“결국 놈들은 중원을 휘저을 것이오. 어디부터일지는 몰라도, 착실히 우리를 무너트리려 하겠지.”
패율의 눈이 번뜩였다.
“바로 거기서부터가 문제요.”
“문제라 하심은?”
“현재 무림은 산동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소. 자연 우리의 시선은 사음교주와 휘하 병력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소이다.”
순간 당윤의 눈이 흔들렸다. 그제야 패율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한 것이다.
“광혈교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나라면 그럴 것이오.”
패율이 손가락으로 사천 전도를 툭툭 쳤다.
“사천은 고래로 외적들이 최초로 장악을 시도하려는 지역이었소. 이유인즉, 사천은 천혜의 요새이기 때문에 타 지역에서 쉽사리 쳐들어올 수도 없고 지력이 풍부해 생산성이 좋은 땅이기 때문이오. 땅따먹기를 시작하기에 사천만 한 곳이 없소.”
“……!”
“물론 확신은 없소. 놈들이 워낙 미쳤으니까. 하지만 미쳤대도 원체 똑똑하게 미친놈들이니 이 기회를 놓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오. 게다가…….”
“…….”
“놈들은 이미 낙원소를 지어 사천을 내부부터 곪게 만들려 시도했소. 그리고 그 계획은 실패했지.”
“그렇습니다.”
“자존심 이전에, 낙원소를 만들고 직접 싸우기까지 한 광혈교 입장에서는 사천이 가장 만만한 곳이오. 워낙 난장을 친 만큼, 사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테니까.”
“……!!”
“심지어 아미파가 멸문하고 청성파도 큰 타격을 입었으며 가주까지 외부에 나가 있는 지금, 놈들에게 사천은 먹음직스러운…….”
그때였다.
“가주님! 큰일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북부 홍검삼가(紅劍三家)가 정체 모를 괴인들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합니다!”
패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늦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