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96)
흑백무제 1396화(1396/1424)
1396화. 완성의 시간 (6)
“허억!”
느닷없이 신음을 토해 내는 남자의 얼굴은 시커먼 핏줄이 돋아나 끔찍해 보였다.
연위는 말없이 남자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우우웅!
은은하게 스며드는 검극사기.
발작을 일으키던 남자가 다시 눈을 감았다. 호흡도, 맥박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검극사기는 연가의 오대신공 중 가장 날카로운 기운이었다. 그런 기운을 몸이 피폐한 사람에게 썼는데도 거부 반응이 일지 않았다.
물극필반. 검극사기의 경지가 너무나도 높아서 오히려 부드러운 성질로 변한 것이다.
“괜찮아진 겁니까?”
“잠시 동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안타깝지만, 내 무공으로는 체내를 잠식한 마기를 완전히 뽑아낼 수가 없네.”
가득상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일었다.
이곳 막사 주변엔 일백에 가까운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 모두가 무공 한 줌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었다. 사음교 병력에게 직접적으로 공격을 당한 자들은 전부 죽었고, 그들이 풍기는 마기에 침식당한 자들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정말 기가 막히는군요.”
가득상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저도 한 번 느껴 보긴 했습니다만…… 어떻게 이런 지독한 기운이…….”
직접 마기를 쑤셔 넣은 것도 아니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기에 희롱당해 마화(魔化)가 되고 있었다.
가만히 놔뒀다면 이 많은 사람이 마기에 미쳐서 살육을 벌이다가 원정이 손상되어 죽었을 것이다.
개중엔 마기와 놀랍도록 자연스레 동조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경우엔 오히려 원정이 마화되어 본래 수명이 끊어질 때까지 짐승이 되어 날뛰었을 것이다.
“일단 가주님께서도 좀 쉬시지요. 이 많은 사람을 다 봐주시느라 잠도 못 주무셨잖습니까.”
“나는 괜찮네.”
실제로 연위는 멀쩡했다.
마기를 뽑아내지는 못해도 발작을 잠재우는 것 정도야 극소량의 내공만으로 충분했다. 바다처럼 깊은 공력을 지닌 연위에게 있어선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잠깐이라도 쉬십시오. 한 차례 억눌러 놓았으니 반나절은 멀쩡할 겁니다.”
“자네부터 쉬게. 안색이 좋지 않아.”
“저야말로 쉴 때가 아니지요.”
씨익 웃는 가득상의 얼굴에선 본래의 협기가 엿보였다. 그동안 연위와 함께하며 마기의 공포를 몰아낸 듯했다.
“하면 저는 다시 일 좀 하겠습니다.”
“그러시게.”
가득상을 보낸 연위는 뒷짐을 진 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발작을 억누르는 건 어렵지 않지만, 문제는 저들의 의식을 되살리는 일이다.
물론 의식을 되살리는 것도 어렵진 않다. 하지만 의식을 살리는 순간 다시 발작하며 난리를 칠 것이다.
‘벌써 이틀이 지났다. 음식 섭취는 그렇다 치더라도 물이라도 먹여야 할 텐데.’
그나마 연위는 대기 중에 퍼진 수기(水氣)를 통제하여 민간인들의 피부에 스며들게 했다.
하지만 그 양은 너무나도 적었다. 내공의 깨달음은 깊지만 수기를 전문으로 다루는 사람이 아니었을뿐더러, 대량의 수기를 쏟아부어도 직접 음수를 하는 것만은 못할 것이다.
연위는 초조함을 느꼈다.
‘의원들이 어서 와야 할 텐데.’
그때였다.
“경과가 안 좋아 보이는군.”
연위가 등을 돌렸다.
그곳에는 기천웅이 있었다. 신화교 병력을 데리고 산서 남쪽까지 와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짧으면 이틀, 길어야 사나흘 후면 저이들의 목숨이 위험해질 것이네.”
“…….”
“기공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어.”
“알고 있소.”
기천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좀 쉬는 게 어떤가?”
“휴식은 되었소. 그보다 앞날을 의논해 보는 게 어떻소?”
“누가 흑제성주 아비 아니랄까 봐 쉬는 법을 모르는군. 부자지간이 똑 닮았어.”
연위가 피식 웃었다.
“부족한 아비와 비슷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못난 아이가 아니외다.”
“부럽군.”
“…….”
“다른 건 몰라도 자네 부자들의 관계는 정말 부럽네.”
연위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기천웅이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기천웅이 탄식을 토했다.
“나도 자네와 같았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모두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자식을 그리 키웠으니, 가슴에 묻어 두자 다짐했는데도 하루하루 후회하지 않는 날이 없구먼.”
“……나도 아비 실격이오.”
“안 그래 뵈던데?”
“정말이오.”
연위가 저 멀리 서쪽을 바라보았다.
보이지는 않지만 느낄 수 있었다. 아들의 영혼을, 박동하는 심장을.
“못난 아비를 향해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고마운 아들이오. 호정이 나를 다르게 대하지 않았다면, 우리 관계도 좋지는 못했을 것이오.”
“…….”
“그래서 항상 호정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소.”
가만히 연위를 보던 기천웅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처지는 얘기는 여기까지 하지. 그래,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그건 무림맹 병력이 왔을 때 제대로 논의해 보는 게 좋겠소.”
“무림맹 병력이 오기 전에 놈들이 싸움을 걸면 어쩌려고?”
“그럼 후퇴해야지.”
후퇴.
천하의 연위 입에서 후퇴라는 말이 나왔다. 기천웅은 무척 놀랐다.
“황궁에서 그 활개를 치던 사람 맞나? 후퇴라니? 어떻게든 전략을 쓸 생각은 안 하고?”
“후퇴도 전략이오.”
“흐음.”
“그리고 당가주가 말했소. 사문향의 마기는 인간의 능력으로 감당할 것이 아니라고.”
연위가 민간인들을 둘러보았다.
“우리라고 다를 것 같지는 않소이다.”
그는 자신의 무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 믿음만큼이나 당관의 안목을, 그 자존심을 믿었다.
죽었으면 죽었지, 도망 따위는 절대 치지 않을 사람이 당관이었다. 그런 당관이 사문향과는 붙지 말라고 했다. 그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어 도망쳤다는 말과 함께.
차라리 연호정이 그런 말을 했다면 한번 붙어 볼까 고민이라도 했을 것이다. 당관이기에, 천하에서 제일 자존심 강한 무인의 말이기에 연위는 미련 없이 후퇴를 입에 올릴 수 있었다.
기천웅이 말했다.
“사문향의 무공은 우리 삼교의 수장 중 두 번째라고 생각했네.”
“두 번째?”
“최고는 아무래도 광혈교주라고 보았지.”
“뜻밖이군. 당신이 최고라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떠들고 다녔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어. 하지만 폐관에서 나온 후, 나는 많은 것을 잃었다네.”
“…….”
“그러면서 나 자신의 상태를 명확하게 볼 수 있었네. 한시적으로는 두 사람에 비해 떨어지지 않겠지만, 장기전을 상정한다면 나는 둘보다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네.”
기천웅이 저 멀리 우뚝 솟은 산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사람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리 떨어진 봉우리였다. 바로 그곳에 사문향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틀렸어. 사문향이 이런 말도 안 되는 힘을 거머쥐고 있었을 줄이야…… 단순히 귀계에 능한 것만이 아니라 파천(破天)의 무공을 연성하고 있었군.”
“놈의 무공이 대단한 게 아니라 마기가 지나친 것일 뿐이오.”
“그만한 마기를 육신에 담아 휘두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놈의 경지는 천외천이야. 자네도 모르지 않을 터인데?”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연위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마기를 제대로 통제할 수 있다면 그렇겠지.”
“……?”
“나는 그자가 그 역천신주라는 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고 생각하오.”
기천웅의 눈이 깊어졌다.
“왜 그리 생각하나?”
“제대로 다뤘다면 우리가 이곳에 모인 것을 보고만 있었겠소?”
“사갈보다 더 음흉한 놈이야. 뭔가를 획책하고 있을지도 모르잖는가.”
“보시오. 놈의 부하들이 발산한 마기만으로도 민간인들이 발작을 일으킬 지경이오. 심지어 초절정고수인 개방의 용두방주조차 놈의 수하가 뿜은 마기에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소.”
“……?!”
“이 정도면 뭘 원하든 저곳에 죽치고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소이다. 다른 곳은 몰라도 이곳 산서만큼은 모조리 자신의 땅으로 만들 능력이 있는 놈 아니오?”
“그건…… 그렇군.”
“힘에 취해 여유를 보여 준다? 나는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오. 놈이 그런 성격이었다면 그대의 아들을, 나아가 광혈교를 그 오랫동안 손에 쥐고 휘두를 수 있었겠소?”
“…….”
“백번 양보해서 방심했다 한들, 이토록 오랫동안 칩거하며 부하들만 한 번씩 내려보낸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놈의 상태가 정상이라고 생각할 수 없소.”
그것도 그거지만, 연위가 이렇게 단정 짓듯 말하는 것은 영안에 잡히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어둡구나.’
사문향이 거하고 있는 봉우리 위 하늘이 신음하고 있었다.
마치 딱 그쪽 하늘만 동떨어진 세상처럼 느껴졌다. 천기의 흐름도, 천의의 신비로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기의 존재만으로 천기가 뒤틀릴 정도다. 멀리서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 저런 마기를 인간이 다스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실력이나 재능을 떠난 문제다.
연위는 옅게나마 진리를 보는 눈을 지녔다. 적어도 이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이라면, 생명체라면 저 정도 마기를 제어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부하들에게도 마기를 나눠 주고 있는 것일 게다. 혼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까.’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연위는 지극히 높은 확률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차라리 중원의 모든 병력을 끌어모아 놈을 치는 것이 낫지 않은가?”
“놈이 마기를 제어하지 못한다고 했지, 우리라고 그걸 감당할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소.”
“무슨 뜻인가?”
“놈이 마기를 제어하지 못한다는 건 역천신주라는 마물을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뜻이오. 역천신주가 이 마기의 근원이라면, 그 구슬은 존재만으로 운명을 뒤트는 마물이자 영물인 셈이오.”
“…….”
“그 구슬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소이다.”
기천웅이 쓴웃음을 흘렸다.
“죄다 확신할 수 없는 추측뿐이구먼.”
“어쩔 수 없소.”
“하지만 자네 안목을 믿어 봄세. 자네 아들처럼 자네 역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일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 아니던가.”
“과찬이시오.”
기천웅이 몸을 돌렸다.
“일화왕에게 따로 말해 두었네. 오늘까지는 자네가 민간인들을 돌보도록 하게. 내일부터는 일화왕이 담당할 걸세.”
“……?!”
“열양공을 익혔다지만 일화왕의 진기 제어 능력은 자네 못지않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게야.”
“고맙소.”
“자네 혼자만의 일도 아닌데 고맙기는.”
그때였다.
“……?!”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북동쪽을 바라보았다.
“느꼈는가?”
“느꼈소.”
우우우웅.
등에 매인 천라제국검이 강렬한 울음을 토해 냈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의 힘이 담긴 황궁제일검이 주인의 기운과 공명하며 마기를 읽어 낸 것이다.
연위가 외쳤다.
“내가 가 보겠소! 교주는 이곳을 지켜 주시오!”
파아아악!
순식간에 한 점이 되어 날아가는 연위.
기천웅은 그를 말리지 않았다.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지도 않았고, 굳이 말릴 일도 아니었으니까.
“역천신주라…….”
사문향의 거처를 노려보는 기천웅의 두 눈에 살기가 어렸다.
“고작 그따위 것에 홀리려고 내 아들을, 신화교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이지.”
사문향을 향한 증오, 그리고 분노.
온 천하를 적으로 만든 한 사내는, 대체 왜 그곳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