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82)
182화. 운명 (7)
“총원 오백, 사상자 백이십.”
“…….”
“그중 사망자는 칠십이고, 나머지는 중경상자들입니다.”
보고를 듣는 모용우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칠십…….’
사상자가 없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상대는 새외라는 무대에서 십 년 동안 세(勢)를 불려 온 강자들이었다. 마적단이라곤 하나 그 전력이 어지간한 문파를 상회하고 있었다.
당연히 사상자가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망자가 일흔 명이나 될 줄은 몰랐다.
‘어설펐다.’
그렇다. 어설펐다.
안목은 나쁘지 않았다. 딱히 대단한 전술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효율적인 운용도 선보였다.
하지만 시기를 제때 맞추지 못했다.
적의 반응을 살펴보는 눈은 있었으되 깨닫는 게 늦었으며, 떨어진 명령에 반응하는 아군의 대처도 늦었다.
휘하 조장과 군병을 휘어잡았지만, 그뿐이었다.
‘다 내 실책이야.’
훈련 시간이 더 많았다면.
더 노력해서 탕마군 전원을 완벽하게 하나로 만들었다면, 이 정도 손해를 입진 않았을 것이다.
탕마군을 구성하는 군병들은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경험을 쌓아 온 무림의 고수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데 뭉쳐 적을 섬멸해 본 경험은 없었다.
그래도 충분히 적을 상대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고 말했지만, 모용우 역시 상대를 쉽게 본 감이 있었다.
뼈아픈 실책이었다.
‘진형을 형성하거나 공방을 더 탄탄히 하는 것은 둘째 문제다. 대국을 보는 내 안목을 더 키워야 하고, 군병들 역시 명령이 떨어지면 즉각 반응할 줄 알아야 해. 그게 우선이야.’
기실, 그걸 우려하여 창설식 이후 공방 훈련이 아닌 서로 간의 유대감을 쌓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 정도도 하지 않았다면 피해는 훨씬 더 커졌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개방 지부를 찾아가 실력 좋은 의원들을 수소문하게. 부상자는 상단 내 임시 거처에서 쉬게 하고, 나머지는 건물 잔해를 치우도록 하게.”
“명을 받듭니다.”
“그리고 진 조장.”
“예, 군장님.”
“고생했네.”
진패가 고개를 저었다.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었다고는 하나, 저 역시 수하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사상자가 많은 것은 조장들의 탓이 큽니다.”
“그리 생각지 말게. 자네들은 할 만큼 했어.”
“…….”
“더 강해지세나.”
“물론입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진패가 방을 나섰다.
모용우는 탄식했다.
“사람을 이끈다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 일일 줄이야.”
이끄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그는 군중을 다루는 데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문제는 마음이었다.
‘내 사람이 나의 부족함으로 죽었다.’
각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수하의 죽음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이었다.
‘결국, 나 역시 경험이 부족하다는 뜻이겠지.’
모용우가 눈을 감았다.
‘하지만 경험이 쌓인다 한들, 내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의연해질 수 있을까?’
그때였다.
“뭐 해?”
“헉!”
모용우는 깜짝 놀라서 문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연호정이 있었다.
“언제 왔나?”
“방금. 여러 번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무슨 일 있나 하고 들어와 봤지.”
“아…….”
“표정을 보니 알겠군. 왜 그렇게 넋을 놓고 있는지.”
모용우가 씁쓸하게 웃었다.
“내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니까.”
연호정은 냉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건 형님 잘못이야.”
순간 모용우의 눈이 커졌다.
“바, 방금 뭐라고 했나?”
“형님 잘못이라고. 무슨 이유에서건, 수하의 죽음은 윗사람 잘못이야.”
연호정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어렸다.
“그 정도는 당연히 이해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물론일세. 다만 내가 놀란 건…….”
“엉?”
모용우는 괜히 헛기침이 나오는 걸 느꼈다.
“이제야 형님이라고 불러 주는구먼.”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불러 달라며?”
“물론 그랬네.”
“왜? 막상 들어 보니 간질간질해? 무를까?”
“안 되네.”
무시무시한 단호함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형님이라는 호칭에 어떠한 집착마저 갖고 있는 듯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사고라니까.”
모용우가 볼을 긁적였다.
“동생이 없으니까.”
물론 단순히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그는 오랜 시간 외로운 삶을 살아왔다. 분명 자신의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이건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을 주군으로 모셨지 형제처럼 여기진 않았다.
모용우가 연호정에게 형제처럼 편안한 관계를 원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함께 움직이고 있지만, 동시에 진심으로 서로를 위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니까.
“어쨌든, 마음을 다잡는다고 쉽게 괜찮아질 만한 일은 아니야.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 억지로 애쓰지는 마.”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모용우가 툭 던지듯 물었다.
“연제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나?”
“음?”
“내 사람들, 내 수하를 잃은 경험이 있느냔 말이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것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수하를 잃었다. 친형제처럼 지냈던, 가장 가까웠던 사람도 잃어 보았다.
애초에 가족이 죽는 것도 보았다. 이런 것도 경험이라면, 연호정도 제법 지독한 경험을 쌓아 온 셈이었다.
“사람들은 말하지. 평화로운 시대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무림이라는 세상에 진정 평화가 찾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지금도 그렇고.”
“왜 그리 생각하나?”
“범부로서는 상상도 못 할 힘을 지닌 이들이 천하를 활보하고 있어.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일 수 있지만, 실상은 그럴 수가 없지.”
연호정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서늘한 한기가 일었다.
“세상은 언제나 힘없는 자들의 절규 위에 씨앗을 뿌리게 마련이야. 개인의 평화는 몰라도, 모두의 평화란 건 존재할 수 없다.”
모용우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일었다.
“그렇다면…… 협(俠)이라는 것도 의미가 없다는 말 아닌가.”
“의미가 있지. 근본적으로 세상을 바꿀 순 없지만, 적어도 내 눈앞에서 타오르는 지옥 불에 물 한 바가지라도 뿌려 줄 순 있으니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씁쓸함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흑과 백, 선과 악, 생과 사. 우리는 돌고 도는 쳇바퀴 안에서 뭣도 모르고 달리고 있는 바보들일 뿐이야.”
꽤 염세적인 발언이었다.
모용우가 물었다.
“그래서 그랬나?”
“뭘?”
“회랑단 말일세. 그래서 몰살해 버린 건가?”
연호정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어차피 몰살하려고 온 거잖아.”
“물론 그렇네. 하지만 그들은 항복했어. 전의가 꺾여 항복한 자들을 그리 냉정하게 죽이는 것도 바르다고 보긴 어려울 듯하네.”
“그렇다면 왜 막지 않았나?”
모용우가 한숨을 쉬었다.
“글쎄…… 어쩌면 나 역시 그들을 살려 둬선 안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네.”
솔직한 발언이었다.
연호정이 탁자에 걸터앉았다.
“전에 본군의 군사가 나한테 그러더군. 상대는 악인이지만, 굳이 그렇게 끔찍하게 죽여야 할 이유가 있냐고.”
“연제의 대답은 무엇이었나?”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그렇다면 악인은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어야 한다.”
“……!”
“나에게 그럴 권한이 없다? 당연히 없지. 다만 난 내 생각대로 움직일 뿐이야. 죽어 마땅할 놈을 교화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나처럼 보이는 족족 잡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
“그건…… 그 나름대로 고통스러운 길인 것 같네.”
“처음엔 그랬지. 하지만 이제는 시원해.”
모용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악인도 어쨌건 사람일세. 그걸 시원하다고 느껴서는 안 돼.”
“나는 악인을 사람으로 안 보거든.”
“…….”
“그러니 시원하지.”
모용우가 고소를 지었다.
“참으로 감당키 힘든 동생을 두었군.”
“그래서 사람을 잘 보고 사귀어야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탕마군장으로 살아가든 모용가주로 살아가든, 아니면 무림맹주로 살아가든 이런 경험은 수도 없이 하게 될 거야. 미리 마음 다잡도록 해.”
“연제. 나는…….”
“알아, 무림맹주를 할 생각이 없는 거.”
“…….”
“형님의 그 마음을 바꾸는 것도 내가 할 일이지. 끊임없이 설득할 거니까 그것도 미리 각오해 둬.”
모용우가 피식 웃고는 창틀에 걸터앉았다.
“이보게, 연제.”
“말해.”
“이왕 말이 나왔으니 묻겠네. 연제는 왜 나를 무림맹주로 만들고 싶어 하나?”
“지금 형님이 보여 주는 모습 때문에.”
“음?”
“수하들의 죽음에 아파하고 자조하면서도,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마음을 당연하게 품는 사람이기 때문에.”
“…….”
“현실의 슬픔과 미래의 다짐을 분리할 수 있는 자, 그러면서도 선한 천성을 지켜 내고 있는 자.”
연호정이 빙긋 웃었다.
“무림맹주로 이만한 사람이 없지.”
모용우가 헛기침을 했다.
“부끄럽군. 나는 연제가 말하는 것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착각하지 마. 대단하다고 추켜세워 주는 거 아니니까. 드넓은 세상에 형님 같은 사람이 또 없을 줄 알아?”
“……커험. 그렇다면 더더욱 궁금하네. 굳이 나일 필요가 없잖나?”
“그래도 형님이어야 해.”
“그러니까 그 이유가…….”
“그래야 모용군을 무너트릴 수 있으니까.”
모용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농담이야. 모용군의 실질적인 상대는 나지, 형님이 아니잖아?”
“그런가.”
“형님처럼 착한 사람도 많고, 능력이 좋은 사람도 많아. 착하면서 능력까지 갖춘 사람도 없진 않지. 그래도 내가 형님을 무림맹주감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이유는?”
연호정은 잠시 말이 없었다.
지그시 모용우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맑고도 깊었다.
“그냥 직감이야.”
“그런 대답이 어디 있나?”
“여기 있지.”
연호정이 탁자에서 내려왔다.
“가주가 되든 맹주가 되든,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가꾸는 게 중요해. 앞으로도 열심히 해 보자고.”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혹시 그거 아나?”
“뭘?”
“연제는 참으로 의지가 되는 동생일세.”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힘들 때 버팀목이 되어 주는 건 어렵지 않아. 부러지지만 마시라.”
“부끄럽게 그런 못난 꼴을 보여 줄 순 없지.”
“부끄러운 일이라는 건 아는군.”
연호정이 문으로 향했다.
“어디 가시는가?”
“파사륵.”
회랑단주 파사륵은 아직 죽지 않았다. 다리가 잘리고 온몸에 크고 작은 부상이 가득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생명력 덕에 여태 숨이 붙어 있었다.
물론 연호정은 일부러 그를 살려 두었다.
모용우가 물었다.
“그에게서 뭔가 얻을 것이 있는가?”
연호정이 멈칫했다.
“회랑단은 새외제일의 마적단이야. 지난 십 년 동안 서장, 청해, 감숙 일대를 휩쓸고 다녔다고 했지?”
“그랬네.”
“놈들이 중원 땅에 들어온 적은 거의 없었고?”
“그렇다고 들었네. 들어왔어도 무척 조심했다고 하더군. 그도 그럴 것이, 구대문파 대부분이 중원 북부에 몰려 있지 않나.”
“한데 이번에는 일을 거하게 쳤군. 산동에 그럴듯한 문파가 없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해룡상단을 무너트리려 들다니 말이야.”
모용우의 눈이 번뜩였다.
적을 물리칠 생각만 했지, 적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연제 생각은……?”
“믿을 만한 뒷배가 있다는 뜻이겠지.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믿을 만한 뒷배라면, 설마 회랑단이 중원인과 내통하고 있다는 말인가?”
“혹은.”
맑고 깊었던 연호정의 두 눈에 끔찍한 살기가 솟구쳤다.
“새외 어딘가에, 그들의 뒤를 봐주는 놈들이 생겼을 수도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