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405)
흑백무제 1405화(1405/1424)
1405화. 희망의 불 (5)
되돌아온 두 사람은 곧장 기천웅과 만나 대화를 나눴다.
“연락이 왔네. 내일 중으로 무림맹 병력이 도착할 것 같아.”
기천웅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리고 그다음 날, 다른 지역에서 보낸 무림의 고수들도 집결할 것이네. 아마 이곳 전체가 인산인해를 이루겠지.”
탁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겠군.”
“본교는 무림과 함께 칼을 들었고 광혈은 실질적으로 멸망해 버렸으니, 남은 적은 사문향과 그를 따르는 사음교의 정예들뿐이야. 그래서 문제지.”
악의 근원이 이곳 회정궁에 있다.
저곳만 밀어 버리면, 저 안에서 나오지 않는 사문향과 그 부하들만 없애 버리면 중원 무림의 완전한 승리로 굳어질 것이다.
문제는 지금 사문향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탁무자, 그대가 보기에는 어땠나?”
“위험하네.”
탁무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허와 있을 때도 느꼈지만, 직접 보니 더 확실히 알겠어. 회정궁 전체를 휘감고 있는 마기는 하루하루 더 강성해지고 있네. 그 멀리서도 존재해선 안 될 기운이라 생각할 만큼 파격적인 힘이었는데, 지금은 더 지독해졌어.”
“음.”
“어쩌면 우리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네. 며칠만 더 지나면…… 저 마기는 봉우리를 타고 내려와 이 부근까지 전해질지도 모르겠네.”
다른 누구도 아닌 파사현정의 극의에 도달한 무당 무공의 전능자가 하는 말이다. 가볍게 듣고 넘기기에는 그가 보여 준 능력이 너무 대단했다.
연위 역시 탁무자의 말에 동의했다.
“마기는 본디 고이는 기운이라 하였소. 하지만 저 마기는 그 정도를 넘어섰소. 더 이상 고일 곳도 없는 마기는 점차 영역을 넓히게 될 터, 솔직히 며칠이 아니라 당장 내일이라도 저 마기가 이곳까지 전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오.”
상단전으로는 무림에서 첫손에 꼽히는 연위가 하는 말이다.
기천웅의 얼굴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그들에게 이곳으로 오지 말란 말을 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쉽지 않을 것이오.”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사음교주, 아니 삼교를 향한 무림인들의 분노는 상상을 초월하오. 어디 무림인뿐이겠소? 이 끝없는 대륙 땅에 두 발을 딛고 선 사람들 대부분이 삼교를 증오하고 두려워하오.”
“그러니 더더욱…….”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오. 그들은 이 싸움이 마지막 싸움이라고 생각하오. 수많은 사람이 죽고, 가늠하기 힘든 너비의 땅이 황폐해졌소. 그 공포를 준 집단을 드디어 무너트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찌 막을 수 있겠소이까.”
기천웅은 이해할 수 없었다.
“여론이 그렇다는 건 알겠네만, 각파의 수장들은 다르지 않나? 마음은 같다 하더라도 그들을 설득하면 어떻게든…….”
“종교에 뿌리를 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오. 중원은 넓소. 지역이 다르면 문화가 다르고 심지어 쓰는 말까지 다른 통에, 수장이라고 그 많은 사람을 전부 제지할 수는 없을 것이오.”
신화교에서 교주의 명령은 곧 법이다.
어떤 의미로 그들에게 있어 교주는 제국의 황제 이상의 권력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황제는 통치권자지만 교주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광신도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설령 원수를 죽이기 직전이라도 교주가 칼을 거두라 하면 순순히 거두는 것이 신화교도다. 그건 광혈교나 사음교도 비슷하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달랐다.
심지어 그들은 제국 휘하의 신민들과도 또 다른 이들이었다. 그들은 소위 무법자에 가까운 성향을 지닌다. 단체에 소속되어 있더라도, 반드시 이뤄 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수장의 명령에도 반하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곳으로 모여드는 이들은 수천을 훌쩍 넘어 만 단위에 이른다.
그 많은 무림인을, 하물며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모인 무사들을 되돌려 보낸다?
자칫 잘못하면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다. 최악의 경우 무림의 수장들이 사문향과 연수하여 중원을 집어삼키려 든다는,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가 퍼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곳에 모이게 놔둘 수도 없지 않은가? 마기에 노출된 것만으로도 사람이 죽어. 차라리 죽으면 다행이지, 신체가 변형되고 짐승처럼 이지를 상실하는 괴물이 된단 말일세.”
기천웅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뭐가 됐건, 최악의 상황은 피해야만 하는 것이다.
다만 뭐가 최악인지는 따져 봐야 하는 문제다. 만약 내부의 불만이 폭발하여 중원의 전력이 쪼개지게 되면, 그 또한 엄청난 문제였다.
자칫 잘못하면 신뢰가 깨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를지도 모른다.
달리 말하자면, 그만큼 삼교가 뿌린 공포와 피해가 엄청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일단은.”
탁무자가 담담히 말했다.
“그 자리에서 대기토록 하고, 수장들부터 불러들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네.”
최선이 안 된다면 차선을 선택한다.
달리 말하면, 최악을 벗어나기 위해서 차악이라도 택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곳에는 협의의 화신이라는 연가의 가주가 있고, 허명이긴 하나 성천의 일좌인 나 탁무가 있네. 이 정도 이름이라면 수장들을 이해시키기에 부족함은 없을 것이야.”
“그다음은?”
“그들을 이해시키고 최대한 거리를 벌리도록 판을 짜야겠지. 포기를 시키는 게 아니라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전선을 구축하라고 설득하면 되지 않겠나.”
“미봉책이군.”
“미봉책이지만, 당장 그들 전부를 막을 방도가 없네. 게다가 이건 미봉책이 아니기도 해. 저곳 회정궁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아. 만에 하나 싸워야 할 순간이 온다면, 무림인들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뜻이네.”
정론이었다.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 내놓을 수 있는 최선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연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방도들에게 가서 얘기하겠소. 두 분은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 주시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무림맹 병력은 산서 최남단에 전선을 구축했고, 화산 등 여러 문파에서 온 전력 역시 회정궁에서 수백 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당장이라도 적진으로 쳐들어가 끝장을 내 버리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지만,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일수록 신중해야 하는 것도 전략상 옳은 일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탁무자와 연위의 예상과는 달리 보름이 지났는데도 회정궁의 마기는 주변으로 퍼져 나오지 않았다.
그저 끝없이 깊어지고 끝없이 악랄해질 뿐.
차라리 어떤 식으로라도 눈에 띄는 변화가 일었다면, 그랬다면 무림 병력 측에서도 나름의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한데도 사문향과 휘하 마인들은 봉우리에서 내려오지 않았으며, 마기도 뻗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무림맹의 수장들도, 각파의 좌장들도 초조해지고야 말았으니.
마음을 다잡고 인내했다면 몇 달을 더 인내할 수 있었던 그들 중에 사고를 치고야 만 이들이 나왔다.
그들은 바로 섬서 전쟁에서 수많은 문도를 잃었던 화산파의 도사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섬서의 중소 문파 스물일곱 곳이었다.
* * *
혈시의 치료는 순조로웠으나 다소 느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광혈교가 수십 년을, 세대를 거듭하며 준비한 대법으로 탄생한 것이 혈시였다. 방법을 안다 해도 단시간에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연호정은 끈기 있게 혈시의 몸에 도사린 천인혈을 제거했고, 기우희는 그의 곁에서 잠도 안 자며 혈시의 정상화를 도왔다.
그리고 스무 날이 조금 안 된 시점.
“……여기는?”
지치고 몽롱하지만, 분명한 감정이 깃든 목소리였다.
“정신이 드나요?”
“누구십니까?”
“저는 기우희라고 합니다.”
“기……?”
“무림맹 의선각의 각주가 바로 접니다.”
순간 청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덜컹!
침상 아래로 떨어진 그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천인혈의 기운이 몽땅 빠져나간 채로 시술을 받다 보니 근육이 풀린 탓이었다.
“무, 무림맹!”
청년의 얼굴에 긴장과 경계의 기색이 어렸다.
기우희는 담담함을 유지했다. 젊은 나이지만, 그녀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의원이었다.
“몸의 마기는 전부 걷어 냈지만, 그간 음식부터 물까지 제대로 섭취한 게 없어요. 몸이 많이 상했으니 일단은 마음 편히 누워 있도록 해요.”
“무림맹에서…… 어찌?”
“기억이 나지 않나요?”
청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기억나지 않느냔 말이오?”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보면서도 존대는 한다. 말투는 사나웠지만, 경계심 때문이라고 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기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기가 두뇌까지 침범했으니 기억에 혼란이 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요. 차차 기억이 날 겁니다.”
“대체 무슨 말이오?”
“일단은 쉬도록 하세요.”
“이보시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이곳은 사천당가입니다.”
“……!”
청년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천당가. 무림에서 가장 위험하고 독하다는 가문이었다.
기우희가 피식 웃었다.
“그대를 긴장케 하려고 말한 게 아닙니다. 당가인들은 누구도 이곳에 오지 않을 거예요. 오히려 당신을 도우려는 입장이죠.”
“……?”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난동을 부리거나 사고를 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 몸으로는 무리기도 하겠지만, 말했듯 이곳은 당가예요. 지금은 몸 상태를 끌어올리는 것, 그리고 기억을 되찾는 것에 집중토록 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기우희는 방을 나섰다. 어차피 더 있어 봤자 환자에게 해가 될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어땠냐?”
마당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연호정이 물었다.
기우희가 고개를 저었다.
“혈시 제조에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했죠?”
“그랬지.”
“아마 환자는 가사 상태에 빠진 이후의 기억이 없을 겁니다. 너무 오랜 시간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기억을 되찾는 데 시간이 걸릴 거예요.”
“목소리를 듣자 하니 기겁을 하는 것 같던데.”
“네. 사음교 소속으로 살았으니 당가라는 이름에 놀랄 만도 하죠.”
“그래, 고생했다.”
“고생은 저보다 성주님께서 훨씬 많이 하셨지요.”
그때, 제갈아연이 마당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됐어?”
“정신 차렸다.”
“다행이네.”
제갈아연의 얼굴에도 안도의 기색이 어렸다. 지난 시간, 초조함에 잠 한숨 못 잔 하은교를 생각하면 그 녀 역시 마음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선배님을 부를까?”
“아니. 일단은 진정부터 시키는 게 우선이야.”
“음, 그래. 그게 낫겠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제갈아연은 문득 연호정의 얼굴이 무척이나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
“호정?”
“마(魔)…….”
“마?”
하늘을 주시하는 연호정의 눈빛이 점점 짙어졌다.
“마가 꿈틀거리고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
그때였다.
“연 성주! 여기 계시오?”
헐레벌떡 뛰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당윤이었다. 일개 가원도 아니고 이가주가 직접 찾아올 만큼 다급한 상황인 모양이었다.
연호정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무림 병력 측에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그렇소!”
당윤의 얼굴에 격동이 일었다.
“병력 일부가 회정궁에 숨은 사문향을 치려고 진격했는데…… 그들 대다수가 봉우리에 오른 후 종적이 묘연해졌다고 하오! 그리고……!”
“…….”
“그곳에 모인 병력 사이에서 한 차례 내전이 터졌다고 하오!”
연호정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광룡부, 어디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