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63)
흑백무제 1363화(1362/1368)
1363화. 스러지는 세상 (4)
“사천입니다. 사천일 수밖에 없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산동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적들은 그대로 북부를 가로질러 밀어 버릴 겁니다. 이유인즉, 이미 몇 차례 전쟁으로 황폐화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만에 하나 정말 산동 전쟁에서 패배를 맞는다면 놈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무림 병력을 눌러 버렸다는 것 자체가 적의 힘이 엄청나다는 것, 쉴 새 없이 몰아치기 시작하겠지요.”
“그래요. 하지만 저희로선 그들의 진격을 막을 수가 없어요. 정말 패배했다면 말이지요.”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사천 무림은 강력하지만, 당가의 가주께서 전쟁터로 가신 이상 무극수가 부재합니다. 물론 음제께서 계시겠지만, 그분은 전략 전술에 능한 분이 아니에요.”
“역시나 한시라도 빨리 병력을 파견해야겠군요.”
“그러나 저는 떠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제가 가문의 병력을 이끌고 사천으로 가겠습니다. 아버님께 따로 연락을 드리겠어요.”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위험할 겁니다. 천하 곳곳에 마인들마저 출몰하고 있는 판국이에요.”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어요.”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확신할 수 없지만, 미리 움직여 적을 일차로 저지할 수만 있어도 성공입니다.”
“정히 그러시다면, 본성 병력 일부와 함께 장강까지 가시지요. 장강수로채에 따로 연락을 취해 놓을 테니 그때부터는 이동이 한결 쉬울 겁니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 * *
당가 병력이 움직이기도 전에 이미 하은교와 패율은 움직이고 있었다. 당가 측 고수들과 합을 맞추는 것보다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편이 두 사람에게도 더 나았다.
“가주 대리에게 따로 지원은 받았나?”
“정보 지원을 해 주기로 했습니다. 반 시진에 한 번씩 놈들의 이동 경로를 공유해 주기로 했으니, 반나절도 안 되어 접촉할 수 있을 겁니다.”
“좋군. 속도를 좀 올려도 되겠나?”
“좋습니다.”
파아아아앙!
두 사람이 질풍 같은 속도로 나아갔다.
하은교는 내심 놀랐다.
‘강해진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신법만 봐도 패율의 경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무극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신법의 속도는 오히려 무극 이상이었다.
‘새로운 무공을 배운 것도 아니다. 한데도 이리 빨라. 도대체 어떤 수련을 했기에.’
하은교는 모를 것이다. 패율이 마인들을 척살하기 위해 홀로 얼마나 많은 거리를 뛰어다녔는지.
무고한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무림맹 일대를 벼락처럼 오간 그의 신법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져 갔다. 궁구하여 얻은 깨달음이 아닌, 오직 사람을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치열하게 구현한 신법은 지금에 이르러선 중원 정점이라 할 만했다.
“속도를 더 올려도 되겠습니까.”
“좋네.”
파파파팡!
땅이 아니라 허공을 밟아 가며 나아간다.
이 정도면 허공답보를 넘어 거의 육지비행(陸地飛行)이라 할 만하다. 과거 연호정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비왕 공손백룡 정도를 제외하면, 이만큼 대단한 신법을 펼칠 수 있는 자는 온 천하에 셋을 넘지 않을 것이다.
‘뜨겁다.’
하은교는 패율의 영력이 붉게 달아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선명한 붉은빛. 잡티 하나 없는 선홍의 영력이었다. 패율의 분노가 그만큼 순수하다는 뜻이었다.
‘무고한 이들을 걱정하는 마음…… 그로 인해 타오르는 분노가 저리도 순수하다. 이토록 순수한 분노는 지금껏 본 적이 없어.’
순수함에 있어서는 연호정도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연호정의 분노는 검붉다. 그의 분노에는 언제나 살기가 집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연호정이 화가 나면 반드시 피를 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의 손속이 지나치게 패도적인 것도 분노와 살기가 한 몸처럼 움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패율은 달랐다.
오랜 시간 연호정과 함께하며 투박한 살기와 광기를 모두 해소하기라도 한 듯, 그의 분노는 보석처럼 투명해 보이기까지 했다.
‘순수하지만 그 근본에는 민초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 패율의 분노는 협의 분노야.’
하은교는 씁쓸함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강해진 이유가 있었구나.’
품은 분노가 강렬하지만, 그 근간에는 세상을 향한 마음이 있다.
정파의 정종신공은 대개 도가나 불가의 무공에 근원을 둔다. 두 가지 무공은 세대를 거쳐 가며 심공(心功)으로서 완성되었으니, 패율의 성장은 심공으로 인한 폭발적인 발전이라고 볼 수 있었다.
‘부끄럽구나. 어미로서, 무림인으로서 세상을 위해 싸운다고 했으면서도 나의 분노는 순수하지 못했다. 무공은 강하지만 마음은 패율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약하다.’
중년의 나이지만 자신에겐 명백한 후배인 패율에게서 열정 넘치던 젊었을 때의 환상을 보는 하은교.
‘나도 분발해야지.’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한 시진 전, 북부 삼음검문(三陰劍門)이 멸문을 당했습니다!”
“현재 북도방(北刀房)이 적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방 내 중진들이 막고 있지만, 멸문을 피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적들이 호철문으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진격 속도가 엄청나게 빠릅니다! 숫자는 일백 내외지만, 하나하나가 절정고수를 상회하는 무력을 지녔다고 추정됩니다!”
“철강보가 무너졌습니다!”
수많은 비보가 두 사람의 마음을 다급하게 만들었다.
“이해할 수가 없네.”
하은교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광혈교 본단에 많은 병력이 상주하진 않았을 거야. 한데 사천 북부 문파들이 각개 격파를 당하고 있어. 멸문한 문파와 문파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면 소수 정예가 아닌 다수가 몰아치고 있는 듯한데, 이 정도면 거의 대문파급 병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네.”
전력이 아니라 머릿수를 말함이었다. 들어온 정보만 봐도 적의 숫자가 적게는 오백, 많으면 거의 일천에 달하는 듯했다.
하은교는 광혈의 소교주 천화룡을 패퇴시킨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혈존대사를 구하기 위해 남하하던 광혈교 병력은 소교주를 제외하고 모조리 증발했다.
혈존대사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광혈교 측에서도 고수란 고수는 다 끌고 왔을 거라고 판단해도 무리가 없을 텐데, 어디서 또 이만한 고수들을 양성했단 말인가?
“일단은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지요.”
그 와중에도 패율은 냉정을 잃지 않았다.
“선배님과 제가 찢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찢어지다니?”
“문파들이 각개 격파를 당하고 있지만, 남하하는 속도가 서쪽이 더 빠릅니다. 적의 전력이 서쪽으로 집중되어 있다는 뜻이니, 선배님께서 서쪽을 맡아 주시면 제가 동쪽 전선을 뚫어 보겠습니다.”
“괜찮겠는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해 보고 안 되면 후퇴할 테니까요. 선배님도 그러셔야 합니다.”
“그래, 알겠네.”
파아아아앙!
하은교가 곧장 서쪽으로 향했다.
‘안 좋아.’
패율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천에서 당가의 정보력은 최고다. 한데도 적에 대한 상세 정보를 받아 내지 못하고 있어.’
적의 숫자와 전력도 추정치에 가깝다. 어떤 병기를 사용하고 어떤 전술을 쓰는지까지 보고받긴 힘들겠지만, 최소한 놈들의 특징 정도는 알아낼 수 있어야 했다.
‘당가가 우리에게 일부 내용을 누락해서 알려 줬을 리는 없다. 결국 놈들의 남하 속도가 정보원들이 알아채기도 힘들 만큼 빠르다는 뜻이겠지.’
아니면 특별한 수법을 쓰지 않고도 밀고 내려올 수 있을 만큼 강하다는 뜻이거나.
어떤 경우라도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역시나 부딪쳐서 알아내는 수밖에 없어.’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패율의 기감에 적들의 존재가 포착되었다.
‘많다. 최소 삼백 이상이야.’
등 뒤에 메고 있던 단창을 꺼내 드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기(魔氣).’
역시나 저놈들은 마인이다. 광혈교 측에서 보낸 마인들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패율의 섬세한 기감은 마기 너머의 기묘한 기운까지 읽어 낼 수 있었다.
‘생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사기(死氣)를 근간으로 움직이고 있어.’
번쩍!
패율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이놈들이 설마?!’
잠시 후.
파라라라락!
장포 같기도 하고 포대 자루 같기도 한, 실로 기묘한 옷을 입고 남하하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대형이 엉망진창이었다. 진을 짜서 오는 게 아니라 저마다 멋대로 달리고 있다. 그나마 목적지는 분명한 것인지, 모두가 한 지점을 향해 우악스럽게 신법을 펼쳤다.
‘이…….’
시커먼 장포에 시커먼 죽립을 눌러쓴 마인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놈들의 몸에서 풍기는 사기가 더 선명해졌다.
‘사람이 아니야.’
정확히는, 사람이었던 놈들이다.
‘광혈…… 초혼술…….’
패율의 눈이 흔들렸다.
‘전설상의 강시라도 되는 건가.’
파아아악!
일직선으로 치고 나간 패율이 그대로 단창을 휘둘렀다.
카아앙!
패율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단창에 맞은 마인이 훨훨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그게 전부였다. 마인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한 차례 머리를 흔들고는 다시 달렸다. 움직임으로 볼 때 다소 충격은 받았어도 치명상을 입진 않은 것 같았다.
‘이놈들 봐라.’
응수타진의 일격이라도 내공을 제대로 담아 내친 공격이었는데 죽지 않았다.
설령 죽지는 않더라도 근육이 찢기고 뼈가 부러졌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패율은 마인의 몸을 후려친 단창에서 강한 충격을 느꼈다.
사람 몸뚱이가 아니라 쇳덩이를 후려친 것 같은 감각.
‘진짜 강시인가.’
그때, 마인 중 몇몇이 고개를 쳐들었다.
순간 패율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인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저 곤륜노(崑崙奴)와도 다른, 푸르딩딩한 색으로 물든 마인들의 얼굴은 매끈함에도 썩어 문드러진 시체의 그것을 보는 듯했다.
‘정말로 강시를 만들었단 말이지.’
우우우우웅!
오른손에 들린 단창과 어느새 뽑아 든 좌수의 기형검이 강력한 진동을 발했다.
패율이 힘차게 대지를 밟았다.
쿵!
평야 전체를 뒤흔드는 막강한 진각.
순수한 분노를 기반으로 한 호쾌한 전의가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죽어라!”
패율의 좌검이 빛살처럼 움직였다.
쩌어어어엉!
작정하고 휘두른 점창회풍검(點蒼廻風劍)이 마인 하나의 목을 날려 버렸다.
회전력을 살린 참격이었다. 다소 짧지만 검날이 두툼해서 회풍검의 참격을 극대화했다.
떨어져 나간 마인의 목에서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목이 날아간 몸뚱이는 잠시 움직이는 듯하다가 이내 쓰러졌다.
강시라도 목을 날리면 파괴가 가능하다. 쇳덩이를 잘라 낸 것 같지만, 어쨌거나 무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정도 힘은 줘야 목을 날릴 수 있다…… 북부 문파들이 무너진 것도 당연하구나.’
초절정고수가 작심하고 공격해야 파괴되는 육신이라면, 그 강도가 정말 쇳덩이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절정고수 수준으로는 흠집 하나 내기가 힘들 것이다.
게다가 이지를 상실한 강시답지 않게 이놈들은 신법까지 펼치고 있었다. 신법을 펼친다는 건 다른 무공도 구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정말이지…….”
패율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지긋지긋한 놈들이야, 정말.”
번쩍!
단창이 섬광처럼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