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69)
169화. 매듭을 짓다 (3)
“오셨소이까?”
당관은 말없이 의자에 앉았다.
주인이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앉는다. 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이었지만 모용군은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차 한잔하시겠소?”
“차는 됐소.”
“하면?”
당관이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오량액 남았소?”
모용군이 밭은기침을 뱉었다.
“오량액은 다 마셨고, 검남춘은 있소이다.”
“그럼 그거나 하나 비웁시다.”
“그럽시다.”
잠시 후, 두 사람이 잔을 마주하고 앉았다.
모용군이 당관의 잔에 술을 따라 주며 물었다.
“이 시간에 어인 일이시오?”
“짐작하고 있지 않소?”
“물론 짐작은 하오만.”
자신의 잔까지 채운 모용군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연호정, 그 녀석 때문에 오신 게요?”
당관이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그놈 정체가 뭐요?”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씁쓸함이 엿보이는 미소였다.
“언제고 그런 질문이 나올 줄 알고 있었소. 그래서 그에 대한 대답도 미리 준비하고 있었지.”
“…….”
“잘 모르겠소.”
“무슨 답변이 그렇소?”
“사실이오. 놈은 벽산연가의 장남이자 홀로 구주명가를 공략하려 했던 미친놈이며, 당대 무림 최연소로 무종지벽을 돌파한 고수요.”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 외에는 모르겠소. 온갖 정보원들을 동원해 조사해 봤지만, 놈의 과거는 지나치게 평범했소.”
정확히는 호부견자의 전형이었다.
이처럼 괴물 같은 놈으로 성장할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놈이었다. 그래서 평범하다고 말한 것이다.
“해서, 당가주께서는 놈을 어찌 보셨소?”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괴물인지는 모르겠고, 능구렁이는 확실한 것 같소이다.”
“허허허.”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능구렁이지. 용보다 크고 범보다 사나운 능구렁이. 하지만 그것조차 그놈의 본모습은 아닐 거요.”
“무슨 말이오?”
“놈은 상황과 상대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놈이오. 쥐새끼 앞에선 고양이처럼 발톱을 세울 것이고, 고양이 앞에선 들개처럼 이빨을 드러낼 것이며, 들개 앞에선 표범처럼 한순간에 달려들 거요.”
“…….”
“놈이 당신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 줬을지 대략 짐작이 가오. 필시 상상도 못 할 과격함을 보여 주었을 거요.”
당관의 콧잔등이 파르르 떨렸다.
살려서 보내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열불이 치밀어 올랐다. 정말이지 자신의 앞에서 그따위 망발을 늘어놓는 놈은 본 적이 없었다.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내게도 가끔 그러더이다. 다만, 당신에게 보여 주었던 모습과는 확실히 다르겠지.”
“한 가지는 알겠더군.”
“무엇을 말이오?”
시원하게 잔을 비워 낸 당관이 독기 어린 눈으로 말했다.
“위험한 놈이라는 것.”
“…….”
“놈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르겠소. 알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놈은, 원하는 걸 손에 넣기 위해서는 전쟁까지 불사할 놈이오.”
“잘 보셨소.”
“그리고…….”
“그리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직접 잔을 채운 그가 지나가듯 말했다.
“어쨌든 당분간 놈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소.”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나쁘지 않아.’
당관은 거친 사람이다.
거칠지만 치고 빠질 때를 분명히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사천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폭군에게는 이런 면모도 있는 것이다.
‘천하의 주인으로는 어울리지 않지만, 한 지역의 패주 자리를 지키기에는 넘치도록 충분한 사람이다. 제어만 잘하면 분명 큰 힘이 될 거야.’
그는 당관과 손을 잡았지만,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생각은 없었다.
최우선 순위는 무조건 자신의 꿈이다. 다만, 먹다 남은 살코기 정도는 당관에게 가장 먼저 건네줘도 괜찮을 듯싶었다.
크게 엇나가지만 않는다면.
모용군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소를 머금었다.
‘새삼 아쉽군.’
천하의 육대세가 가주 둘이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 자체가 연호정이 희대의 걸물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생각해 보면 정말 기가 막힌 일이다.
이제 막 약관을 벗어난 젊은 청년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정말 아쉬워. 놈이 나를 위해 움직여 준다면 일이 훨씬 더 쉬워질 것을.’
괜스레 입맛을 다시던 모용군이 입을 열었다.
“혹, 놈이 무언가를 요구하진 않더이까?”
당관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알았소?”
“역시 그랬군.”
모용군이 잔을 비우고 말을 이었다.
“내게 당신과의 자리를 주선해 달라고 했을 때 생각해 보았소. 굳이 이 시점에 다리를 놔 달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지를.”
“…….”
“둘 중 하나 아니겠소? 당신을 몰아붙이려 했거나, 아니면 당신에게서 뭔가를 얻어 낼 속셈이었거나.”
“…….”
“사천당가의 주인을 작정하고 몰아붙일 생각이었으면 홀로 찾아갔을 리가 없지. 그렇다면 자연스레 하나만 남소. 놈은 당신에게서 뭔가를 얻어 내려고 간 거요.”
다르구나.
당관은 생각했다. 확실히 모용군은 자신과 다르다고.
자신이나 모용군이나, 세파에 찌들 대로 찌들었다. 하지만 그 거친 세상과 싸우며 정점에 오르는 동안, 각기 다른 능력을 발전시켰다.
자신이 본능과 힘으로 밀어붙이는 데에 능하다면, 모용군은 지략과 권모술수에 능했다.
누구의 능력이 더 낫다고 하긴 어렵다. 위급한 상황에선 자신이, 암중의 정쟁이 필요할 때는 모용군이 더 나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가의 장남 놈은 자신과 모용군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 만큼 여러 방면에 능하다는 뜻이리라.
‘괴물이라.’
모용군이 물었다.
“해서, 놈이 무엇을 요구하더이까?”
당관이 쓴웃음을 지었다.
“본가 장인들의 실력을 잠시 빌려 달라고 하더이다.”
* * *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가득상은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세상에, 철쇄(鐵鎖)를 이렇게 공들여 만든 건 처음 보네.”
촤르르륵.
기다란 쇠사슬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놀랍게도 사슬은 흑회색을 띠고 있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쇠사슬과 같은 모양이면서도 기묘한 광택이 나서 그런지, 한눈에도 비범해 보였다.
가득상이 연호정을 힐끔거렸다.
연호정은 홀린 듯 철쇄를 보고 있었다.
“마음에 드쇼?”
“엄청.”
“그래 뵈네.”
연호정이 철쇄 끝을 잡고 힘차게 휘둘렀다.
촤르르르륵!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기다란 철쇄가 허공을 날았다.
연호정의 손목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촤르륵! 촤르르륵!
가득상의 눈이 커졌다. 묵비 역시 놀란 얼굴로 철쇄를 바라보았다.
‘움직인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철쇄의 끝을 잡고 손목만 가볍게 틀었을 뿐인데 제 알아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용을 보는 것 같다. 그렇게 굵지 않은데도 힘차고 역동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어떻게?’
마치 신비한 요술(妖術)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강한 내공을 퍼붓지 않았는데도 기묘한 위화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철쇄를 다루던 연호정이 일순 팔을 크게 휘둘렀다.
쐐애애애액! 퍼어억!
철쇄 끝이 담벼락 앞 작은 나무의 몸통을 꿰뚫었다.
굉장한 섬세함이었다. 길이만 오 장(五丈)에 가까운 철쇄를 절묘하게 휘둘러 원하는 목표물을 타격했다.
그것도 휘감은 게 아니라, 철쇄 끝을 쏘아 내 뚫어 버렸다.
엄청난 관통력이었다.
“흐음,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가? 반 박자 늦구만.”
가득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익숙하지 않은 거라고?”
“음?”
“당신 편법(鞭法)도 배웠소? 그 기다란 쇠사슬을 어떻게 그리 유연하게 다루는 거요?”
제아무리 무공의 고수라도, 처음 본 무기를 능숙하게 휘두르기란 결코 쉽지 않다.
특히나 채찍이나 쇠사슬, 연호정의 주병기인 대부(大斧)나 암기 같은 것은 철저한 연마 없이는 수월하게 다루기 힘들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오. 이 정도로는 실전에서 써먹을 수 없소.”
적당히 유연하게 다루는 정도.
딱 그 정도가 전부다. 자신보다 약자에게라면 어찌어찌 통할지 몰라도 동등, 혹은 그 이상의 강자라면 맨손보다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연호정은 드물게 흥분했다.
‘굉장한 병기다. 예전에 휘둘렀던 쇠사슬과는 손에 감기는 느낌부터가 달라.’
과거, 풍뢰부와 함께 강철을 엮은 쇠사슬을 휘둘렀더랬다.
그때 들고 다녔던 쇠사슬은 난전(亂戰)에 특화된 병기였다. 나아가 풍뢰부의 위력을 극대화하는 필살(必殺)의 일격이 아니고선 별로 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 철쇄는 달랐다.
‘예상보다 훨씬 더 유연하다. 예전 철쇄보다 몇 배는 더 단단하면서도 무척이나 유연해.’
이 정도 병기라면.
거슬리는 부분이 하나도 없는 이 쇠사슬이라면, 일대일 단기전에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호정은 상자 안에 동봉된 서신을 펼쳤다.
근래 굉장한 명성을 쌓고 있다고 들었네. 만일 이 물건을 더 빨리 만들었다면, 자네의 고생이 좀 덜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너무 늦게 건네줘서 미안하네.
선한 분이다.
마치 편일강이 직접 말하는 것처럼, 서신에 적힌 글귀는 친근함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자부심이 느껴졌다. 아마 광룡부를 만들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으리라.
교룡쇄(蛟龍鎖)라는 이름을 붙여 보았네. 물론 내 임의대로 지은 이름일세. 전에 말했듯, 교룡쇄에는 유상귀철(柔像鬼鐵)이라는 귀물이 들어갔네. 내공의 질이나 강약에 따라 늘어나기도, 줄어들기도 하는 천하의 기물이야. 어렵겠지만, 자네라면 잘 다룰 수 있을 거라 믿네.
연호정은 두 손으로 교룡쇄를 잡고 내공을 쏟아부었다.
우우우웅!
놀랍게도 손에 잡힌 쇠사슬 부분이 서서히 어두워지더니, 조금씩 조금씩 늘어났다.
연호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굉장해.’
유상귀철이라는 귀물은 흑암제 시절에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금기(金氣)의 변화를 내공으로 제어, 물성을 변화시킨다니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다루기 더 어려울 거야. 거리감이 잡히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제대로만 다룰 수 있다면 정말 활용도 높은 무기가 될 것이다.
치리리리링.
팔을 직각으로 만들어 교룡쇄를 감은 그가 동그랗게 정리된 사슬을 평상 위에 놓았다.
“어? 뭐 하는 거요?”
“응?”
가득상이 피식 웃었다.
“좋아 죽을 것 같은 얼굴인데 바로 수련하지 않을 거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오.”
“그럼 뭘 할 땐데?”
“후개가 오늘 하루 쉰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최대한 많이 써먹어야지.”
가득상의 얼굴이 구겨졌다.
“내가 물건이냐!”
“그래서 안 도와줄 거요?”
“……쒸펄.”
턱 하니 팔짱을 낀 가득상이 평상에 주저앉았다.
“나 비싼 몸이야. 술이나 내놓고 부탁하슈.”
“술은 달아 두시오. 나중에 크게 한턱내겠소.”
“거지한테 빚을 지다니, 보통 쓰레기가 아냐.”
툴툴거리고는 있지만 가득상의 눈빛은 의아함과 긴장으로 가득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연호정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 쪽에 힘 좀 실어 주셔야겠소.”
“뭔 말이야?”
“봉공들의 당파 싸움을 진정 싸움답게 만들어야겠다는 소리요.”
가득상의 눈이 빛났다.
연호정이 말하는 바를 단번에 알아들은 그였다.
“사람을 소개해 달라?”
“그렇소.”
“며칠 안으로 탕마, 멸사군이 함께 출정한다고 들었소.”
“그러니 더더욱 빨리 움직여야 하오.”
“출정하기 전에 싸움다운 싸움을 만들겠다…….”
“안 되겠소?”
“안 될 거야 없지. 다만 질과 양,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게 문제인데.”
물끄러미 연호정을 올려다보던 가득상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때로는 착한 사람이 더 무섭다던데, 괜찮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