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67)
흑백무제 1367화(1367/1368)
1367화. 스러지는 세상 (8)
천화룡은 기가 막혔다.
‘고작 저년 하나 때문에 나와 흑시(黑屍)들이 전진을 못 하고 있다니.’
팔백 구뿐이지만 사천을 공략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성마에 이른 놈들은 자신이 없애면 되고, 문파나 떨거지들은 흑시들을 감당해 낼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음제 하나에 막혀 자신과 오백의 흑시가 남하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역시.’
천화룡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년 말이 맞았나.’
같은 천씨 성을 쓰는 그 재수 없는 년이 말했다. 그 정도로는 사천을 무너트릴 수 없을 거라고.
신경을 거스르는 그 나른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사천이 만만해 보이지? 하지만 생각하곤 다를걸. 너는 이미 사천의 전력이 절반 이상 무너졌기 때문에 흑시들만 동원해도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땅은 절대로 허물어지지 않아.’
‘비단 그곳에 사는 무림인들이 강해서만은 아니야. 그 땅에는 아주 강력한 의지가 맥동하고 있어. 너는 모르겠지만, 지금 중원 전체엔 거대한 황금빛 의지가 가득하다. 하지만 사천은 달라. 그 땅엔 그곳에서 나고 자란 고집스러운 사람들의 영령들이 꽉 차 있어. 제아무리 너나 흑시라도 사천을 집어삼키진 못할 거야.’
‘정 의심스러우면 어디 한번 가 보든가. 대신, 잊지 마라. 내 오라비를 만나면 절대 죽이지 않겠다고 했어. 설령 네 손이 아니라 다른 사람 손에 죽는대도 넌 약속을 어기는 거야. 그럼 내가 어떻게 될지는 너 역시 잘 알 거다.’
신마림에서 납치해 온 그 망할 년은 믿을 수 없게도 마학(魔學)의 천재였다.
어느 정도냐면, 마학을 연구하다가 그 영혼이 하늘에 닿은 이였다. 고작 스물이 조금 넘은 나이로 천기(天機)를 읽을 정도이니 그 얼마나 대단한 재능인가.
하지만 그는 그 어린 년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걸 믿기엔 너무 많은 희생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자신이 있었다.
아버지에 비해 모자람이 있다지만, 그의 재능만큼은 아버지 이상이었다. 십 년만 버티면 아버지의 경지를 넘어 능히 혈신에 이를 수 있다고 자부했다.
그런 자신이 사천 하나 손에 넣을 수 없다고? 심지어 사천 무림의 병력은 반 토막 난 지가 오래였다.
‘하지만…….’
천화룡은 언제나 자부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부심이 과해 실수를, 실패를 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자만심은 지양한다는 말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그년이 말한 영령이니 뭐니 하는 것 따위는 아직도 믿지 않는다.
다만, 이들만으로는 사천을 정복할 수 없을 거라던 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저 음제 하은교 하나만으로도 진격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내 모든 것을 불태운다면 어떻게든 가능하겠지만…….’
그리되면 결국 역천의 힘을 손에 넣은 사문향이 광혈까지 흡수하려 들 것이다. 잠시나마 대항할 힘을 잃은 광혈교는 그대로 사음에 먹혀 버릴 것이다.
차라리 죽고 말지, 그런 광경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 인정한다.’
화르르르륵!
시커먼 화염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소용돌이치며 하늘로 솟구치는 검은 화염이 마치 시커먼 용을 보는 듯했다. 묵룡염원, 그 이름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힘이었다.
‘인정한다고. 내가 틀렸다는 걸.’
엄청난 화염에 다가오던 강시들도 주춤했다.
천화룡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고집은 부리지 않겠어.’
어차피 사천을 못 먹으면 구석으로 몰리는 것은 똑같다.
천화룡이 품에서 작은 피리를 꺼내 들었다.
멀리서 그를 보던 하은교는 순간 강렬한 위기감을 느꼈다.
파아아앙!
탄현만근공의 힘을 해제하고 곧장 암공파를 쏘아 냈다.
허공을 격하고 쏘아진 암공파가 천화룡의 가슴에서 터졌다.
삐이이익! 콰앙!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발산한 충격파.
천화룡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어느새 그의 손에 들린 피리가 반 토막이 났다.
하은교의 얼굴이 굳어졌다.
암공파가 놈을 강타하기 전, 피리 소리가 사방으로 몰아쳤다.
‘무슨 짓이지?’
위협이 될 만한 무언가를 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천화룡이 쌍수를 휘둘렀다.
묵룡과 뇌룡의 기공술이 흑시들을 휩쓸었다.
콰쾅! 화르르르륵!
폭음과 함께 흑시 오십여 구가 박살 나며 타 버렸다.
“주인도 못 알아보는 머저리들, 너희가 감히 내 얼굴에 먹칠을 하는구나.”
천화룡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마룡후를 터트렸다.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라! 네놈들의 주인이 누구인지 생각해 내! 그럼 죽이지 않겠다!”
그때였다.
“이미 죽은 자들에게 그 무슨 헛소리냐.”
훅!
공간을 압축하며 날아온 하은교가 천화룡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신법보다 훨씬 더 빠른 지풍이 쏘아졌다. 탄금지(彈琴指)였다.
퍼퍼퍼펑!
뇌룡강재의 기공술로 탄금지를 막은 천화룡이 하은교에게로 돌진했다.
안 그래도 가깝던 거리가 확 좁혀진다. 게다가 그의 몸에는 뇌룡강재의 기운이 가득했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뇌기에 침습당할 것이다.
하지만 하은교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지이이이이이잉!!
손바닥에서 퍼져 나온 음화제무신공의 기운이 그녀의 몸 전체에 강력한 호신강기를 둘러씌웠다.
평범한 호신강기가 아니었다. 일수유에 수천 번 진동하는 극상의 호신강기였다.
퍼퍼퍼펑! 파직! 파지지직!
뇌룡강재의 기운이 그녀의 호신강기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정말 대단해.”
천화룡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완성하지 못했다지만, 광세마공을 기공 능력만으로 막아 내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음제 하은교가 이렇게 강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어.”
“시끄럽다.”
하은교가 재차 탄금천녀수를 펼쳤다.
삼대금곡이 아닌 진동 장력이었다. 일음파암(一音破巖), 옥수단맥(玉手斷脈), 옥색별리(玉色別離)의 초식이 마구 쏟아졌다.
쾅! 콰쾅!
진동을 조절하여 파괴력을 극대화하는 수공이었다. 극도의 집중력으로 공격의 강약을 조절하는 그녀의 깨달음은 실로 섬세함의 극치라 할 만했다.
천화룡은 그녀의 무공을 받아 내면서도 연신 물러났다.
광세마공의 파괴력은 분명 음화제무신공보다 앞선다. 그러나 하은교의 깨달음은 음화제무신공 본연의 힘을 두 배 이상으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막강하다는 광세마공으로도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경지가 두 단계, 아니 한 단계만 더 높았대도 밀리는 사람은 하은교였을 것이다.
‘아버지.’
천화룡의 눈에 붉은 마기가 솟구쳤다.
‘아버지가 다다르지 못했던 그곳, 고금제일마(古今第一魔)의 길로 나아가려 합니다. 하지만 쉽지 않군요.’
퍼퍼퍼펑!
폭음, 그리고 폭음.
어느덧 충격파가 묵룡염원과 뇌룡강재의 힘을 뚫고 그의 내부를 두들겼다.
치이이이익!
내상이 순간적으로 치료되었다. 엄청난 공력과 역천의 마기가 그것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어렵기에 더 의미가 있는 법. 저는 오늘 이곳에서 그 가능성을 만천하에 보여 줄 겁니다.’
마인으로서, 무인으로서.
그리고 광혈교주로서.
화아아악!
탄금천녀수의 경력이 곡선을 그리며 천화룡의 후방을 노렸다.
그때, 천화룡의 좌수가 까딱였다.
그 움직임이 너무나도 작아서 하은교조차 그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콰앙!
폭음과 함께 천화룡의 후방을 노렸던 경력이 부서졌다.
하은교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건?!”
“나쁘지 않군.”
파아아앙!
뇌기를 이용해 번개처럼 후방으로 물러난 천화룡이 일순 자세를 낮추었다.
그가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하은교는 순간적으로 죽음을 느꼈다.
콰앙!
본능적으로 그 자리에서 벗어나니, 무형의 경력에 휩쓸린 흑시 열 구가 산산조각이 났다.
놀랍게도 조각난 흑시들의 몸은 새빨갛게 익더니 이내 시커먼 재가 되었다. 그들을 덮친 경력에 묵룡염원의 힘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하은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네놈이 어떻게?!”
“아직 완전하지 않군.”
훅!
천화룡의 좌수에 가득했던 뇌기가 일순간 사라졌다.
이번만큼은 하은교도 피할 수가 없었다. 뇌기의 이동 속도가 너무 빨랐다.
재빨리 양손을 휘둘러 탄금천녀수, 만현장막(萬絃帳幕)을 펼쳤다.
콰쾅!
하은교의 몸이 미친 듯이 뒤로 밀려 나갔다.
이를 악문 그녀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침투한 뇌기가 순식간에 온몸의 경혈을 휘저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 양이 적어 제무신공의 힘으로 뽑아낼 수 있었지만, 정신적 충격이 상당했다.
‘암공파(暗空破)!!’
그렇다.
놀랍게도 천화룡은 하은교의 절기 암공파를 자신의 것으로 빼앗은 것이다.
아니, 단순히 빼앗은 정도가 아니었다. 암공파의 힘에 묵룡과 뇌룡을 담아 내치니 살상력은 한 수 위였다. 그나마 화기와 뇌기가 사라지는 순간을 포착하면 피할 수 있지만, 그게 천화룡의 대단함이 저평가받을 만한 이유는 되지 않는다.
“대단해. 정말 수준 높은 기공술이야. 본교에도 이 정도 기공술은 손에 꼽지.”
천화룡이 미소를 지었다.
하은교는 그 얼굴에서 악마를 보았다.
“내가 부족하니 어쩔 수 없다. 자존심을 세우다 실패하는 것보다는 이게 더 나아.”
무서운 자다.
하은교는 순간 천화룡에게서 연호정의 모습을 보았다.
연호정 역시 암공파의 깨달음을 가져갔다. 그것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체화시키기까지 했다. 천화룡 또한 그걸 해낸 것이다.
심지어 천화룡은 저 연호정처럼 자존심 때문에 본인이 해야 할 일을 망치지도 않았다.
‘반드시 없애야 한다.’
물론 그녀는 연호정과 천화룡을 동급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 봐도 연호정이 천화룡을 압도한다. 죽어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연호정을 떠올리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천화룡은 위험한 자다.
‘이곳에서 잡지 못하면 얼마나 더 성장해서 돌아올지 몰라. 놈의 재능은 성천 모두를 압도한다.’
하은교가 양손을 쫙 펼쳤다.
쿠구구구궁!!
해제했던 탄현만근공의 힘이 무섭게 부활했다.
천화룡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건 정말 엄청나군.’
예전에도 저 힘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땐 난전 중이었고, 저 무거운 압력도 순간적으로 펼쳐졌기에 큰 감흥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약식이 아닌 정식이다. 벌써부터 하은교를 중심으로 반경 수십 장 안쪽 공기가 무거워지고 있었다.
‘이건 베낄 수도 없겠어. 기가 어떻게 움직여 힘을 증폭하는지 잘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천화룡은 위험을 느끼지 않았다.
파아아아앙!
번개처럼 하은교 앞에 나타난 그가 마룡신장(魔龍神掌)을 펼쳤다.
콰앙!
하은교의 입에서 피가 울컥 쏟아졌다.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던 천화룡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뭐지, 이 반탄력은?!’
호신강기를 두르고 있음은 알았다. 하지만 작정하고 내친 마제신권, 마룡신장을 막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데도 막혔다. 내상을 조금 입힌 정도에 불과했다.
본래라면 하은교의 몸뚱이가 박살이 났어야 할 일격인데.
“……역시 왔구나.”
우둑!
천화룡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이 무시무시한 압력으로 인해 마룡신장의 경력이 제힘을 내지 못했음을.
‘거기까지 예상하고 날 유인한 것인가?!’
상대의 무공을 몇 번 본 것만으로도 훔쳐 내는 재능, 누구라도 대단하다며 찬사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천화룡에게는 무극수와의 전투 경험이 부족했다.
나아가, 같은 경지에 이르렀대도 여자라면 일단 무시하고 본다. 광혈교주를 자처하고 있으니 그 도도함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하은교는 바로 그 부분을 꿰뚫어 본 것이다.
“자만하지 말아라, 아가야.”
천화룡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리고.
쿠르르르릉!!
보이지 않는 압력이 수만 근의 힘으로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