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419)
흑백무제 1419화(1419/1424)
1419화. 혈신진격(血神進擊) (5)
가득상은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이럴 수가!’
절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흠집 좀 낸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절벽의 핵(核)이 박살 나기라도 한 듯, 수직으로 쪼개지며 우르르 무너지는 모습이 실로 재앙을 방불케 했다.
“더 빨리 달려!”
선두에 선 모용우의 외침이 모두에게 전율을 일으켰다.
뒤에서 난적이 쫓아오는 걸 알고 혼신의 힘을 다해 펼친 신법 덕에 최고 속도로 달리는 중이었다. 한데 어쩐 일인지, 모용우의 목소리를 듣자 더 빨리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그들은 마치 존재를 몰랐던 또 다른 내공이라도 찾은 것처럼, 한층 빨라진 속도로 질주했다.
‘상단전.’
순우의 눈이 흔들렸다.
‘엄청난 영력이다. 마치 연 성주와 비슷하구나.’
연호정과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그가 연상될 정도로 굉장한 위엄과 영력을 보여 준다.
한 사람의 의지가 수천을 압도하고 있다. 영력이 한가득 실린 외침은 곧 모두의 한계를 초월케 했다.
‘진짜다.’
스스로 더 빨라진 신법을 체감하며, 순우는 생각했다.
‘소맹주는 진짜야. 무림맹주로 손색이 없다!’
무공의 문제가 아니다. 모용우의 판단력과 위엄은 진짜배기다. 지금 이 상태로 무림맹주의 위(位)에 올라도 맡은바 소임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다.
하지만 모용우의 놀라움은 순우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연가주님의 신안(神眼)은 말 그대로 신의 영역에 올랐다. 어찌 이런……!’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연위의 검격은 이 절벽의 핵을 그대로 쪼개 버렸다.
세상 모든 물체에는 중추 부위가 있고, 그것을 공략하면 손쉽게 파괴되는 법이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결이라 한다. 태어났을 때부터, 혹은 성장하면서 매 순간 달라지는 존재의 근원을 말함이다.
연위는 황궁 전투에서 포병들을 이끌고 산 하나를 붕괴시킨 적이 있다.
제아무리 강한 화포가 있대도 산을 붕괴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연위는 그것을 가능케 했다. 그가 지닌 심안(心眼)으로 산의 붕괴 지점들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그와 같다. 연위는 절벽을 무너트릴 수 있는 가장 취약한 지점을 파악했고, 그곳을 향해 여의파검을 꽂아 넣었다.
나아가 그 검격의 위력을 극대화시킨 것이 바로 모용군의 뇌정공이었다. 벼락의 힘으로 핵에 꽂힌 여의파검의 힘을 산 전체로 퍼트렸으니, 봉우리의 일각이 무너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번쩍!
연위와 모용군이 질풍 같은 속도로 병력 후방에 도달했다.
콰콰쾅! 콰르르릉!!
산이 무너지는 소리는 필설로 형용키 어려웠다.
마치 매끈한 빙벽이 수직으로 쪼개져 무수한 조각으로 떨어져 내리는 듯하다.
하지만 이 절벽은 빙벽이 아니었고, 산에는 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쿠콰콰쾅!
무너져 내리는 돌과 바위들 사이로 수십 그루의 거목들까지 쏟아진다.
취약해진 하단 절벽을 무너트리고 또 무너트리는 산의 분노.
산사태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쏟아지는 산사태가 사문향과 마인들, 나아가 연위와 모용군을 위시한 후방 병력 일부를 뒤덮으려 하고 있었다.
화아아아아악!
연가신단이 초고속으로 회전하며 영력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린다.
동시에 후방 병력의 신법 속도가 두 배는 더 빨라졌다. 연위가 영력으로 그들의 속도를 배가시킨 것이다.
모용군은 놀란 눈으로 연위를 바라보았다.
연위의 얼굴은 창백했다. 코에서도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과다한 영력 사용으로 무리가 간 것이다.
‘무시무시하군.’
무극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성천의 사왕들에게도 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 자신감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광경이었다. 연위의 영력은 당대 최강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백이 넘는 고수들의 속도를 배가시키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무거운 물체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보다 훨씬 섬세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진짜 놀라운 일은 따로 있었다.
뒤를 돌아본 모용군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말도 안 돼!’
사문향까지는 무리더라도 그가 데리고 온 마인 병력 대다수는 몰살시킬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는 범위니까.
그러나 사문향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엄청난 방식으로 병력을 보존했다.
우우우우우웅!!
시뻘건 마기가 불길처럼 타오른다.
거리가 수십 장은 떨어졌는데도 뇌기가 제멋대로 꿈틀거릴 만큼 압도적인 마기였다. 기운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절망감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그 마기, 그 절대적인 힘으로 사문향은 산사태를 막고 있었다.
쿠구구궁!!
거대한 반구형의 붉은 마벽(魔壁) 위로 바위와 나무들이 미친 듯이 쏟아지다가 부서져 내린다.
수천 명을 아우르는 내공의 방패다. 상상 초월의 범위에, 형용하기 힘든 무게를 그대로 받아 낼 만큼 엄청난 밀도를 지녔다.
신선의 힘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천하 어떤 고수도 산사태에 휩쓸리면 죽음을 면치 못할 터, 사문향은 기공 방출만으로 그 산사태를 막아 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위업이라 해도 모자랄 신기(神技)의 내공 방벽을 뿜는 것이 사문향에게도 부담스러워 보인다는 것.
사문향은 물론 그를 따르는 마인 병력의 진군 속도가 절반 이하로 줄어 버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사문향이 제대로 전진하지 못하니, 그들 역시 속도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 빨리 달려라! 이곳을 벗어나야 해!”
모용우의 위엄 넘치는 외침 다음엔 모용군의 다급한 일갈이 힘을 주었다.
“놈들의 발을 묶었다! 달려라!”
북부 병력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무리한 내력 운용으로 내상을 입은 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조차도 인지하지 못했다.
쿠구구궁!!
산은 아직도 붕괴되고 있었다.
가까이서 산사태가 쏟아지는 소리를 듣는 심경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공포스러웠다. 대자연의 분노 앞에 한 인간의 힘이란 얼마나 미약한 것인가.
‘하지만.’
연위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거의 쫓아올 수 없을 정도로 거리가 벌어졌다. 사문향 혼자라면 모르되, 놈이 휘하 병력을 포기할 리가 없다. 놈의 목적은 천하일통이니 당연히 교도들이 필요할 것이다.
‘단신으로 산사태를 방어하다니…… 그것도 병력 전체를…….’
지금의 자신이라면 어떨까?
‘불가능하다.’
애초에 저런 식으로 막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백번 양보해서 영력은 충분하다 하더라도, 진기의 밀도가 그것을 버틸 수 없다.
산사태가 쏟아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그 지역을 이탈할 순 있겠지만, 산사태를 힘으로 막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나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불가능해. 돌아가신 검선 노선배도, 저 권신께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건 무극의 상식에서도 벗어난 일이야.’
즉, 사문향은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성천의 절반? 아니다. 어쩌면 성천의 모든 고수가 덤벼들어도 이기지 못할 수도…….’
여의파검의 위력이 쏟아지는 산사태 이상의 위력을 낼 수 있을까?
한 점을 노리는 파괴력을 생각하면 당연히 더 강할 수 있지만, 전체 파괴력을 논하면 산사태를 이길 순 없다.
고로, 혼신의 힘을 다한 여의파검이라 해도 사문향의 내력 방패조차 뚫지 못할 확률이 높다.
그리고 그건 어떤 무극수의 공격도 마찬가지일 터.
‘괴물이 되었구나.’
사람들은 무극수를 두고 대문파 하나에 필적하는 일인 군단이라 칭한다.
사문향은 그런 무극수 열 명이 일시에 덤벼들어도 이기기 힘든 괴물이다. 개인의 힘이 몇 개 지역을 통합할 수 있을 만큼 강하다는 뜻이었다.
‘대책을 세워야만 한다. 놈이 향하는 어떤 곳이라도 지옥이 될 것이다. 심지어 놈은 이성도 멀쩡해.’
마기에 홀려 이성을 잃은 괴물이었다면, 당장의 피해는 커도 어떻게든 막을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문향의 이성은 멀쩡하다.
‘호정아.’
거리가 충분히 벌어졌다. 사문향 혼자라면 몰라도, 병력과 함께라면 절대 아군을 쫓아올 수 없다.
연위가 남쪽을 바라보았다.
‘과연 너라면, 저 괴물을 이길 수 있겠느냐?’
* * *
쿠르릉! 콰쾅!
사문향이 둘러치고 있는 진기 방벽 좌우로 흙과 바위, 돌덩이와 나무 잔해들이 마구 밀려 나갔다.
잠시 후.
“……흐음.”
사문향이 손을 휘저었다.
동시에 반투명한 붉은 마벽이 서서히 사라졌다.
“굉장하군.”
사문향은 감탄한 얼굴로 산사태의 잔해들을 둘러보았다.
“강한 공격으로 절벽을 무너트린 게 아니야. 이 봉우리의 결을 노렸어.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갔으면 봉우리 전체가 무너졌을지도 몰라.”
사문향 역시 심안을 이용, 물체의 결을 파악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연위처럼 찰나지간 모든 물체의 결을 일일이 다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실력이나 이룬 경지의 높고 낮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엄청난 눈이다. 영력도 영력이지만 눈이 날카로워. 심검(心劍)의 범위는 나나 연호정만 못해도, 어쩌면 그 깊이는 더 대단할지도 모르겠어.’
사문향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고금 제일의 마기를 품에 안고 큰 깨달음을 얻은 그는, 이제 저 연호정처럼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인연의 얽힘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연호정, 그놈의 아비인가.’
사문향의 눈이 깊어졌다.
그의 눈에 연호정은 파괴의 신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전설적인 악신(惡神) 아수라를 보는 듯했다.
한데 연위에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넘치는 정기(正氣)를 완벽하게 수습한 일대 검호. 심검의 능력을 극한까지 갈고닦은 희대의 검법가다.
하지만 그 핏줄 안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광기가 내재되어 있다.
‘씨도둑질은 못 하는 법이라 했지. 과연 그 망할 자식의 아비답군.’
그 자신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본인이 품고 있는 본질을.
그래서 더 놀라웠다.
‘저 정도 경지에 이르면 누구나 제 본질을 마주하게 마련이다. 한데도 놈은 저토록 맑은 정기를 품고 있어.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지?’
모순적인 존재다. 사문향은 연위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순간을 제외하곤, 그의 기운을 읽을 수조차 없었다.
상식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적어도 사마외도를 걷는 사문향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뭐가 됐든, 놈은 위험해. 어떤 의미로는 연호정 그놈보다도 더.’
사문향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이왕이면 변수는 줄이는 게 좋지.’
그는 자신이야말로 고금 제일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자신감과 자만심이 다르다는 걸, 연호정과의 싸움으로 새삼 실감했다.
온 천하를 불태울 힘을 지녔지만, 결코 막무가내로 활동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 혈교 본단에 파견된 사음의 세작이었을 때처럼, 충분히 궁리하며 움직일 것이다.
북부 병력을 먼저 증발시키려고 한 것도 그런 태도에 기인했다. 두 갈래로 나뉜 병력 중 하나를 먼저 치는 것이 합리적이니까.
그리고 지금, 또 다른 수가 생겼다.
“놈들이 도망쳤으니, 이제 우리가 남하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사문향이 단향에게 명을 내렸다.
“일각을 쉰 후, 오던 길을 돌아가 남쪽으로 치고 내려갈 것이다.”
“산서에 모인 무림맹 병력을 노리려 하십니까?”
“그럴 리가.”
사문향이 피식 웃었다.
“그보다 더 탐스러운 것을 노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