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76)
흑백무제 1376화(1376/1424)
1376화. 부활의 신호탄 (1)
“후욱, 후욱.”
거친 숨을 몰아쉬는 패율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내가고수인 그가 호흡이 흐트러질 정도면 싸움의 끝을 봤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그 경지가 무극을 코앞에 두고 있는데도 그 정도다.
다행히도 모든 것을 불사른 보람은 있었다.
“지긋지긋하군.”
눈앞에 수백 구의 검은 시체들이 나뒹굴었다.
시체인데도 마치 인형 같다. 한 번 죽었던 놈들을 또 한 번 죽여서일까? 뭐가 됐든 사람을 죽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괜찮으신가요?”
패율이 고개를 돌렸다.
피폐해진 몰골의 제갈아연이 거기에 있었다. 아리따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두툼한 대검을 아직도 쥐고 있는데, 그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괜찮네.”
“내외상이 심하십니다. 지금 바로 운공에 들어가시지요.”
“괜찮아. 아직 적이 남아 있어.”
“그렇다면 더더욱 힘을 비축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우우우웅!
패율의 몸에서 강렬한 진동이 일었다.
북명신공이 활성화되며 대자연의 기를 무섭게 끌어왔다. 무극에 오른 고수가 아닌데도 순간적으로 끌어당기는 기운의 양이 대단했다.
제갈아연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엄청난 인력이다.’
순간적으로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대자연의 기와 함께 공기가 확 빨려 들어가며 패율의 몸을 활성화시켰기 때문이었다.
패율이 옷을 툭툭 털어 내며 말했다.
“세상에 악인은 많아. 그놈들을 일일이 때려잡기 위해선 한시라도 빠른 체력 회복이 필수였지.”
“…….”
“그래서 나만의 방식으로 회복 속도를 극대화한 거다.”
정확히는 점창파의 신공이라서 그렇다.
점창은 구파 무공 중 실전성이 높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만큼 무공이 폭발적이고 내공 소모가 심하다. 모든 무공이 그런 건 아니지만, 주류가 그러하다는 말이다.
당연히 그러한 무공을 보조하기 위해 내공심법 하나하나가 배출과 축적을 중요시하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기운을 활용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결과적으로 도가적인 색채가 끊임없이 옅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반대로 힘의 발산과 회복 능력에 있어서만큼은 구파 중 수위를 다투게 되었다.
패율은 그 와중에 점창 역사상 가장 파괴력 넘치는 무공을 만들며 더 빠르고 안정적인 회복이 가능한 심법 제조에도 착수했다.
아쉽게도 새 무공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북명신공을 기반으로 외기(外氣)를 빠르게 받아들여 회복하는 구결을 만들 수 있었다.
치이이이익!
패율의 몸 곳곳에서 갈수록 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자연기에 섞인 탁기를 불사르며 상처에 남은 독기까지 몽땅 배출해 내고 있는 것이다.
‘대단하다.’
실력은 그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안목만큼은 어떤 고수 못지않은 제갈아연은 패율의 상태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다니.’
제갈아연은 과거 연호정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쉽게 만나지도 못하는 사이가 되었기에 그와의 대화는 유독 기억에 남았다. 특히 그가 무극에 오르고 난 이후의 대화는 토씨 하나까지도 기억했다.
‘결국은 기(氣)다.’
‘기라니?’
‘무공이 상승한다는 것은 더 맑고 순도 높은 기운을 몸에 축적할 수 있다는 뜻이야. 물론 순도 높은 기운을 축적했다고 다 경지가 상승하는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다는 얘기지.’
‘그건 이해해.’
‘결국 깨달음도 중요하고 진기를 가다듬는 것도 중요하다는 뜻이야. 하지만 두 가지 요소를 다 충족시킬 수는 없어.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 넌 어떤 방법으로 그 경지에 이르렀어?’
‘내 경우에는 깨달음이지. 신공의 깨달음.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어.’
‘아버님은 어떻게?’
‘굳이 표현하자면 기공 능력을 활성화하는 데에 가까웠지. 물론 그분의 깨달음은 이미 무극에 이르렀지만, 애초에 심검을 깨닫는 바탕에 막강한 기공 능력이 있었던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아버지는 연가의 정통 검술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분이야. 하지만 후대를 위해 더 발전된 무공을 궁구하고 계셨어. 자신에게 맞는, 그리고 연가 사람들에게 맞는 검법을. 그 과정에서 절대삼검이라는 무지막지한 무공이 탄생한 건데, 결국 그 검법 역시 심검을 깨닫는 과정이었지. 깨달음과 진기를 다루는 능력이 서로에게 영향을 준 셈이야.’
‘흐음.’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은 강해질 수 있어. 기는 깨달음을 유도하고, 깨달음은 기의 밀도 상승을 유발하지. 혹 끊임없는 노력으로 무극에 이른다면, 언제 올지 모르는 깨달음에 답답해하는 것보다 내 무공을 하나하나 점검하며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나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연호정은 본디 배배 꼬아서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말이 많을 때는 있지만, 언제나 결론은 확실하게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그때의 대화는 알쏭달쏭했다. 그 연호정조차도 무극의 경지를 설명하는 것에 큰 어려움을 느낀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지금, 제갈아연은 그의 말 중 일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패율 장로님이다.’
저 압도적인 내공 회복 능력은 초절정고수도 보여 줄 수 없는 것이다.
필시 본인의 부단한 노력과 깨달음으로 쌓은 결과일 터. 하물며 내공 회복의 속도가 무극수에 비견될 정도라면, 이미 기에 대한 깨달음만큼은 무극수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즉, 어느 한 분야에서 달인이 된다면 누구라도 무극으로의 길이 열려 있다는 뜻이다. 그 과정이 지난할지언정 묵묵히 내 길을 걷다 보면 하늘은 천운을 선사한다.
‘어쩌면 패율 장로님 역시 조만간 무극에 오르실지도 모르겠어.’
제갈아연이 품에서 단약 하나를 꺼냈다.
“그럼 이거라도 받아 주세요.”
“괜찮다니까.”
“내상약입니다. 내공이 회복되었다 한들 내상이 남아 있다면 다시 탁기가 몸에 쌓일 겁니다. 조금이라도 탁기를 줄여야지요.”
“정말 괜찮아. 너희 부대나 먹여.”
“부대원들 모두가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패율 장로님은 현재 우리 중 가장 강력한 전력입니다. 장로님이 조금이라도 더 힘을 내셔야 합니다.”
패율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거부할 명분이 없군.”
그는 냅다 단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굳이 따로 운공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쌓인 진기가 북명신공의 구결대로 몸 곳곳에 흐르고 있었다. 신공이 극에 이르러 움직이면서도 운공이 가능한 것, 점창 특유의 동공(動功) 능력이 빛을 발했다.
“다음은 서쪽이다. 음제 선배가 저곳에 있어.”
“알고 있습니다.”
“부대원들은?”
제갈아연이 지현죽단을 바라보았다.
정예 부대였지만, 사상자가 벌써 오십 명이나 났다. 그만큼 흑시들의 공격은 매서웠다.
그나마 제갈아연이 진형을 갖춰 대응하지 않았다면 두 배 이상의 사상자가 났을 것이다.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습니다.”
“좋아, 가자.”
파아악!
패율과 제갈세가의 병력이 빠르게 서쪽으로 향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남쪽이다.”
곧장 방향을 트는 패율의 얼굴이 굳어졌다.
“엄청난 숫자가 남하 중이야. 족히 오백은 되겠어.”
“그것도 그런데…….”
제갈아연이 품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신비로운 구슬이었다. 검은색 바탕에 불그스름한 색채가 일렁였는데, 마치 액체라도 되는 양 붉은색이 북쪽을 향해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엄청난 마기(魔氣)군요.”
“그건 뭐지?”
“흑제성의 소정광 신장이 피독주와 피화주를 연구하면서 만든 탐마주(探魔珠)입니다. 일정 이상의 농도를 지닌 마기에 반응하는 물체죠.”
패율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그런 기물도 있나?”
“따지고 보면 화기의 침습을 억제하는 피화주나 어지간한 독기를 모조리 막아 내는 피독주도 있는데, 마기를 막아 주진 못해도 탐지할 수 있는 기물 정도는 있을 법하지요. 하지만 지금껏 제작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직접 만들어 봤다고 합니다.”
“대단하군.”
“군략도 군략이지만 다방면으로 아는 게 많은 천잽니다. 본가로 데려가고 싶을 정도예요.”
“그래서? 그 탐마주가 어딜 가리키고 있는데?”
“북쪽입니다.”
제갈아연의 눈이 흔들렸다.
“탐마주가 이 정도로 격하게 반응하는 건 처음 봅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깨질지도 모르겠군요.”
“어느 정도이기에?”
“정확하진 않아도, 이 정도면 무극수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패율의 눈이 깊어졌다.
‘광혈교의 수장.’
천화룡인가 뭔가 하는 놈이 직접 온 것이 분명했다.
‘선배님은 무사하신가.’
그때였다.
콰앙!
저 멀리서 들려오는 폭음이 실로 엄청났다.
폭음과 함께 심상치 않은 진기의 파장이 밀려들었다. 기의 파편만 느꼈는데도 피부가 저릿저릿할 지경이었다.
“선배?!”
파아아아앙!
패율은 밑도 끝도 없이 속도를 높였다. 지나치게 폭발적인 움직임이라 나아 가던 내상이 다시 도졌지만, 그는 그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렇게 제갈아연과 지현죽단을 뒤로하고 한참을 달린 그의 눈에 마침내 한 명의 여인이 보였다.
‘……!!’
패율의 눈에 경이로움이 어렸다.
마치 선녀처럼 허공을 밟아 가며 양손을 휘두르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한 번 질러질 때마다 도리를 벗어난 괴물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도대체 어떤 기운을 어떻게 발하는 건지, 무형의 경력에 닿은 괴물들의 몸통이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내치고 휩쓸고 밀어 낸다. 마치 춤사위와 같은 동작이었다.
죽음의 춤.
그녀의 몸 주위로 엄청난 역장이 일었다.
‘무시무시하다!’
돌진하던 패율은 서둘러 신법을 멈추었다.
콰콰쾅!!
멈춰 선 자리 삼 장 앞 땅이 미친 듯이 터져 나갔다.
상상을 초월하는 진동의 힘. 파랑을 일으키는 기운이 모든 것을 부수고 깨트린다.
음공(音功)의 영역을 넘어선 무공이었다. 파괴력으로는 가히 중원 정점에 이르렀다 해도 과언이 아닌 신선의 무공이 거기에 있었다.
“선배님.”
패율의 눈이 흔들렸다.
하늘하늘 옷자락을 휘날리며 춤을 추는 하은교.
그런 하은교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극심한 내공을 소모하면서도 끊임없이 축기하며 매서운 발경을 쏟아 낸다.
그 과정에서 육신이 피폐해지고 있었다. 지고의 깨달음을 몸이 버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선배님!!”
패율의 강렬한 외침에 하은교가 흠칫 놀랐다.
후우우우웅!
사방을 지배했던 그녀의 기운이 봄바람처럼 흩어졌다.
스르륵.
땅에 내려선 하은교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선배님! 괜찮으십니까!”
서둘러 달려온 패율은 순간 이를 악물었다.
하은교의 눈과 코, 입과 귀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극의 몸이 한계에 이르도록 부하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의 의지는 명백했다.
“아직 많이 남았네.”
“……!”
“저들을 보내선 안 돼. 힘들겠지만 어서…….”
“쉬십시오.”
치리링!
재빨리 단창과 기검을 꺼내 든 패율이 흑시들을 향해 질주했다.
하은교의 몸 상태부터 점검했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녀 말마따나 흑시의 존재 자체가 문제다. 하은교의 놀라운 무공으로 절반 이상을 없앴지만, 아직 이백에 가까운 흑시들이 남하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지긋지긋하구나!’
패율의 두 눈에 광기가 어렸다.
‘우르르 튀어나오는 너희 악마 놈들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의 얼굴, 대체 언제까지 봐야 하는 거냐!’
그가 기합성을 터트리며 창을 휘둘렀다.
분노 가득한 달인의 무공 앞에 흑시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