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62)
162화. 암투(暗鬪)의 본질 (2)
여인은 아름다웠다.
그 나이가 이미 이립을 코앞에 두었지만, 서늘하면서도 맑은 두 눈에 소녀의 순수함을 담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한 몸에 맵시 좋은 옷을 걸치니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인다. 불처럼 뜨겁고 눈보라처럼 차가운 분위기가 놀랍도록 잘 조화된 여인이었다.
세상은 이 여인을 사천의 봉황, 암천신녀(暗天神女)라 부르며 경외하였다.
“해서, 어제 만났느냐?”
냉막함과 단호함이 느껴지는 음색이다. 부전여전, 딸의 분위기는 아버지 특유의 성정에서 물려받은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당관의 딱딱한 말에 당상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네.”
“어떻더냐?”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사람이더군요.”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의하기 힘든 사람이다? 무슨 의미인지 쉬이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그 말에 대단한 의미를 두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어떻게 보았느냐가 아니라, 혼인이 성사되느냐 마느냐니까.
“조만간 그쪽에서 답을 줄 것이다. 정숙하게 기다리고 있거라.”
“네.”
“혹여나 그쪽에서 혼사를 거부할 경우, 그 외에 다른…….”
“아버지.”
“말하거라.”
당상아가 미소를 지었다.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투명한 웃음이었다.
“혼자 있고 싶어요.”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물끄러미 딸을 보던 당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武)가 아니더라도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당관이 방에서 나섰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당상아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끄으으응! 아, 피곤하다.”
턱을 괸 그녀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흠, 날이 아주 좋네.”
그녀의 두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거의 평생을 사천에서 살아온 그녀였다. 하남성은 물론, 대별산맥 역시 처음으로 와 보는 곳이었다.
그래서일까? 몇 달 동안 맹내에 있었음에도 마치 처음 왔을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뚜렷한 사계절만큼이나 다른 경치를 보여 주는 대별산의 분위기도 그녀의 흥을 돋웠다.
“오늘은 뭘 하면서 놀까?”
아버지의 강압으로 당장 혼인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즐거움을 잃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즐기느냐였다. 한번 흘러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으니, 하루하루를 신나게 보내야 한다는 것이 당상아의 생각이었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는다.
원치 않는 삶을 살게 될지라도, 추억을 벗 삼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응?’
상쾌한 기분으로 경치를 구경하던 당상아의 눈에 저 멀리 누군가가 포착되었다.
‘저 사람은……?’
당상아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어렸다.
‘이 시간에 왜 저기에 있지? 창설식으로 한창 바쁠 텐데?’
다름 아닌 모용우였다. 탕마멸사의 유군 중 탕마군의 수장이자, 금일 정오에 무성전 앞에서 열릴 창설식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남편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
‘흥미로운데?’
모용우와는 차 한잔하며 짧게 대화를 나눈 게 전부였다.
고작 그 정도로는 사람을 파악할 수 없다. 성향을 짐작할 순 있어도 그 사람의 전부를 알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물론 당상아는 모용우에 대해 뭔가를 알아낼 생각이 없었다. 모용우라서가 아니라, 그냥 누군가에게 관심 자체가 없었다.
그녀는 당가의 여식으로서, 가문의 여인에게 내려진 가혹한 숙명을 일찍이 받아들였다.
상대가 누구라도 상관없다. 사지 멀쩡하고 성격만 좋으면 된다.
‘……흐음.’
다만, 그 상대가 보이는 의외의 언행에는 흥미를 느낄 수 있다. 말하자면, 순수한 호기심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모용우에게 호기심을 느꼈다.
암기의 달인으로서 극한까지 수련한 안법(眼法)이 모용우의 미세한 표정 하나하나를 전부 꿰뚫어 보았다.
‘엄청 심란해 보이는데? 설마 나 때문은 아닐 테고.’
모용우는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상대에게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자신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뭐, 할 일도 없으니까.’
느낌이 왔다.
재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흥미를 유발할 만한 사건을 목격할 것만 같은 느낌이.
우웅!
당상아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번져 나온다 싶은 순간.
사락.
어느새 그녀의 몸이 창밖으로 쏘아졌다.
* * *
“후우, 귀찮아.”
깨끗한 백의 위로 질 좋은 장포를 걸쳤다.
너무 부드러워서 오히려 위화감이 느껴지는 재질이었다. 많은 사람이 고급스럽다며 입을 모아 칭송할 만한 옷이지만, 연호정에게는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옷이 날개네요.”
“괜찮아 보여?”
“평소에도 그렇게 입고 다녀요.”
연호정이 묵비를 보았다.
“너도 제법인데?”
연호정도 연호정이지만, 궁장 차림의 묵비는 실로 굉장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화장까진 하지 않았지만, 그게 오히려 순수한 매력을 한층 살려 주었다. 곱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 궁술과 신법으로 단련된 탄탄한 몸매가 어떤 사내의 눈길도 붙잡을 만큼 매혹적이다.
그러나 묵비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이게 뭐예요.”
“뭐가? 예쁘기만 하구만.”
“움직이기 힘들어요. 이런 옷을 입으면 용비순행(龍飛瞬行)의 속도가 느려질 거라고요.”
연호정이 혀를 찼다.
“조금만 참아. 창설식 끝나는 대로 갈아입으면 돼.”
“휴우.”
연신 한숨을 내쉬는 묵비.
연호정은 문득 생각난 바가 있어 고개를 돌렸다.
“어이!”
“예? 아, 예!”
“너는 옷 안 갈아입냐?”
옥청이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무릇 도사란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추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평소에 하시고요, 창설식이니까 나름…… 야! 아니 근데 너는, 어제부터 왜 여기서 아장거리는 거야?”
그렇다.
승현진인이 돌아간 후, 옥청이 찾아왔다. 옥청은 별말도 없이 파군각 안에서 어슬렁거리며 연호정의 눈치를 살폈다.
그게 전부였다. 뭔가 말을 건다거나 비무를 요청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만 있었다.
옥청이 헛기침을 했다.
“그냥 파군각 인근의 기운이 좋은 것 같아서요.”
“무당파에서 개소리도 가르치더냐?”
“그건 좀 너무하신 말씀입니다.”
“시끄러워! 너도 얼른 가서 옷 갈아입고 무성전으로 가! 반 시진밖에 안 남았다.”
“그냥 이대로 가겠습니다.”
연호정이 말없이 주먹을 들었다.
옥청의 표정이 대번에 비굴해졌다.
“하긴, 대외적으로 보여 줘야 할 격(格)이라는 것도 있으니까요. 이따 뵙겠습니다.”
파악!
옥청이 무서운 속도로 사라졌다. 내상도 전부 나았는지 신법 속도가 그 어느 때보다도 빨랐다.
연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에 정상인이 없어, 정상인이.”
문득 연호정이 묵비를 보았다.
묵비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참으로 오묘한 그 눈빛은 ‘그러는 넌 정상이고?’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눈구녕 콱 찔러 버리기 전에 고개 돌려, 인마.”
“세상에.”
“뭐? 뭐!”
“됐거든요? 참나, 힘 세다고 이제 막 괴롭히네.”
“누가 들으면 예전에는 안 괴롭힌 줄 알겠다.”
“할 말이 없다, 진짜.”
연호정이 낄낄거렸다.
그때였다.
“엉?”
연호정이 파군각 대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지?’
익숙한 기운 하나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안 본 새에 무공의 경지가 가파르게 성장한 또 하나의 천재였다. 너무 급속도로 성장한 탓인지, 기운을 갈무리하지 못해 그 존재감을 더욱 선명히 드리우는 자였다.
잠시 후.
“들어가도 되겠는가.”
연호정이 직접 대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모용우가 있었다.
“어쩐 일로?”
“나랑 얘기 좀 하세.”
물끄러미 모용우를 보던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방으로.”
연호정의 이 층 방으로 올라온 세 사람.
모용우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창설식이 취소되었네.”
“뭐?”
연호정은 물론 묵비도 깜짝 놀랐다.
“취소되다니? 무슨 말이야, 그게?”
“정확히는…….”
모용우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연호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멸사군은 오지 말라고 하던가?”
“……그렇다네.”
“흐음.”
그 대답 하나로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의자에 등을 묻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모용군이 또 수작을 부렸군.”
모용우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렸네만, 끝까지 반대하시더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연호정 때문이었다.
내성 광장의 연무장에서 연위와 치열한 비무를 선보인 그였다.
거기서 끝났다면 모르겠지만, 심지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무종지벽을 넘어섰다.
무림맹만이 아니라 천하가 놀랄 일이었다. 연호정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약관이 갓 넘은 나이에 초절정의 무도(武道)에 이른 자는 결코 흔치 않았다.
당대 무림을 대표하는 젊은 천재들, 일룡삼봉마저도 아득히 넘어선 괴물 같은 재능의 소유자.
“창설식의 주인공이 내가 될까 싶었던 거지.”
“그렇다네.”
연호정이 못 말린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뭐, 옹졸하다면 옹졸한 대응이지만 분명 필요한 일이지. 나는 모용군을 이해해.”
“면목이 없네.”
“뭘 면목이 없어. 괜찮아.”
진심으로 괜찮은 것 같았다. 연호정의 얼굴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저런 표정을 보여 주니 그래도 안심이 된다.
살짝 미소 짓던 모용우가 장난처럼 툴툴거렸다.
“그러게 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비무를 했나? 강호에서는 실력의 삼 할을 숨기란 격언도 있거늘.”
“음?”
“형님이 자네를 더 경계하게 되지 않았는가.”
연호정이 코웃음을 쳤다.
“개뿔, 애초에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인간이야. 이미 서로 죽고 죽이는 사이인데, 거기서 더 경계하게 만든다고 무슨 의미가 있어?”
“물론 그것도 그렇지만…….”
“당신도 기억해 둬. 암투(暗鬪)를 벌인다고 해서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숨길 필요는 없어. 오히려 그런 것까지 신경 쓰다가는 분명 지칠 때가 오기 마련이다. 그때 역공을 맞게 되면, 그게 더 치명적이지.”
“그런가?”
“숨기는 패가 있으면, 당당하게 드러내는 패도 있어야 해. 그리고 난 적에게 나의 전력을 숨길 생각이 없어.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중요한 건 적의 성품이고, 흘러가는 상황이다.
연호정이 초절정고수가 되었다고 한들 홀로 한 세력을 감당할 수는 없다. 세력 싸움에서 실질적으로 얻은 게 없다는 말이다.
혹 성천십삼좌의 경지에 도달했다면 또 모를까, 이 정도로는 대국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다.
상황이 악화될 가능성이 있었다면, 아버지께서 섭섭해하시는 한이 있더라도 연호정이 먼저 포기했을 것이다.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참 여러모로 대단하네.”
“새삼?”
“하하하!”
심각한 얘기를 전하러 왔는데, 막상 연호정과 대화를 나누니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된다.
모용우가 은근히 물었다.
“그나저나 정말 놀랍구먼. 나 역시 제법 무재(武才)를 타고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우님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그때,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아우? 당신, 아우도 있었나?”
이건 또 웬 섭섭한 소리란 말인가.
장난치지 말라고, 당당하게 만나러 왔다고 말하려던 모용우는 순간 눈을 번뜩였다.
의자 팔걸이에 놓인 연호정의 손이 천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우웅.
순간 건곤의 진기가 첨예하게 일어나며, 오감을 칼날처럼 날카롭게 세웠다.
‘사람?’
누군가가 있다. 그것도 놀라운 고수가.
“……연배가 어리니 아우님이지. 안 그런가?”
“틀렸어. 나는 모용가 사람과 친분을 맺고 싶은 생각 따위, 절대 없다.”
“허허, 그 말은 좀 섭섭하군.”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말일세.”
“말해.”
“자네, 고양이 키우나?”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나는 당신 고양인 줄 알았는데?”
“그렇구먼.”
모용우가 환하게 웃었다.
“누구 고양이인지 확인해 보세.”
“묵비.”
순간 묵비의 장력이 천장을 후려쳤다.
콰앙!
천장이 부서지며, 한 인영이 낭패한 몰골로 모습을 드러냈다.
당상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