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53)
153화. 악명과 협명 (3)
파아아앙!
한없이 부드럽고 느린 검결이 대기를 희롱했다.
형(形)은 느리지만 검 끝에서 올올이 풀려나오는 진기의 양은 지극히 일정했다.
‘검과 기(氣)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 하지만…….’
무공의 형(形)을 실전에 맞게 완성하는 것은 결국 시전자의 육체적 능력과 내공의 운용 방식에 달려 있다.
고수가 저잣거리 건달패들의 주먹질과 똑같은 형(形)을 쓰고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단련된 육체와 내공의 섬세한 운용으로 속도와 날카로움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삐걱거리는구나.’
검첨(劍尖)이 그리는 궤적을 보는 모용우의 눈에 아쉬움이 담겼다.
‘내공 운용은 충분하지만, 육체가 다듬어지지 않았어. 하체는 탄탄하지만 팔이 뻗는 각도에 미세한 오차가 생긴다. 어깨가 문제로군.’
자신이 구사하는 무공을 마치 제삼자가 보듯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안목.
절강지부장으로서 무공보다 업무에 치중했던 삶을 살았음에도 끊임없이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실력도 좋지만, 안목은 그보다 훨씬 더 날카로웠다.
느릿하게만 움직였던 모용우의 검이 일순간 불가사의한 속도를 보였다.
타아아앙!
땅거죽을 뒤집어 놓는 힘찬 보법에 허공을 가르는 강검(强劍)이 검형의 그물을 만들어 냈다.
무섭도록 빠르고 정교한 검이었다. 거기에 강철처럼 단단한 힘까지 깃들었다.
지극히 수준 높은 무도(武道)를 구현해 내는 그였다. 육체의 단련도가 부족할 뿐, 깨달음만큼은 실력 이상의 경지를 구축했다.
폭발적인 심폐 능력을 이용, 일각이 넘도록 건곤백팔검해(乾坤百八劍解)를 연마하던 모용우가 검을 멈추었다.
“후우우우.”
몸 전체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프다.’
신체 곳곳의 근육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그나마 관절이 상하지 않은 게 다행일까.
‘조금 더 효율적인 육체 단련이 필요해. 당분간 검은 내려놓고 몸과 내공을 돌아봐야겠어.’
그때, 한옆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짝짝짝.
모용우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모용군이 있었다.
“대단했다.”
“형님.”
모용군의 얼굴에 드리워진 놀라움은 진짜였다.
“하루하루 무공 연마에 힘쓰는 걸 모르지 않았다만, 언제 이리 성장한 것이냐. 검해(劍解)의 경지가 벌써 검해(劍海)에 이르렀구나.”
모용우가 씁쓸하게 말했다.
“깨달음은 있지만, 몸이 그것을 따라 주지 않는군요. 멀어도 한참 멀었습니다.”
“그리 말하지 마라. 건곤의 무공을 익힌 지 한 해가 채 되지 않았거늘 벌써 그 정도다. 너의 재능이 몹시 신통하구나.”
물론 그간 익혀 온 무공과 경험이 워낙 뛰어났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걸 감안해도 모용우의 성장은 기가 막힐 정도였다.
모용군이 맑은 미소를 지었다. 기특함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만검(慢劍)의 수련 후 쾌검(快劍)과 강검(强劍)의 연환이라. 전통적인 수련 방법이지만, 그만큼 육체가 받는 부담이 심해지기 마련이다. 수련도 좋지만 몸도 잘 챙겨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래.”
모용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한데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무성전 회의가 벌써 끝났습니까?”
“그렇다.”
모용군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의 모습을 본 모용우는 확신했다. 형님이 자신에게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할 말이 무엇인지도 모용우는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우야.”
“말씀하십시오.”
“당문의 처자는 언제 만나 볼 생각이더냐?”
모용우의 얼굴에 난감함이 번졌다.
“사흘 뒤에 탕마군이 창설됩니다. 일단 그전까지는 제 개인의 무(武)와 수하 관리에 관한 사항을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내 너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모용군의 눈이 묘한 빛을 발했다.
“하지만 당가주와 그리 협의를 본 이상, 이왕이면 빨리 만남을 가졌으면 한다.”
잠시 침묵하던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면, 창설식 전날 만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모용우는 자신이 없는 일은 쉽게 입에 담지 않는다. 만나겠다고 했으니 분명 만날 것이다.
“그래, 그리하도록 하자.”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형님께서 고생하셨습니다.”
모용군이 호탕하게 웃었다.
“이놈아, 그걸 안다면 진즉 얼굴을 보지 그랬더냐.”
“죄송합니다.”
“장난이다. 만나 보고, 정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말하거라. 너와 가문을 생각하여 만든 자리긴 하다만, 당사자가 싫다는데 기어이 연을 만들 생각은 없느니라.”
그것은 모용군의 진심이었다.
당가의 힘은 분명 매혹적이지만, 모용군은 당가보다 모용우가 더 중요했다. 자신의 사람이기도 하거니와 아직 제 실력을 보여 주지 않은 지금만 해도 깜짝 놀랄 성장을 이뤄 내지 않았는가.
믿을 수 없는 힘을 취하는 것보다 믿음직한 사람을 키우는 게 백배는 낫다. 모용군의 권력 기반이 유독 안정적인 이유였다.
모용우가 말을 돌렸다.
“하면, 멸사군은 언제 입맹하는 것입니까?”
모용군의 눈빛이 대번에 서늘해졌다.
“내일 정오쯤 도착한다고 하더구나.”
“그렇군요.”
“전에 말했다시피 멸사군이 제법 큰 공을 세웠다. 설마하니 멸사군이 그리 빠르고 과격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어.”
모용우는 담담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일전, 멸사군이 출맹하기 전날 연 군장과 직접 대화를 나눠 보았지요.”
“그래, 너 역시 연호정 그 녀석을 보며 많이 놀랐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후기지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무공도 그렇거니와 깜짝 놀랄 만한 안목을 지녔더군요. 필시 안목 못지않은 추진력도 갖춘 인재라 생각했지요.”
“네 말이 옳다. 내가 그 어린 녀석을 괜히 신경 쓰는 게 아니야.”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내일 멸사군이 입맹하면, 다시 한번 만나러 가 보겠습니다.”
모용군의 얼굴에 뜻밖이란 기색이 어렸다.
“연호정을 만나러 간다고?”
“그렇습니다.”
“녀석을 만나서 어쩌려고 그러느냐?”
“경쟁자이지만 배울 점이 있다면 배워 둬야겠지요. 또한, 세상에 나간 그가 얼마나 발전해서 돌아왔는지도 궁금합니다.”
“허어.”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 하였습니다. 만나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만나겠다는데 내 어찌 막을 수 있겠느냐. 다만 조심하거라. 그놈은 적이라고 생각한 사람을 철저하게 뒤흔들 줄 아는 놈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용우의 눈이 반짝였다.
“몇 달간 형님께 제대로 된 성과를 보여 드리지 못했으니, 탕마군 창설식의 재물 겸 기물 하나는 얻어 오도록 하겠습니다.”
* * *
“오! 무림맹이다!”
“와, 얼마 만이야!”
“……무림맹 보고 이렇게 설렐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뭐야.”
“크흡, 눈물이 다 나는구먼.”
대별산맥을 타 넘어 마침내 무림맹 근교에 진입한 멸사군 군병들의 얼굴은 환희로 가득했다.
지난 몇 달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악랄한 흑도 방파들을 휩쓸었다. 보람이 있는 일이었고 덕분에 크게 성장했지만, 알게 모르게 정신적 피로가 쌓였던 것이다.
무림맹에 들어가면 적어도 닷새는 푹 쉴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표정이 밝은 이유였다.
묵비가 작게 속삭였다.
“애들이 아주 기쁜가 봐요.”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렇겠지. 허구한 날 노숙에,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살기 넘치는 적들과 싸워 왔으니.”
“긴장을 푸는 건 좋지만, 다시 정신 무장을 시키려면 꽤 힘들겠어요.”
연호정이 뜻밖이라는 얼굴로 묵비를 보았다.
“별일이네?”
“뭐가요?”
“정신 무장이라…… 어째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흥. 나도 항상 긴장하면서 살거든요?”
“아니,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고. 그냥 네가 군병들 정신 상태까지 신경 쓰는 게 의외라서 말이야. 너도 슬슬 부장(副將)직에 익숙해졌구나?”
묵비가 고소를 지었다.
“긴장 안 하면 다치잖아요. 그렇다고 멸사군에서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치고 죽는 것보다는 힘들어도 긴장하고 있는 게 낫죠.”
연호정의 미소가 짙어졌다.
“짜식, 다 컸다.”
“누누이 얘기하지만 내 나이가 연 공자보다 많아요.”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경력이 많다고 일을 더 잘하라는 법은 없죠.”
“거기서 말발이 더 늘 수도 있는 거였군.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야.”
묵비가 연호정의 손을 힐끔거렸다.
“손은 어때요?”
“엉?”
“얼마 전에 찢어졌었잖아요. 아직 붕대를 감고 있는 걸 보니 덜 나았나 본데요?”
“거의 다 나았어.”
“생각보다 회복이 느리네요?”
연호정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내상 회복이 느렸던 것은 흑암제 시절보다 내공량이 적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손바닥의 상처 회복이 느린 것은 그의 육체가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내상과는 다른 문제였다.
‘수면 시간이 극단적으로 적었다.’
벽라진결은 뛰어난 무공이다. 사신무는 개세의 신공 소리를 들어도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그걸 익힌 연호정은 어디까지나 사람이었다. 무공의 극치를 이루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다면 모를까, 휴식은커녕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생활이 이어진다면 당연히 몸이 곯을 수밖에 없다.
묵비가 한숨을 쉬었다.
“돌아가서는 푹 자요. 맹은 안전하잖아요.”
“부끄럽다야.”
“부끄러울 게 뭐 있어요. 오히려 내가 다 놀랐네요. 연 공자가 그렇게 군병들을 끔찍이 위할 줄은 몰랐어요.”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내가 이럴 줄은 몰랐어.”
흑도의 무사들을 다룰 때의 그는 칼날과 같았다.
애초에 멸사군처럼 훈련을 시킨 적도 없다. 세력을 규합하면 곧바로 전쟁을 벌였고, 와중에 죽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냉혹하고도 잔인한 방식이었다. 흑도에서의 생활이, 극단적인 폭력의 세계가 연호정의 성격을 흉악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귀한 후, 마음이 무척이나 안정적으로 변했다.
연호정은 이 긍정적인 변화의 중심에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긍정적이라…… 그래, 사람답게 살 거라면 이 변화는 분명 긍정적이지.’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연호정의 눈이 무섭도록 깊어졌다.
‘나는 과연 사람으로서 그들의 침공에 방비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시절의 괴물이 되어야만 하는가.
그때, 제갈아연이 입을 열었다.
“언니.”
“네?”
“헤헤, 지금은 사석인데.”
“아…….”
묵비는 당혹스러웠다. 제갈아연의 친근한 호칭이 아직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들어가면 뭐 할 거예요? 오늘은 푹 쉬실 건가요?”
“그, 그럴 생각인데…….”
“크게 안 피곤하면 저랑 술 한잔할래요?”
“술?”
묵비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그녀는 지난번에 극심한 숙취를 겪은 이후 술을 멀리했다. 내공으로 주기를 몰아내면 그뿐이지만, 머리가 아프고 몸이 둔해지는 그 감각 자체가 불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제갈아연을 보니, 차마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적당히만 마신다면.”
“음하하하! 좋아요! 울 아버지한테 인사만 올리고 바로 갈게요! 꼭 마셔야 해요!”
“으응.”
히죽거리던 제갈아연이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은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퍽 순진한 표정이었다.
제갈아연의 표정이 대번에 심드렁해졌다.
“왜? 너도 마시게?”
“정신머리는 안녕하십니까? 내가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너희랑 마셔?”
“썩을 놈.”
“공석이다.”
“사석이야, 인마!”
연호정은 다시 집결하는 날, 멸사군의 군기부터 엄정하게 세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팽만호가 슬금슬금 연호정 옆으로 다가왔다.
“그럼 저랑?”
“가서 자라.”
“그러지 말고 한잔합시다, 형님.”
“형님이라고 하지 마, 새꺄!”
시끌벅적한 귀맹이었다. 아닌 척하지만, 묵비나 제갈아연, 팽만호도 오랜만의 휴식에 은근히 들뜬 것 같았다.
그렇게 웃고 떠들며 가다 보니 어느새 무림맹 외성에 다다랐을 때였다.
“멸사군장 연호정, 맞나?”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청룡대문 옆에, 냉막한 인상의 중년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