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87)
흑백무제 1387화(1387/1424)
1387화. 부활의 신호탄 (12)
하은교는 말했다. 자신의 자식이 사음교에 있을 거라고.
연호정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은교를 신뢰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드러난 정황상, 사음교는 하은교를 끌어들이기 위해 자식이란 패를 이용했다. 사음교가 어떻게 하은교의 개인사까지 알고 있을까 의문이었지만, 그 많은 세작을 파견했으니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도 떠나는 하은교를 막지 못했던 까닭은, 붙잡아 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삶이 죽음보다도 더 끔찍하고 무서울 때가 있다.
하은교는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보냈다. 자식을 버렸다는 후회는 날이 갈수록 그녀의 정신을 망가트렸고 심신의 조화를 무너트렸다.
그녀는 확인해야만 했다. 사음교에 본인이 버린 자식이 있는지를.
물론 그녀도 알았을 것이다.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그래도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자식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자식을 배신한 스스로에게 주는 엄벌이기도 했다. 삶과 죽음, 둘 중 어떤 결과라도 그녀는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렇게 그녀는 떠났다. 연호정도 하은교도 훗날 다시 만나자고 했지만, 두 사람 다 내심 다시 만나기는 힘들 거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만났고, 연호정은 사음교의 행태에 크게 분노했다.
사음교는 하은교를 꼭두각시로 만들어 중원에 파견했다. 심지어 한낱 마공의 완성을 위한 매개체로 이용하기 위해.
천만다행으로 황룡신왕공 덕에 하은교의 정신을 되돌릴 수 있었지만, 기적처럼 연호정과 조우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자식은 물론 중원까지 배신한 사람이 되어 비참하게 죽었을지 모른다.
천륜을 저버린 어미. 어쩌면 하늘은 그런 어미에게 생사 이상의 고통을 주기 위해 사음교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자식은 무슨 죄가 있는가.
‘선배님의 자식이다.’
미래의 일부분을 예측하고 인간사의 흐름을 엿보는 경지에 오른 연호정에게 있어, 자신과 강한 인연이 있는 사람의 혈육을 알아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놈들은 대체.’
사음교주 사문향은 역천의 끝을 보았고, 광혈교는 역천 한복판에서 마귀처럼 뛰놀고 있었다.
쿠르르릉!!
연호정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살기가 팔방으로 치달으며 일대에 지진을 일으켰다.
사문향과의 싸움 이후 이토록 극단적인 살기를 보여 주는 건 처음이었다.
반선이지만, 아직 사람이기도 한 연호정에게 있어 이런 일은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분노했고, 해소되었던 삼교에 대한 증오가 재차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
패율이 이를 악물며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고 싶지 않은데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연호정의 살기는 이전과 달리 순수한 불꽃과 같았지만, 그 불이 너무 뜨겁고 거세서 근처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르륵.
언덕 위에서 연호정의 살기에 정면으로 노출된 천화룡은 코피를 흘렸다.
신왕공의 의지에 따라 연호정의 살기는 언덕 위 마인들을 미친 듯이 타격하고 있었다. 일부러 드러내는 살기가 아닌, 진심 어린 분노에서 기인한 살기라서 그 위력은 배가 되었다.
“컥!”
“으으으.”
혈음각주는 무릎을 꿇으며 피를 토했고, 그 제자들은 눈을 허옇게 까뒤집은 채 학질에 걸린 양 덜덜 떨었다.
천화룡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괴물이!’
음제 하은교와도 박빙의 싸움을 벌였던 자신이 한낱 살기에 코피까지 쏟았다.
단순히 상극의 존재라서가 아니었다. 상대의 영력이 자신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경지를 이루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너는 알아야 할 것이다. 혈시가 깨어난 이상, 너는 결코 우리를 죽일 수 없어.’
경악한 와중에도 연호정을 두려워하지 않는 걸 보면 정말 타고난 강골이긴 했다.
천화룡이 외쳤다.
“첫 명령을 내리겠다! 저놈을 죽여라!”
그 직후, 천화룡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화아악!
혈시의 몸에서 새하얀 불꽃과 싯누런 뇌기가 번뜩였다.
‘광세마공?!’
완전한 광세마공은 아니다. 하지만 광세마공과 유사한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영혼과 영혼의 결속이다. 주인의 상단전에 남은 기억을 빨아들여 사고하고 깨닫는다. 심지어 주인의 무공까지도 끌어다가 쓰는 것이다.
천화룡은 광혈교 제일의 마공을 자연스레 구사하는 혈시에게 분노를 느끼는 동시에 희열을 느꼈다.
파아악!
제단에서 뛰어내린 혈시가 어느새 연호정의 오 장 앞에 내려섰다.
뛰어내리는 동작이 놀랍도록 세련되었다. 무려 십 년 동안 누워서 강시로 제련된 사람 같지 않은 몸놀림이었다.
매서운 눈으로 천화룡을 노려보던 연호정이 혈시에게로 눈을 돌렸다.
혈시의 얼굴에는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아니, 표정이 없지는 않았다. 마치 이 세상을 처음 느끼는 아기처럼 맑고 순수한 표정이다.
하지만 두 눈에서는 마기를 초월한 기묘한 사기(死氣)가 번뜩였고, 마기를 기반으로 한 사악한 기운이 전신에 넘쳐흐르고 있었다.
‘위험하다.’
연호정은 혈시를 마주한 즉시 깨달았다.
‘존재 자체가 재앙이야. 저 사문향의 마기처럼, 평범한 사람을 기운만으로 죽이거나 타락시킬 수 있다.’
그는 당황했다.
‘없앨 수 있는가.’
죽여야만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일 것이다. 언제나처럼.
문제는 이 남자가 하은교의 자식이라는 사실이다.
제아무리 과단성 있는 연호정이라도 적이 된 친인의 자식을 냅다 죽이기는 힘들었다. 오히려 무극에 오르기 전이었다면 어쩔 수 없다고, 세상에 재앙이 될 거라고 말하며 슬퍼했을지언정 망설임 없이 쳐 죽이려 했을 것이다.
‘선배님…….’
하지만 이제는 천리의 흐름을 읽기 시작한 그였기에.
하은교의 잘못과 안타까움을 알기 때문에, 연호정은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때, 혈시의 입이 열렸다.
“연호정.”
연호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혈시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듣기 좋았다. 하은교의 목소리는 여성스럽고 단아하여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졌는데, 혈시의 목소리 역시 중성적이면서도 차분했다.
아름다운 목소리. 그조차도 어미를 닮았다.
“너는 적이다.”
“말을 할 줄 아는가.”
“그렇다.”
말투가 딱딱하다.
하지만 강시가 말을 할 줄 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한 일이었다.
‘저놈의 상단전에서 뽑은 정보를 기반으로 움직이는군.’
혈시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화르르르륵!!
새하얀 불꽃이 혈시의 등 뒤에서 거대한 날개가 되어 뻗어 나왔다.
천화룡의 묵룡염원보다 더 뜨겁고 사이한 기운으로 똘똘 뭉쳐 있다. 깨달음은 차치하고서라도, 기의 밀도만큼은 천위룡의 그것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연호정이 힐끔 패율을 돌아보았다.
한참 멀리 떨어진 패율은 연호정의 눈을 보는 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저놈들.’
언덕 아래 좌측에 오십여 명의 마인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투마대로, 얼마 남지 않은 광혈교의 전투 부대였다. 앞선 광혈교의 막무가내식 중원 침공에 투마대도 대부분이 따라붙었지만, 모조리 몰살당하고 남은 잔여 병력이 그들이었다.
‘내가 끼어들 판이 아니지만, 호정이 놈들을 잡으라고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패율은 조금씩 조금씩 좌측으로 움직였다.
그때, 혈시가 외쳤다.
“죽어라!”
파아앙!
오 장 거리가 찰나지간 반 장 거리로 줄어들었다.
정말 눈 깜짝할 새였다. 첫 움직임부터 음속을 돌파한 속도를 낸다.
콰앙!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뻗어 나간 연호정의 주먹이 혈시의 가슴을 후려쳤다.
혈시가 대번에 튕겨 나갔다.
콰콰쾅!
원형으로 퍼져 나가는 충격파에 주변 대지에 실금이 갔다. 반경 십 장을 넘어가는 범위였다.
파악!
연호정이 광룡부를 한옆으로 던져두자, 혈시 역시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혈시는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가슴을 매만지는 그 행동이 사람과 똑같았다.
‘강시지만, 강시가 아니다.’
저것은 사람을 인형으로 만든 것뿐이었다. 인형이지만, 또한 사람이었다. 사람이지만, 또 사람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사람, 인형, 강시. 그 어떤 것으로도 정의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가 아닌, 그저 뒤죽박죽 섞여 버린 괴물이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선배님.’
파지지직!
혈시의 몸에서 샛노란 뇌기가 번져 나왔다.
광세마공의 뇌룡강재였다. 기존의 것과 다르지만, 그래서 더 무섭다. 순수한 마기의 힘으로 발산하는 게 아니라 온갖 사악하고 혼탁한 기운으로 일으킨 힘이었다.
파아아앙!
다시 한번 질주한 혈시가 두 주먹을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연호정이 우장을 뻗었다.
콰앙!
대여섯 번의 주먹질이 일장을 이기지 못했다.
혈시가 또 한 번 튕겨 나갔다. 이번에는 무려 이십여 장을 날아가 언덕 벽면에 처박혔다.
쿠르릉!
벽이 무너지고 돌덩이와 흙이 마구 쏟아졌다.
연호정이 이를 악물었다.
괴물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하은교의 자식을 때리는 것 같다. 실제로도 그게 맞았지만, 승부에 그런 감성 따윈 전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아는데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연호정은 결정을 내렸다.
‘죽이지는 않는다.’
촤르르르륵.
실로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내는 교룡쇄.
양손 소매를 통해 밖으로 튀어나온 교룡쇄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댔다.
“크아악!”
콰앙!
괴성과 함께 돌덩이를 치우고 일어난 혈시.
그 순간, 연호정의 좌측 손에서 뻗어 나온 교룡쇄가 엄청난 길이로 늘어나며 혈시의 몸을 칭칭 휘감았다.
치리리리링!!
상체와 팔을 함께 묶어 황룡기로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혈시는 미친 듯이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사슬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파지지지직!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혈시가 뇌룡강재를 뿜었다.
교룡쇄 역시 근본은 철인지라 뇌기의 전도가 무척 빨랐다.
퍼퍼퍼펑!
교룡쇄가 미친 듯이 출렁거렸다.
쏟아지는 뇌기에 맞서는 황룡기가 뇌룡강재의 침투를 원천 차단하고 있었다. 혈시의 뇌기가 제아무리 강력하다지만, 황룡기를 파괴할 수는 없었다.
“끄응!”
파직! 파지직!
샛노란 뇌기가 한층 선명해졌다.
무서운 힘이다. 황룡기가 파괴될 일은 없겠지만, 지금의 연호정으로서도 방심하다간 힘에서 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신왕공을 제외한 평가였다.
연호정이 힘차게 교룡쇄를 당겼다.
훅!
혈시가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연호정이 교룡쇄로 칭칭 감긴 오른 주먹을 휘둘렀다.
퍼어엉!
혈시가 다시 뒤로 날아갔다. 하지만 연호정은 또 한 번 혈시를 끌어당겼다.
쾅! 촤르륵! 콰앙!
단순해서 무지막지한 대응이었다.
혈시를 끌어와 절벽도 허물 주먹질을 연신 퍼붓는다. 혈시는 그 위력에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았다.
쾅! 쾅! 쾅!
무려 일곱 번이나 주먹을 맞은 혈시의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다. 그만한 위력의 주먹질에 당하고도 고작 붓는 선에서 끝났으니, 내구성 하나만큼은 가히 천하제일이라 할 만했다.
“크르륵!”
쓰러진 혈시가 두 다리를 버둥거렸다.
잠시나마 전투 불능이 되었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훅!
곧장 교룡쇄를 푼 연호정이 사선으로 몸을 날렸다.
제단 앞, 천화룡을 향해서였다.
천화룡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긴 했지만, 연호정의 움직임은 천화룡의 인지 능력을 벗어날 정도로 빨랐다.
어느새 천화룡의 코앞까지 날아간 연호정이 발을 휘두르려는 순간.
파아아악!
수직으로 솟구친 혈시가 연호정의 몸통을 끌어안은 채 옆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