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86)
흑백무제 1386화(1386/1424)
1386화. 부활의 신호탄 (11)
화아악!
천화룡이 지독한 살기를 뿜었다.
그는 연호정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애초에 누군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설령 상대가 나보다 강해도 무섭지는 않다.
그러나 상대의 말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었다.
‘소교주.’
여기서도 저기서도 소교주다.
기실, 혈음각주만이 아니라 교단 내에서도 자신에게 교주의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꽤 있음을 알고 있었다.
무공이나 재능으로는 능히 교주 자격이 있지만, 성품이 교주에 맞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야말로 어이가 없는 이유였다. 이미 아버지께서는 당신이 부재할 시 소교주가 교주를 대신한다고 말했고, 실제로 실력 면에 있어서는 교주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모두가 인정했다.
성품이 뭐고 자격이 뭔가? 결국 마도는 힘이다. 성품을 따지려거든 대륙의 정파 나부랭이가 되어야 한다.
성품이며 도리며 따질 거면 우리가 익힌 마공은, 사술은 다 버리라는 말인가? 천화룡은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저 호칭에 화가 났다.
“닥쳐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천화룡의 목소리에는 무시무시한 마기가 서려 있었다.
내공을 끌어올린 게 아니라 극도의 분노로 알아서 마성이 튀어나온다. 그의 두 동공이 검붉게 물들며 흰자위를 잠식했다.
“나는 광혈교주 천화룡이다! 누가 있어 감히 나의 자격을 논하는가! 나야말로 이 세상에 혈교를……!”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뭣이?!”
“아비의 복수를 하는 것보다 교주로 불리는 게 더 중요하더냐?”
“……!”
“네놈이 교주든 소교주든 내 알 바 아니다. 어차피 똑같은 쓰레기들, 치워 버리면 그만이야.”
연호정이 또 한 번 손을 까딱였다.
“내려와.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 아비의 복수도 못 하는 머저리 아들내미가 되려는 건 아니겠지?”
천화룡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혈음각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놈의 간계에…….”
“닥쳐라!!”
쩌어어어엉!
엄청난 내공력이 실린 외침에 혈음각주의 몸이 뒤로 튕겨 날아갔다.
혈음각주는 속으로 욕설도 뱉지 못했다.
화르르르륵!
천화룡의 몸에서 시커먼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화염 사이사이로 시퍼런 전광이 미친 듯이 명멸했다.
혈음각주의 눈이 흔들렸다.
‘광세마공!’
감정이 격해질수록, 마성이 치솟을수록 더 강해지는 마공이다.
천하제일마공을 불태우며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은 가히 마왕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안 돼! 지금 저자와 붙으면……!’
천인혈이 한 방울 남았다. 그 한 방울만 다 흡수되면 혈시가 완성된다.
문제는 혈시의 영사가 이미 천화룡과 이어져 있다는 점이다. 혈시가 완성되기 전에 천화룡이 죽으면 주인을 잃은 혈시가 어떤 폭주를 일으킬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영원히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혈음각주는 천화룡의 충동적인 사천 진입에 끝까지 반대했던 것이다. 그나마 교단에는 영사를 재배치할 각종 영물과 부적들이 즐비하지만, 이곳에는 그런 것도 없으니까.
‘광혈귀진의 이형까지 초식 세 번에 무너트릴 정도의 강자다. 소교주는 절대 저자를 이기지 못해!’
그때였다.
“아버지의 복수? 물론 중요하지.”
분노가 갈수록 깊어지는데도 천화룡은 한 줄기 냉정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교가 본교답게 성장하는 거다. 내가 죽으면 뉘라서 그 일을 하겠는가.”
“널 대신할 사람은 어디라도 있다. 저기 저 애체를 쓴 늙은이가 해도 되겠군.”
담담한 얼굴로 무시무시한 도발을 날린다.
딱히 노린 건 아니지만, 마침 두 사람의 관계가 최악임을 생각하면 정말 효과적인 도발이라 할 것이다.
천화룡이 혈음각주를 돌아보았다.
혈음각주가 곧장 고개를 조아렸다.
“언감생심 제가 어찌 그런 무도한……! 저 간교한 자의 요언에 휘둘리지 마십시오.”
천화룡이 피식 웃었다.
“네 할 일이나 해라.”
와중에 웃는다.
이것이 바로 천화룡의 무서운 점이었다. 감정 제어에 미숙하고 실수가 잦지만, 최악의 실수는 저지르지 않는다는 점.
“거기 너, 구슬을 내놔.”
“예.”
혈음각주의 제자 하나가 천화룡에게 붉은 구슬을 건넸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저거로군.’
광혈귀진의 핵(核)이다.
천화룡이 차갑게 말했다.
“대단한 무공이라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광혈귀진은 끝나지 않았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와서 붙을 생각 없으면 빨리빨리 선보여라. 피곤하다.”
“이놈이!”
애써 되찾았던 냉정을 잃을 뻔했다.
다른 걸 떠나서 저놈은 나이도 어리다고 들었다. 적이니 나이 운운하는 게 의미는 없다지만, 정말이지 건방지기 짝이 없는 놈이 아닌가.
우우웅!
손에 쥔 구슬이 무섭게 진동했다.
“끝장을 내 주마.”
천화룡이 본인의 마기를 구슬에 쏟아부었다.
화아아아악!
구슬이 엄청난 광채를 뿜었다.
쿠구구궁!!
언덕이 좌우로 엄청난 떨림을 발했다.
패율이 저도 모르게 외쳤다.
“호정!”
연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눈으로 변화하는 환경을 지켜볼 뿐.
‘역시.’
연호정의 상태 역시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드높은 깨달음과 성장한 황룡신왕공으로 이 정도 진법은 어렵지 않게 깨부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굳이 천화룡과 말을 섞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억지로 부쉈다간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른다.’
사문향의 그것에 비할 수는 없다지만 진법을 이루는 마기의 양이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
저 마기를 한 방에 불태워 소멸시키지 못하는 한, 진법이 붕괴되며 흩어진 마기가 온 산과 들로 스며들 것이다.
그리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죽은 산이 되어 동식물이 살 수 없어지는 정도에서 그칠 수도 있고, 독지(毒地)가 되어 수천 년간 부글부글 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장 패율도 저 마기에 침습당하면 목숨이 위험해지거나 정신 이상을 겪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소모시킨다. 차분하게 대응해도 늦지 않아.’
기실, 이런저런 이유도 다 필요 없다.
연호정은 지금 이 순간, 무턱대고 저놈들을 죄다 공격해선 안 된다는 걸 직감했다.
그것은 신인이 되어 얻은 예지 능력과는 다른 문제였다. 그는 저들, 정확히는 저 진법 안에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무척이나 위험한, 결코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무언가.
연호정이 곧장 진법으로 뛰어들지 않은 진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파아아아악!
언덕 주변의 세상이 바뀌었다.
하늘은 검붉게 변했고, 대지 곳곳에서 용암이 솟구쳤다. 천둥이 울릴 때마다 시퍼런 벼락이 쳤으며, 그에 호응하듯 곳곳의 나무와 풀들이 불에 타서 쪼그라들었다.
지옥 같은 광경이었다. 패율은 갑자기 변한 세상에 숨도 못 쉴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연호정이 담담히 말했다.
“별다를 것도 없군. 이게 끝인가?”
천화룡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끝이지. 적어도 네놈들은 말이다.”
퍽! 퍼벅! 퍼버벅!
용암이 흐르지 않는 땅 곳곳에서 사람의 손이 튀어나왔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그들은, 놀랍게도 모두 천화룡이었다.
하나같이 천화룡과 같은 옷을 입었고, 다른 표정을 지었다. 그 숫자가 물경 오십에 달했다.
광혈귀진의 마지막 삼형(三形), 진주살형(陣主殺形).
진의 주인의 형태를 만들어 지독히도 현실 같은 환상과 함께 적을 상대하는 최후의 초식이었다.
“네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오십 명이나 되는 나를 상대로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천화룡이 씨익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자 세상이 어두워졌다. 진의 마기가 그들 전부를 삼킨 것이다.
“시간은?”
혈음각주가 혈시의 머리맡에 놓인 그릇을 바라보았다.
한 방울 남았던 천인혈이 이제 반밖에 남지 않았다. 완성이 코앞인 것이다.
“이제 거의…….”
그때, 천인혈이 남김없이 사라졌다.
혈음각주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다 됐습니다!”
천화룡의 얼굴에도 흥분이 감돌았다.
“어서 연결해라!”
“여기 앉…….”
그 순간이었다.
찌이익!
심상치 않은 소리에 천화룡과 혈음각주,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어둠을 내려다보았다.
찌이익! 찌이이이이익!
장막 곳곳이 찢어지며 그 사이로 황금빛 광채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천화룡은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설마……?!”
찌이이이이익!
비단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장막 한가운데가 길게 갈라졌다.
화아아아악!
찢어진 장막 사이로 시커먼 마기가 뭉클거리며 올라왔다. 마치 화염지옥이 뿜는 연기처럼 피어오른 마기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치이이이이익!
뒤이어 솟구친 황금빛 진기가 무서운 속도로 마기를 파훼했다.
펑! 퍼퍼펑!
폭죽 터지듯 박살 난 마기가 연신 잔해를 흩뿌린다. 황룡기에 정화가 되기도 했고, 아예 무(無)로 돌아가는 마기도 있었다.
“이럴 수가!”
장막이 찢어졌다는 건 진주살형이 반쯤 깨졌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믿을 수가 없었다. 마기와 극상성을 지닌 무공을 익혔대도, 광혈귀진에 집약된 마기의 총량을 보면 누구라도 이 환상에서 벗어날 수 없어야만 했다.
특히 마지막 삼형은 모든 마기를 쏟아붓기 때문에 법력 높은 고승 수백 명이 와도 당할 수밖에 없거늘 저놈은 홀로, 그것도 열을 세기도 전에 깨부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천화룡이 버럭 소리쳤다.
“어서 영사를 연결해라!”
“예, 예!”
가부좌를 튼 천화룡과 혈시 사이에서 혈음각주가 주(呪)를 읊었다.
우우우우우웅!
혈시의 미간에서 나온 붉은 실이 천화룡의 미간을 통과했다. 이미 한 번 통과했던 터라 지금은 훨씬 더 빠르고 쉬웠다.
콰직! 퍼퍼퍼펑!
온갖 폭음이 터지며 진법이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천화룡이 이를 악물었다.
‘어서 와라.’
미간으로 파고든 영사가 상단전 전체를 휘감기 시작했다. 이제 거의 다 온 것이다.
‘어서!’
그리고.
콰아아아아앙!!
화포 수십 발이 터진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진주살형이 완전히 박살 나 버렸다.
후우우우웅!
그 안에 꽉 차 있던 마기가 모조리 증발되었다.
“후욱!”
가벼운 한숨과 함께 지친 몸을 바로 세운 연호정이 언덕을 바라보았다.
진법이 깨졌으니 이제 즉각적으로 공격을 감행하면 된다.
연호정이 땅을 박차려는 그 순간.
‘……?!’
제단에 누워 있던 혈시가 벌떡 일어났다.
상반신을 접은 게 아니었다. 무릎 관절도 접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일으켜 세워 주기라도 한 양, 사지를 꼿꼿이 편 채 일어난 혈시가 두 눈에서 핏빛 광망을 뿌렸다.
“……저게 뭐야.”
패율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아직 아무런 기운도 풍기지 않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리는 것 같았다.
천화룡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군.”
혈시가 천화룡을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완전한 복종을 의미하는 자세였다. 강시가 분명한데도 움직임과 표정은 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
“이제 막 깨어났는데 너무 독한 일을 시키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지만.”
천화룡이 연호정을 내려다보았다.
연호정의 두 눈은 극도로 차갑게 굳어 있었다. 천화룡조차 순간적으로 섬뜩함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연호정이 그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는 것을.
연호정은 혈시를 보며 천리(天理)를 느꼈다.
턱선이 다르고 귀도, 체격도 묘하게 다르다.
하지만 이목구비가 무섭게 닮았다. 그를 보는 순간, 왜 자신이 진법을 정면으로 깨부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혈시의 얼굴.
그 무표정한 얼굴 속에는 자식을 버려 사무치게 후회했던 한 여인의 죄책감이 깃들어 있었다.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