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76)
176화. 운명 (1)
탕마멸사군은 열흘 만에 산동에 진입했다.
신법을 펼쳤다면 더 빨랐겠지만, 혹시라도 싸움이 벌어지면 체력이 떨어진 채로 싸워야 하니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군마(軍馬)를 타며 이동했다.
놀랍게도, 열흘 동안 두 유군에 별다른 잡음은 없었다.
소속이 다른데도 부딪침이 없다는 건, 그만큼 통제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개개인이 엄선된 무인인 만큼 나름의 절제심도 있었을 것이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드넓게 펼쳐진 산동의 대지 위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공기가 다르군.”
지역이 다르니 지형도 다르고, 지형이 다르니 기후도 다르다.
산동의 바람은 서늘하면서도 묘한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괜스레 짠 내가 느껴지는 것 같다.
연호정이 묵비를 바라보았다.
묵비의 얼굴은 묘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옛날 생각이라도 나냐?”
“네?”
“관일곡이 태산에 있었다고 했잖아. 관일곡 생각이 나냐는 말이야.”
묵비가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이 안 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기분이 묘하긴 하네요.”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이미 끊어진 인연이야. 당장은 어쩔 수 없다지만, 앞으로 잊는 습관을 들이는 게 좋겠어.”
“그러려고요.”
연호정이 묵비의 등짝을 때렸다.
탁!
“악! 아파요!”
“배에 힘 꽉 주고 가자.”
“그런 말 안 해도 긴장하고 있어요! 아오, 아파. 힘만 더럽게 세서는.”
연호정의 얼굴이 조금 진지해졌다.
“우리야 몇 달 동안 손발을 맞췄으니 괜찮지만, 자칫 탕마군에서 사상자가 생길 수도 있어.”
묵비의 얼굴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적의 전력이 만만치가 않아. 그럴 수밖에 없지. 설령 무공을 익히지 않았더라도, 훈련받은 칼잡이 천 명이면 그 자체로 위협적이야.”
“그렇죠. 게다가 우리처럼 소속이 나뉘지도 않았으니까요.”
“바로 그거다. 듣자 하니 회랑단의 역사는 십 년이 넘는다고 하더군. 십 년 동안 그 정도로 성장한 마적단은 역사를 뒤져도 몇 없어. 그런 놈들이 한 몸이 되어 싸운다면 상상 이상으로 강할 거다.”
연호정이 탕마군을 훑어보았다.
“이번 싸움에서 네 역할은 적을 죽이는 게 아니라 아군을 보호하는 거야.”
묵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본군에서 근접전과 방어에 능한 녀석이 누가 있지?”
“옥청이 방어에 뛰어나고, 척강이 근접전에 뛰어나요.”
“그 둘을 붙여 줄 테니, 전장에 도착하기 전 무조건 최대 고지를 선점해. 여유가 생기면 그때부터는 적을 섬멸하는 데에 집중한다. 알겠지?”
“견제 사격 이후 섬멸 사격. 이해했어요.”
“좋아. 잘 부탁한다.”
묵비가 뜻밖이라는 듯 연호정을 보았다.
“의외네요?”
“뭐가?”
“잘 부탁한다니…… 연 공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 같아서요.”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실전 경험이 많아도 대규모 병력으로 움직여 본 적이 없으면 초짜다. 그리고 그 초짜들이 우리의 아군이 되었잖아. 아군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당연하지.”
“……아군.”
묵비가 도열한 탕마군을 둘러보았다.
탕마군을 이루는 군병 대부분은 이미 강호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고수들이었다.
천하 각지에서 활동하던 고수들인 만큼 나이도, 성격도 천차만별이다. 그런 그들이 모용우의 철저한 통제하에 상당한 군기(軍氣)를 뿜어내고 있었다.
‘대단해.’
묵비가 모용우를 보았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산동의 땅을 내려다보는 모용우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단순히 무공만 강한 게 아니라 휘하 병사들을 휘어잡는 능력도 뛰어나구나.’
이제는 묵비도 알고 있었다. 사람을 통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멸사군을 이루는 군병의 숫자는 오십이 조금 안 된다. 연호정은 그 오십이 안 되는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처음부터 실전을 겪게 했다.
그럼에도 훈련 기간 동안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 순간들이 있었다. 연호정은 그런 그들과 끈기 있게 교류하며 자연스레 정예로 만들었다.
‘무리를 이끄는 능력은 오히려 연 공자보다 뛰어나다는 뜻일까?’
묵비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직 모른다. 다만, 이립의 나이로 개성 강한 오백의 군병들을 며칠 만에 휘어잡은 능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자. 우리는 적을 섬멸하기 위해서 왔어. 임무를 달성하는 것에만 집중하면 돼.’
그렇게 묵비가 정신을 다잡을 때, 연호정은 모용우에게 다가갔다.
“곧바로 움직일 건가?”
“그래야지.”
“이제부터는 속도전이야. 첫 실전인 만큼 군병들 통제에 신경 써야 할 거다.”
모용우가 연호정을 힐끔거렸다.
“연제도 그랬나?”
“뭘?”
“떨려서 말일세.”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떨렸지. 첫 실전에서 한 놈이라도 죽으면 어쩌나 하고.”
“다행히 멸사군에 사망자가 없었군.”
“원체 기량들이 좋았으니까. 운도 좋았고.”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하지만 사상자는 언제든 날 수 있어. 마음 단단히 먹도록 해.”
“그러고 있네. 그런데도 떨려서 문제지만.”
모용우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자, 이만 가 볼까.”
“좋아.”
히히히힝!
거센 울음을 토해 낸 두 마리의 군마가 힘차게 발을 굴렀다. 그러자 탕마멸사의 군병들이 제각기 고삐를 치켜올렸다.
쿠르르릉.
비탈길을 내려온 탕마멸사군은 무서운 속도로 달렸다.
산동 각지에는 백도 문파들이 제법 있다. 무림맹에서 날린 공문 덕분에 어떤 문파를 들러도 질 좋은 여물과 식사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닷새가 지났다.
순식간에 산동의 중심부까지 들어온 탕마멸사군이 멈춘 곳은 개방의 산동 제남지부였다.
“위치가 바뀌었습니다.”
“바뀌다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장구(章丘) 일대에서 은신하고 있던 회랑단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곳은 동영(東營) 부근입니다.”
동영은 산동성에서도 가장 동쪽에 있는 현 중 하나로, 동해(東海)와 인접한 곳이었다.
“놈들이 왜 갑자기 움직였지? 상부에서는 분명 한 달 정도 머물 거라고 했는데?”
“아직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하지만 마적단인 만큼, 동영 인근의 마을이 습격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런.”
“혹시 몰라서 일대 개방도를 보냈습니다만, 아직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모용우가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만, 뭔가 좀 찝찝하군.”
그때였다.
“군장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제갈아연이 있었다. 공석인지라 연호정에게 존대를 하는 그녀였다.
제갈아연이 말했다.
“회랑단의 전력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했죠?”
“그랬지.”
“산동 동영 인근에는 제법 유명한 세력이 자리 잡고 있어요.”
모용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영에 유명한 문파가 있었소?”
“문파는 아니고 상단이죠. 해룡상단의 본단이 동영에 있어요.”
“……!”
“혹시 모르니 해룡상단에 연락을 취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들이라면 분명 도와줄 거예요.”
“혹은.”
모두가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회랑단의 목표가 해룡상단일 수도 있지.”
제갈아연이 설마 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해룡상단은 산동에서도 손에 꼽히는 규모의 상단이에요. 만일 그들을 건드렸다가는 일이 엄청나게 커질 수도 있어요. 회랑단이 굳이 그런 짓을 할까요?”
“가능성이 없진 않다고 봐.”
“왜요?”
“탕마군장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잖아.”
모용우가 눈을 끔뻑였다.
“내 반응?”
“댁은 해룡상단을 알고 있었어?”
“아, 물론이지.”
“그런데 왜 회랑단이 동영으로 향한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해룡상단을 떠올리지 못했어?”
“그건…….”
모용우는 당황했다.
“그들은 무림의 세력이라기보다는 상단…….”
그는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제갈아연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봤지? 대개의 반응이 이래. 무림 문파가 아니면, 제아무리 유명한 상단이나 전장이라도 그렇게까지 관심을 두지 않아.”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즉, 회랑단이 해룡상단을 공략하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는 얘기야.”
“하, 하지만 회랑단은 마적단이잖아요. 놈들에게 군장님 정도의 안목이 있을 리가…….”
“안목이 있든 없든, 중요한 건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모용우가 외쳤다.
“탕마멸사군 전원 진군 준비하라!”
히히히힝!
재빨리 말에 오른 군병들의 눈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일개 마적단을 섬멸하러 가는 데에도 긴장한다. 자부심 넘치는 무림인이라면 코웃음을 칠 것이 분명한데도.
그만큼 연호정과 모용우가 회랑단의 전력을 잘 주입한 것이었다. 애초에 십 년 동안 꾸준히 세력을 불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한 조직이었다.
“가자!”
콰르르릉!
오백오십 군병이 그 어느 때보다 무서운 속도로 질주한다.
제갈아연이 연호정 옆에서 말을 몰았다.
“만약 놈들이 정말 해룡상단을 건드린다면 보통 큰일이 아니야!”
연호정이 제갈아연을 돌아보았다.
제갈아연이 불안한 얼굴로 재차 외쳤다.
“해룡상단은 산동성 상업의 주축 중 하나야! 해룡상단이 무너지면 산동의 상업이 흔들리고, 산동의 상업이 흔들리면 산동 무림도 함께 흔들리게 돼!”
한 세력의 흥망성쇠에 따라 지역 전체가 요동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세상이다. 남쪽에서 불어온 작은 바람이 북쪽에서는 폭풍으로 바뀔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세상은 그렇게 변해 왔다. 무림 역시 그러한 이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거군.”
“무조건!”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멸사군장!”
모용우가 외쳤다.
“급보다! 회랑단으로 추측되는 백오십 무리가 동영 남동쪽 화운리(和雲里)로 향하는 중이야!”
“회랑단 본진은 어디에 있습니까!”
“해룡상단 근처 오 리(五里) 앞!”
연호정이 이를 갈았다.
‘망할 놈들이 대가리 아프게 하는군.’
이 또한 마적단의 전략이라면 전략일까.
혹시라도 따라붙었을지 모를 병력을 쪼개기 위한 사악한 수법이다. 흑도라면 공격해 올 리가 없고, 백도라면 협(俠)을 숭상하니 민간인 피습을 용납할 리가 없다.
“저희가 화운리로 가겠습니다!”
연호정과 모용우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알 수 없는 신뢰로 엮인 두 수장의 눈빛.
“정리하고 곧장 합류하도록!”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대수의 명을 받듭니다!”
짧은 명령, 그리고 확실한 대답이다.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행동을 본 묵비는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왔던 것처럼.
원래 그러기로 약속했던 것처럼, 본래부터 주군과 신하의 관계라도 된 양.
서슴없이 명령을 내리고,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안심을 느끼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우우우우웅!
연호정의 몸에서 새하얀 진기가 솟구쳤다.
화아아악!
흉포하고도 강력한 진기가 팔방으로 뻗어 나갔다. 무시무시한 기백이 느껴지는 기파였다.
연호정이 외쳤다.
“멸사군 전원 전투 준비!”
치리리리링!
대호의 포효에 맞먹는 우렁찬 외침에 멸사군병 전원이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모용우를 위시한 탕마군은 깜짝 놀랐다. 이곳까지 오며 보여 주던 자유로운 기도가 단숨에 살기 넘치는 흉포함으로 돌변했다.
오십 정예군이 뿜어내는 엄청난 기백.
지금의 탕마군에게는 없는, 무수한 실전과 살육으로 단련된 멸사군의 압도적인 군기(軍氣)였다.
“가자!”
대열에서 이탈한 멸사군이 화운리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