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74)
174화. 탕마멸사(蕩魔滅邪) (4)
정쟁을 멈춰라.
심상치 않은 발언이었다. 연호정은 공공대사가 저런 말을 입에 담을 줄 상상도 못 했다.
물끄러미 공공대사를 보던 연호정이 웃으며 물었다.
“모용 군장에게 가르침을 내려 주셨다고 하셨습니까?”
뜬금없는 말이지만 공공대사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랬네.”
“출정에 앞서 두 유군 부대의 수장에게 선물을 주실 생각이셨군요.”
“그럴 생각이었네만, 자네에게는 필요 없는 선물이었던 것 같네. 모용 군장 역시 일가(一家)를 이루었지만, 자네는 또 달라. 아직 대성을 못 했을 뿐 이미 자네만의 유파(流派)를 완성한 느낌일세.”
사신무(四神武)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요(要)는 익히고 있는 무공을 어떻게 자신만의 방법으로 연성하느냐다. 같은 무공이라도 구사하는 사람에 따라 위력과 쓰임새가 판이한 이유였다.
“자네는 어떻게 해야 발전할 수 있는지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 같았네.”
뛰어난 안목이었다.
이런 안목은 그저 좋은 무공을 익혔다고 길러지는 게 아니다. 백전(百戰)을 통해 무수히 많은 고수를 상대해 봐야 얻을 수 있는 통찰력이었다.
소림사. 불교와 무도(武道) 양면에서 중원 최고라 불리는 백도 무림의 신화.
과연 그러한 문파의 좌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쿠웅.
광룡부를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방장 대사님의 본 무공을 보진 못했지만, 그래도 인상적인 비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공공대사의 눈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소림의 진짜 무공이니, 절예니 하는 말이 아니다. 굳이 방장 대사의 무공이라고 한다.
미묘한 차이였지만, 공공대사는 연호정의 깊은 눈빛을 보며 그가 이미 눈치챘다는 걸 확신했다.
“보이던가?”
“예?”
“내 무공 말일세.”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따로 연성하는 무공이 있으신 것 같았습니다.”
“허허.”
“물론 그 또한 소림의 무공이겠지요. 다만…….”
“다만?”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혹시 소림 무공을 집대성하거나, 또 다른 무공이라도 창안하실 생각입니까?”
공공대사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그냥 느낌입니다.”
“허어!”
“어떤 영역이든 극(極)에 이르면 기본으로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한데 대사님의 무공은 단순한 가운데 설명키 어려운 이치를 담고 있더군요.”
연호정이 주먹을 뻗었다.
파앙!
절도 있는 일권이었다. 일대의 공기가 요동쳤다.
“이치란 곧 힘입니다. 힘은 발산이고, 발산은 구현이지요. 그리고 구현되는 무공 안에는 그 사람의 사상과 깨달음이 묻어 나옵니다.”
“내가 구현한 무도(武道)를 보며, 나의 의도를 읽었다는 것인가?”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공대사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사내(寺內)의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나의 꿈을, 강동에서 나고 자란 당대 무림 최고의 후기지수가 알아봐 주는구먼.”
“대사님도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음?”
“저와 모용 군장을 불러내 비무를 해 주신 것 말입니다. 단순히 선물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구현하는 무공 속에 담긴 진심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
“해서 제 진심은 읽으셨습니까?”
가만히 연호정을 주시하던 공공대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승천의 때를 기다리는 잠룡(潛龍)인 줄 알았거늘, 이미 다 장성한 신룡(神龍)이었던가?”
“과분한 평가입니다.”
“과분하지 않네. 진실로 과분하지 않아. 무공도 무공이지만, 자네의 통찰력은 이미 천하를 논하고 있었구먼.”
“그래서 과분하다는 겁니다.”
“어째서?”
“저의 눈은 천하가 아닌 사람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공공대사가 탄식했다.
“사람을 향해 있다…….”
연호정이 포권했다.
“거창하게 세상을 위한다는 마음은 없습니다만, 적어도 제 혈육을 위할 줄은 아는 놈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허허허.”
“그럼.”
철컹!
광룡부를 어깨에 지고 몸을 돌린 연호정의 모습은 묘하게 홀가분해 보였다.
천천히 멀어져 가는 그를 보던 공공대사가 입을 열었다.
“대답은?”
연호정이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대답 말씀입니까?”
“모용가주와의 정쟁을 멈추길 요구했네만.”
“탕마멸사군의 수장들 마음을 알고 싶어 부르신 것 아니었습니까?”
“물론 그게 본 목적이었네.”
“목적을 달성하셨다면, 그걸로 괜찮지 않습니까?”
“그래서 대답은?”
연호정이 다시 몸을 돌렸다.
공공대사의 눈빛은 여전히 맑고 깊었지만, 일말의 서늘함을 담고 있었다.
“대답 전에 하나만 여쭈어도 됩니까?”
“말씀하시게.”
“어떻게 아셨습니까?”
공공대사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자네는 봉공회의에 참석한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나는 회의 때 입보다는 귀를 여는 편이라네.”
“…….”
“자네, 상대의 약점을 간파하는 능력이 굉장하더군. 약자로서 강자를 죽이려 노력하면 보인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일세. 난 정치에 능하지 못하네. 다만 누가 회의를 주도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관찰하기 바빴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관찰만으로 그걸 알아보신 대사님의 안목도 보통이 아니십니다.”
“이전까지도 의심했네. 아무리 그래도 육대세가의 가주가 아직 개화(開花)하지 못한 후기지수와 싸움을 벌인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네. 차라리 제갈가주라면 모를까.”
공공대사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번 복호사태의 반응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네. 내 생각이 맞았음을.”
“…….”
“모용가주와 자네는 치열하게 싸우고 있어. 두 사람의 싸움이 무림맹이라는 거대한 집단을 통째로 뒤흔들고 있네.”
대단한 사람이다.
상식은 곧 고정 관념을 낳는다. 상식 밖의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고정 관념이 부서졌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즉 공공대사는, 그저 사람을 관찰하고 시국의 흐름을 읽는 것만으로도 연호정과 모용군의 암중 혈투를 읽어 낸 것이다.
연호정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대단하십니다.”
“칭찬을 듣고자 꺼낸 말은 아닐세. 다만 나는 싸움을 원치 않을 뿐이야.”
공공대사가 턱을 내리고 연호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만 정쟁을 멈추게나.”
“경고입니까?”
도발적인 물음이었다.
“경고라고 한다면 멈추고, 경고가 아니라 하면 지속할 텐가?”
“물론 그렇진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의미 없는 물음이군.”
“의미가 있습니다.”
“어째서?”
“만일 이것이 경고라면, 제가 벌이는 정쟁 속에 대사님까지 끌어들여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공공대사의 눈이 빛났다.
“위험한 발언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걸세.”
“이 판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목숨을 걸었습니다. 창칼이 날아드는 전쟁터에 화살 하나가 추가된다 한들 새삼스러울 것 없잖습니까.”
공공대사가 탄식을 토했다.
“대체 그와 싸움을 벌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가 무림맹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뭐, 뭐라?”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
깜짝 놀란 공공대사가 물었다.
“모용가주가 무림맹주를 노리고 있다는 말인가?”
“그와 제가 정쟁을 벌이는 건 아셨으면서, 그 정쟁이 왜 벌어졌는지는 생각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
“모용가주는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최고가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만족할 만한 위치에 올라서기 전까진 죄 없는 사람의 희생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겁니다.”
“하면, 자네가 모용가주와 대립하는 이유가 그가 맹주가 되는 것을 막고자 함인가?”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복합적인 이유가 있습니다만, 일단은 그렇습니다.”
기묘한 대답이었다.
분명하지 않은 대답이기에 듣는 사람으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허허.”
공공대사의 웃음은 무척이나 허탈했다.
“모용가주가 무림맹주를 노리고 있다……. 하면, 제갈가주가 부맹주직을 건의한 것도?”
“권력 밀집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맹주가 되든, 그를 견제할 만한 수단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림맹에는 봉공을 위시한 능력 있는 수뇌부들이 있네.”
“그리고 그 수뇌부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사람도 있지요.”
“……!”
“어떤 제도든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지금은 이것이 최선이었다는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과거 모용군이 무림맹주가 되었을 때, 그와 한배를 탄 당관이 부맹주가 되었다.
그리고 그 부맹주직을 만든 사람은 모용군이었다.
그래선 안 된다.
자신의 사람을 박아 두기 위함이 아니라, 독재를 최대한 막기 위해 직위와 기관을 만드는 것이 옳다.
즉, 같은 부맹주라도 누가, 언제, 왜 만들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공공대사의 눈이 깊어졌다.
“만약, 모용가주가 최고가 되는 것을 포기한다면?”
“…….”
“그리된다면 자네도 멈추겠다는 뜻인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모용군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 누가 말려도.”
“…….”
“대사님께서 정녕 그의 폭주를 막고 싶으시다면, 차라리 그를 죽이십시오. 그 방법뿐입니다.”
“그럴 순 없네.”
“그러니 저의 정쟁도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만약 모용가주가 야심을 버린다면,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연호정이 빙긋 웃었다.
“그때부터는 무림맹의 결속을 시작으로, 백도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힘써야지요.”
공공대사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 대답은 참으로 듣기가 좋구먼.”
“그렇습니까.”
“자네의 뜻, 잘 알았네.”
연호정은 속으로 말했다.
모를 겁니다, 대사님은.
“오늘의 비무, 참으로 즐거웠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한 번 손속을 나눠 보도록 하세나.”
* * *
사흘 뒤.
쿠구구궁!
무림맹의 북문, 현무대문이 열렸다.
열린 대문 사이로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탕마멸사합군(蕩魔滅邪合軍) 출정(出征)!”
쿠르르릉.
대지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천둥소리를 방불케 했다.
전원 쟁쟁한 무림인으로 구성된 오백오십 명의 합군 전진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는 연호정과 모용군이 말을 몰고 있었다.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출정하는 군병들 모두가 위풍당당한 기마를 타고 있었다.
번쩍!
탕마군은 하나같이 고풍스러운 갑주를 걸쳤다.
중갑주가 아닌 경갑이었다. 철저하게 움직이기 편하도록 개량된 물건으로, 어떤 무공을 쓰든 거슬리지 않을 것 같았다.
반면 멸사군은 아무런 갑주도 걸치지 않았다. 그저 본래 입었던 복장 그대로인 그들의 모습은, 탕마군처럼 위풍당당하진 않아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모용우가 전방을 주시하며 물었다.
“어땠나?”
“뭐가?”
“방장 대사님과의 비무 말일세.”
“여러모로 짜릿했지.”
“알 것 같군.”
“탕마군 훈련은 제대로 시켰고?”
“당장의 훈련은 의미가 없었네. 그저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에만 힘을 썼을 뿐이야.”
“잘했어. 어쭙잖게 훈련시켜 봤자 소득도 없었을 거야.”
모용우의 얼굴에 은근한 긴장이 드리워졌다.
“할 일은 다 마쳤는가?”
연호정이 뒤를 힐끔거렸다.
“할 만큼은 했어. 뒷일은 아버지와 다른 봉공이 알아서 해 주시겠지.”
“부디 별일 없었으면 좋겠군.”
“됐어. 이제 우리는 우리 일에만 신경 쓰자고.”
쿠구구궁!
현무대문이 닫혔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슬슬 달려 볼까?”
“좋지.”
쿠르르릉!
오백오십 기의 기마가 산길을 타고 내려가며 거센 진동을 일으켰다.
목적지는 산동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