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408)
흑백무제 1408화(1408/1424)
1408화. 희망의 불 (8)
“멈췄군.”
탁무자의 말에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멈추었습니다.”
점점 깊어져만 가는 마기에 하늘도 한층 어두워진 듯했다. 하늘만이 아니라 지역 전체의 공기가 텁텁했다.
물론 탁무자와 연위의 무공은 궁극에 이르러, 그러한 공기에도 마의 침습을 받지 않았다. 사문향을 직접 마주한다면, 혹은 산에 오른다면 또 모를까 이 정도 거리에서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는 것이다.
“지금껏 저곳의 마기는 미약하게나마 끊임없이 깊어지고 있었네. 그 마기의 순도 상승이 드디어 멈췄어.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더는 깊어질 수 없을 만큼 깊어졌다…… 혹은, 역천신주에 한계가 왔다는 뜻일지도 모르지요.”
탁무자의 눈이 깊어졌다.
남들 눈에는 그저 유독 어두운 산처럼 보이겠지만, 선도 수련의 극치를 이룬 탁무자의 눈에는 봉우리 전체를 휘감은 마기의 흐름이 물결처럼 보였다.
고고하고 깊다. 마치 수천 마리의 악룡이 산을 휘감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악룡들이 만들어 낸 하나의 길이 있었다. 다른 건 다 오해해도, 마기가 폭발하는 길만큼은 모를 수가 없었다.
그 길 앞에 세 사람이 서 있는 것이다.
“어떠하냐.”
탁무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옥청이 있었다. 무림맹 병력과 함께 온 옥청이, 드디어 스승과 만난 것이다.
“지옥이 따로 없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우우우웅!
옥청의 두 눈이 녹청빛으로 물들었다.
무당 무공의 극치라 불리는 혼원기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가 지닌 혼원기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두 배 이상 짙어져 있었다.
연위의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참으로 대단한 신공이다.’
혼원결은 무당의 여러 무공을 취합하여 탁무자의 깨달음으로 완성한 희대의 신공이다.
물론 다른 무당 무공을 압도하는 신공은 아니었다. 무당의 무공들은 전설의 도인 삼풍진인이 직접 창안한 절학들이다. 주인의 노력과 성품에 따라 천하제일의 신공이 될 수도 있는 무공들이었다.
다만, 사마외도의 기운에 더 강하게 반응하고 전투에 적합한 무공이 무엇이냐고 한다면 단연 혼원결이 최고라 할 수 있다. 와중에 삼풍진인과 탁무자의 깨달음이 녹아 있어, 선도(仙道)로 나아가는 길 역시 제공된다.
‘마기에 노출된 것만으로도 진기가 이렇게나 짙어진다…….’
정확히는, 자극될 만큼의 마기만 쬐어서 그렇다.
그렇다 해도 이 정도 진기 밀도는 놀라운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불가와 도가 무공이 이와 같았다면 마인들은 진즉에 씨가 말랐을 것이다.
‘도가신공이지만, 근본은 협(俠)에 닿아 있다. 적극적으로 마(魔)를 제거하는 무공이야. 게다가 저 무공, 오히려 검선 선배보다 옥청에게 더 어울린다.’
만약 옥청이 무극을 깨닫는다면, 사마공을 연마한 마인들은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 정도로 혼원결의 반마(反魔) 성향은 짙었다.
“천하에 온갖 기운이 융성한다지만, 하나의 기운이 성하면 다른 하나의 기운은 가라앉게 마련이다. 돌고 돌아 태극, 기(氣)는 유동적으로 흐르나 멀리서 보면 서로가 서로를 떠받들며 생(生)한다.”
“예.”
“그러나 또한, 도고일척(道高一尺)이면 마고일장(魔高一丈)이라 하였다.”
탁무자가 회정궁을 돌아보았다.
“그간의 마(魔)도 지독했지만, 우리는 지금 역사상 최악의 마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 저처럼 깊은 마기에 대항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도(道)가 희생되겠느냐?”
옥청이 청아한 목소리로 답했다.
“도고가 일 척이면 마고가 일 장이니, 수행자는 항시 마를 경계하고 수행에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그러나 도가 지나치면 마가 들불처럼 일어나듯, 융성한 마는 도기(道氣)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저만한 마가 일어났다는 것은 곧, 태극의 이치처럼 그에 맞설 만한 도(道)가 났다는 뜻이기도 할 겁니다.”
탁무자가 묘한 눈으로 옥청을 바라보았다.
“재미있는 해석이구나. 그것이 네가 깨달은 세상사 이치더냐?”
“세상의 이치 속에 무당의 이치가 녹아 있습니다. 당장은 세상이 뒤집힐 것처럼 보여도, 종래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겁니다. 지독하게 오염된 바다도 백 년, 이백 년이 지나면 본래의 청정함을 되찾듯 말입니다.”
“허허.”
탁무자의 얼굴에 기쁨이 떠올랐다.
“천하에 비할 데 없는 도기(道器)라, 속세에 나가지 않고 수행에 힘쓰면 삼풍진인의 전설을 재현할 인재라 보았다. 그럼에도 네가 세상에 나가고자 했을 때, 나는 굳이 막지 않았다. 너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
“실제로 너의 무공은 정체되었다. 이 스승의 가르침을 따랐다면, 어쩌면 저 연호정처럼 지금쯤 무극에 이르렀을지도 몰라.”
“그렇습니까.”
“그러나 무공의 성취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너는 타고난 운명에서 벗어나 너만의 길을 찾았다. 천하를 겪은 너는, 비록 무공은 부족할지라도 훗날 크게 완성될 대기(大器)가 되어 돌아왔다.”
탁무자가 옥청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 사부는 네가 자랑스럽다.”
흔치 않은 스승의 칭찬이다. 그러나 옥청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아직도 강함에 목마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미래입니다. 지금의 전 도사가 아니라 무림맹 유군 부대 의정군 소속의 군병일 뿐입니다.”
“허허.”
“저만한 마에 대항할 또 다른 도가 도착하기 전까지, 목숨을 걸고 막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저 마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디 옥청만 그렇겠는가. 혹시 몰라 길목을 막고는 있지만, 저 흐름이 무너지고 마기가 넘쳐흐르게 되면 연위조차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
탁무자의 눈이 흐려졌다.
마를 주시하며 보낸 시간이 스무 날을 넘어 거의 한 달에 가까워졌다.
이제 그에게 남은 수명은 한 달 정도다. 그 안에 그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탁무자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곧 때가 온다. 멀지 않았어. 늦어도 사나흘, 빠르면 당장 오늘이라도…….’
모든 것을 버리고 전성기의 힘을 되찾은 탁무자. 그런 그의 눈엔 천기(天機)와 천명(天命)이 보이고 있었다.
‘아쉬울 것은 없다. 나는 나의 욕망으로 무수히 많은 책임을 후배들에게 떠넘겼어. 이제야 그 빚을 갚을 수 있게 되었으니 후련해야 마땅하건만.’
탁무자가 애틋한 눈으로 옥청을 바라보았다.
마기로 오염된 공기를 들이마시며 시시각각 혼원결의 힘을 불리는 제자다.
혼원결이라는 무공과 더없이 잘 어울리는 천재 도사. 무극의 영역에 오르기 전, 더 이상 오르지 못할 곳까지 도달한 제자의 힘은 분명 믿음직스러웠지만 스승으로서 더 해 주지 못한 것들만 생각난다.
‘조금이라면 괜찮겠지.’
우우웅.
탁무자의 손끝에 하얀 빛무리가 어렸다.
순간 연위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심안(心眼)은 탁무자의 손끝에서 일렁이는 저 빛무리가 무엇인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탁무자가 재차 옥청의 어깨를 짚었다.
새하얀 빛무리가 아무런 저항 없이 옥청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옥청은 그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저 청록색 안광을 빛내며 회정궁을 바라보는데, 장수의 위엄과 도인의 소탈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뭐라 말하려던 연위는 이내 한숨과 함께 입을 닫았다.
탁무자 본인만큼은 아니지만, 연위 역시 알고 있었다. 탁무자의 천명이 곧 완수될 것임을.
이승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려는 스승이라면 제자를 위해 못 해 줄 게 없는 법이다.
“연가주.”
“말씀하십시오, 선배님.”
“우리와 자네는 걸어온 길이 다르고 가는 길도 다르다네. 하지만 자네가 이룬 깨달음은 도가의 무맥(武脈)과도 상통하는 바가 있고 그 경지 또한 지고하니, 이 못난 말코의 현재와 미래를 읽을 수 있을 걸세.”
“…….”
“그러나 눈으로는 나의 눈을 볼 수 없는 법. 그것을 행하려거든 오랜 수행이 필요해. 나는 자네가 스스로를 돌아보았으면 하네.”
질책이 아닌 걱정이었다.
연위의 상단전 경지는 검선이라 불리는 탁무자보다도 높다. 그러나 경지가 높다고 나 자신을 잘 아는 것은 아닌바, 오히려 강한 힘에 휘둘리다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명심하겠습니다, 선배님.”
“하지만 자네가 나를 보았듯, 나 역시 자네에게서 보이는 것이 있네.”
탁무자가 빙긋 웃었다.
“어쩌면 나의 천명은 자네를 지키기 위해서도 존재할지 모르네.”
“예?”
“어디 자네뿐이던가. 지금껏 만인을 위해 희생치 못했으니, 나의 최후가 천하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할 뿐이야.”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탁무자는 스스로를 희생할 각오를 했다는 것.
연위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위험한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먼저 나서겠지만, 대선배가 천명을 불사르려 하고 있다. 그 길을 망치려 드는 것은 후배 된 도리가 아니었다.
“지금껏 수많은 열사가 목숨을 바쳤기에 우리는 이곳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목숨은 목숨으로 이어지는 법. 저 역시 저의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감당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탁무자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가 무당에 들어왔다면 무당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을.”
“그랬다면 저는 제 아들들을 보지 못했겠지요.”
“허허, 그도 맞구먼.”
그때였다.
두두두.
저 멀리서 두 기의 기마가 달려왔다.
순간 탁무자와 연위는 직감했다. 때가 도래했음을.
히히히힝!!
앞발을 든 기마의 투레질이 실로 우렁차다.
“마상(馬上)에서 인사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모용우입니다.”
연위가 포권을 취했다.
“소맹주를 뵙소.”
“감당키 어렵습니다, 가주님.”
탁무자가 웃으며 모용우를 보았다.
“소맹주인가.”
“검선 노선배님을 뵙습니다.”
“북쪽 전선으로 가는가?”
“그렇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린 탁무자가 모용우 옆에 있는 승현진인을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공기에 섞인 마기에 영향을 받을까 싶어 동행한 그였다.
“사백님.”
“장문 사질.”
탁무자를 보는 승현진인의 눈이 점점 떨려 왔다.
연위처럼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지만, 같은 산에서 같은 것을 배워 온 두 사람이다. 승현진인의 깨달음 역시 결코 낮지 않기에, 사백이 모종의 결심을 굳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시렵니까?”
“갈 때가 되었으면 가야지. 오히려 늦었네.”
“야속하십니다.”
“어차피 사질도 오게 될 길이라네. 회포는 그때 풀면 되지 않겠는가.”
“저의 깨달음은 사백님에 비할 바가 아니라서, 같은 곳에 이를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를 낮출 필요 없네. 사질은 내가 본 어떤 장문인보다 도사다운 사람이야. 사질을 보며 나도 많이 배웠네.”
승현진인이 한숨을 쉬며 옥청을 바라보았다.
혼원결에 완전히 몰입한 옥청은 주변 사람의 말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회정궁을 주시하는 그의 두 눈은, 어떤 의미로는 탁하기까지 했다.
승현진인이 고개를 숙였다.
“한 번씩 사백님이 그리워지면 옥청을 보겠습니다.”
“허허, 그러시게.”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래, 나중에.”
그렇게 모용우와 승현진인이 북쪽으로 향했다.
탁무자의 눈이 번뜩였다.
“자, 그럼.”
우우우우웅.
등에 멘 송문고검이 강렬한 울림을 발했다.
“뒤를 부탁함세, 연가주.”
연위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고개를 든 연위의 시야에 탁무자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