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83)
흑백무제 1383화(1383/1424)
1383화. 부활의 신호탄 (8)
“……?!”
한창 달리던 하은교는 재빨리 신법을 멈췄다.
파바박!
발치에 돌이 튀고 바람이 훅 밀려왔다.
‘뭐지?’
북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묘한 빛을 발했다.
‘멈췄어?’
희미한 마기가 명멸을 반복하는 듯했다.
하은교는 힐끔 동쪽을 바라보았다. 당가 정예들이 쫓아오고 있었지만 거리가 너무 벌어져 버렸다.
‘다른 걸 노리고 있나?’
어쨌거나 지금 천화룡은 멈췄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무극수의 기를 읽고 어디에 존재하는지까지 알 수 있지만 대상의 감정을 읽을 수는 없다.
하지만 하은교는 왠지 천화룡이 당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알려고 해서 아는 게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 마기의 파동이 들쭉날쭉했고 멈칫하는 기색도 있었다.
‘뭘 꾸미고 있는 거지?’
여기서 더 서쪽으로 가 봤자 나오는 문파도 없다. 거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간간이 있지만, 그런 사람들까지 노릴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 내려오려는 건가.’
그럴 가능성도 있다. 어쩌면 여기서 건곤일척의 혈투를 벌일 생각일지도 모른다.
‘머리가 아프구나.’
가능한 경우의 수가 너무 많다. 보이지 않는 적과 머리싸움을 벌이는 것은 하은교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만약…… 놈이 나를 유인하기 위해 이러는 거라면?’
하은교의 얼굴에 불안함이 어렸다.
막상 여기까지 오니 뭔가 당했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천화룡을 놓고 돌아갈 수도 없다. 그만큼 부담스러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혼란스럽다. 기감이 점점 엉망진창으로 변해 가고 있어.’
제갈아연과 패율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녀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행 중 유일한 무극수이자 삼제 중 일인이니만큼 약한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그 자리에 당관이 있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은 자신이 일행의 정신적 지주였다.
‘집중하자.’
음화제무신공을 다시 한번 확장시켜 기감을 넓히고 몸을 재정비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훅!
천화룡이 동쪽으로 움직였다.
아니, 그보다 조금 더 북쪽으로 향하는 듯했다.
‘퇴각?!’
그때, 저 멀리서 당가의 정예들이 다가왔다.
“어르신!”
“놈이 동북부로 이동하고 있네.”
하은교가 이를 악물었다.
“내가 쫓겠네.”
“잠시만요!”
“지금 실랑이를 벌일 때가 아닐세. 놈과 최소한의 거리를…….”
“그게 아닙니다! 조금 전 저희에게 지급으로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연락?”
“가주님께서 사천에 진입하셨다고 합니다!”
하은교의 얼굴이 밝아졌다.
“당가주가?”
“그렇습니다! 가주님의 무위를 생각할 때, 지금쯤 가문에 도착하셨을 것입니다!”
희소식도 이런 희소식이 없다.
하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그래도 놈이 어디로 움직이는지는 봐야만 하네. 내가 따라붙는 편이 나아.”
“가주님께서 본가에 들어오셨으니, 중심은 꽉 잡힌 셈입니다. 굳이 적을 쫓지 마시고 이전 주둔지에서 유연하게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제안드립니다.”
듣고 보니 이들의 말이 더 일리 있었다.
‘역시 나는 이런 데에 재주가 없구나.’
넓게는 봐도 세밀하게는 볼 수 없다.
그래도 그녀는 무력감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사람은 저마다 보고 배운 바가 다른 법이다. 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부러워하는 것보다 현재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중요했다.
“자네들의 말을 따르겠네.”
* * *
“아직 눈이 빨간데?”
“그만 놀려라.”
“눌러 봐도 돼?”
“어딜 눌러 봐?”
“눈.”
“실명시킬 일 있냐.”
제갈아연이 재미있다고 깔깔깔 웃어 댔다.
패율이 불퉁한 얼굴로 말했다.
“아주 좋아서 돌아가실 것 같구먼. 미간에 주름이 안 잡힌 순간이 없더니만.”
“이 친구가 왔잖아요.”
“이놈이 무슨 만능 해결사라도 돼?”
“이젠 그렇게 불러도 되겠던데요.”
“의지하는 건 좋지만 마음은 놓지 마라. 저 망할 놈들, 또 언제 어떻게 움직일지 모른다. 긴장을 놓을 수가 없어.”
“알고 있습니다.”
알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의지 되는 사람이 있어서 마음이 한결 편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아닌 말로 삼교와의 초창기 싸움에선 연호정 혼자 중원 전체를 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일단 두 분은 당가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제갈아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그래.”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음제 선배님께서 지금…….”
“서쪽으로 가셨지. 하지만 다시 돌아오실 거다. 당가 사람들이 생각이 있다면 어떻게든 이곳으로 모실 거야.”
“무슨 말이야, 그게?”
연호정이 저 서북쪽을 바라보았다.
“광세마공의 힘을 가진 놈이 움직였어. 필시 그 마물들을 없앤 걸 알아차린 것이겠지.”
“……!”
제갈아연의 눈이 흔들렸다.
생각해 보니 자신 역시 천화룡이 어떤 식으로든 강시들과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거라 판단했다. 당연히 강시들이 죽은 걸 알아차렸다고 봐야 했다.
“젠장, 그것도 놓쳤군.”
연호정의 등장으로 마음을 놓은 것도 있지만, 이건 철저히 부족한 현장 경험 문제였다. 아직 그런 세밀한 부분에서는 모자란 게 있었다.
“인간 같지 않은 놈들과 싸우는데 상식적인 전략이나 전술이 통하겠냐? 저런 놈들과 싸울 때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전술가는 거의 없어.”
패율의 위로 아닌 위로에도 제갈아연은 자책감을 내려놓지 못했다.
“호정은 하잖아요.”
“그건 이놈이니까 가능한 거고. 애초에 이런 능력이 없었다면 중원을 그렇게 뒤집어 놓을 수나 있었겠냐?”
“그건 그렇지만.”
“지금은 자책할 때가 아니라 네 능력을 조금이라도 더 잘 발휘할 때다. 잊지 마, 언제나 중요한 건 지금이라는 걸. 미래도 현실에 충실한 자만이 거머쥘 수 있는 거야.”
패율답지 않게 신중한 충고였지만, 또 패율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연호정이 말했다.
“당가주님이 오셨다면 이제 사천은 탄탄해졌어. 가문에 가주님이 버티고 계시고, 주둔지에 음제 선배가 자리를 잡고서 언제든 반응할 수 있도록 대처하면 누구라도 쉽게 덤빌 수 없을 거다.”
“그건 그래.”
“하지만 사천이 먹히지 않느냐, 위기감을 느끼느냐는 다른 문제지.”
“무슨 뜻이야?”
“적이 어디서 튀어나올지도 모르는데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된다는 거다. 당가주님과 음제 선배, 양 날개가 사천을 단단히 받쳐 주고 있다면 남은 병력을 이끌고 공세에 들어가 적의 진입을 원천 차단해 버리는 수도 생각을 해야 해.”
“……!”
“하루라도 빨리 사천을 안정화해야 다른 지역에도 눈을 돌릴 여력이 생겨. 이제부터는 속도전이다.”
제갈아연은 생각했다. 확실히 다르긴 다르다고.
연호정이 인간의 탈을 벗어 던질 정도로 높은 경지를 이루었다지만, 이건 경지와 상관없는 안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병력은 어떻게 꾸릴 거지?”
“일단 내가 간다.”
“혼자?!”
“아니.”
연호정이 패율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같이 나들이나 가시겠습니까?”
패율이 뚱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가 봤자 뭐 창질 한 번이나 제대로 하겠어? 괴물들 틈바구니에서 죽을까 봐 여기저기 뛰어다니기나 하겠지.”
“적어도 재미는 있을 겁니다.”
“아서라. 괜히 너한테 짐이 되면서까지 흥미진진해지고 싶은 생각 없다. 그리고 사천에도 정신머리 나간 놈들이 없다는 보장이 없어. 삼교의 마공을 주워 삼킨 놈들도 있을 거다. 그런 놈들이나 족치고 있지 뭐.”
패율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그는 더 이상 호승심에 휘둘리며 살지 않았다. 여전히 호승심은 강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정상은 아닙니다.”
“뭐?”
“그리고 그곳에서 선배가 담당할 싸움도 있을 겁니다.”
“…….”
“저라고 선배만 한 전력을 그저 심심하다고 데리고 가겠습니까?”
패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 황금빛 무공 뭐냐? 그 기운 빨아 마시니까 내상 치료되는 속도가 엄청나더만.”
“제 신공입니다만.”
“가면서 한 번씩 쐬어 줘. 쪽팔리게 후배 앞에서 뒈질 수는 없잖아.”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연호정이 제갈아연에게 말했다.
“곧 음제 선배가 오실 거다. 당가에서 기다렸다가 그분이 오시면 지금 상황 말씀드리고, 너는 곧장 지현죽단을 이끌고 이곳으로 돌아와.”
“거점을 새로 만든다?”
“당가가 이곳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 그나마 청성파라도 나서 줬으면 좋겠지만, 아직 두문불출하는 걸 보니 예전처럼 움직이진 못할 것 같군.”
제갈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렇게 할게.”
“다시 보자.”
“잠깐.”
제갈아연이 품에서 하나 남은 단약을 꺼내 들었다.
“이거 네가 가지고 있다가 선배님 다치면 드려.”
패율이 버럭 소리쳤다.
“내가 무슨 애냐!”
“자존심이 여간 강한 분이 아니더라고. 먹지도 않고 버티다가 쓰러지실 거야.”
연호정이 피식 웃으며 단약을 받았다.
“잘 봤군.”
“야, 인마!”
“가실까요?”
“이 새끼, 내가 무극에 오르기만 하면 넌 뒈졌어.”
“오르기나 하십시오.”
“못 본 새에 싸가지가 반의반 토막이 났네, 이 자식이.”
“갑시다.”
파아아앙!
두 사람이 북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제갈아연은 빠르게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다르구나.’
연호정의 능력이야 믿어 의심치 않지만, 능력 이전에 존재감 하나만으로도 무림에 없어선 안 될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빠르게 호전 중이라고는 해도 패율은 아직 정상이 아니다. 한데도 엄청난 속도로 연호정의 뒤를 따랐다. 다 나아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감정은 진기에도 영향을 줄 것이고, 활성화된 진기는 안 그래도 빠른 회복 속도를 더욱 끌어올릴 것이다. 연호정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상생의 효과가 난다는 것이다.
제갈아연은 그런 연호정이 좋았고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나도 내 일을 해야지.”
* * *
“죄송합니다.”
당윤의 말에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열심히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이들을 모욕하지 마라.”
“예?”
“네가 내게 죄송하다면, 그들의 죽음이 개죽음이 된다.”
“…….”
“너희 모두 누구보다 잘 싸웠을 거라 믿는다. 너흰 자랑스러운 당가의 가원들이야. 적어도 꼴사납게 싸우지도,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윤은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그래도 죄송합니다.”
당관이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죽은 무사들의 가족들을 먼저 찾아가라. 원칙적으론 내가 나서는 게 좋겠지만, 상황이 이러하니 네게 맡기겠다.”
“예.”
그렇게 당윤을 토닥여 보낸 당관은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아직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만류귀원신공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날뛰고 있지만, 마기가 어찌나 지독한지 지금도 신체 곳곳에서 탁기가 일었다.
당관은 고통을 삼켰다. 나아가 가원들을 잃은 슬픔과 증오도 삼켰다.
사천이 또 한 번 침략을 당한 지금, 가장 냉정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당관이 힐끔 창밖을 바라보았다.
집무실 밖에는 수많은 군마가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의정군의 군마들이었다.
“……싸가지, 용케 여기까지 와 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