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95)
195화. 고향으로 (7)
파파팡!
뱀처럼 느릿하게 전진하다가 일순간 폭발적인 장법(掌法)을 내친 당상아가 숨을 몰아쉬었다.
‘힘들다.’
장심(掌心)에서 뿜어지는 독기(毒氣)가 역류할 것만 같았다.
지나친 내공 소모로 내부 혈도가 너덜너덜해졌다. 작정하고 회복을 도모하면 사나흘 내로 정상으로 돌아오겠지만, 애초에 지금처럼 몸이 상할 정도로 강도 높은 수련을 지속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당상아 역시 무리한 수련을 거듭한다 하여 무공이 발전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힘들지만, 버텨야 해.’
그녀가 바라는 것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최대 효율을 내는 방법이었다.
당상아는 당시를 떠올렸다.
황야에서 수년간 악의를 쌓아 온, 개개인의 경지는 그리 높지 않지만 집단으로는 강했던 회색빛 늑대들의 광기를.
‘강했어.’
당상아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별것도 아닌 적이라 생각했는데, 너무나도 강했어.’
당상아는 당가 출신답지 않게 천성적으로 순하고 밝았다.
하지만 그녀의 혈관에는 당가 특유의 독기와 집요함이 분명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번 전투에서, 그녀는 본인이 가진 핏줄의 흉성을 유감없이 터트렸다.
그러나.
‘나는 무능했다.’
독과 암기로 죽인 적의 숫자만 수십이었다.
그녀는 그 행위를 후회하지 않았다. 실전 경험의 많고 적음을 떠나, 그들은 적이었고 악인이었다. 나아가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판이었다.
문제는 그들의 대처였다.
‘나 때문에 아군이 죽었어.’
회랑단은 당상아를 철저하게 피하며 탕마군을 유린했다.
당연했다. 당상아의 독과 암기는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이다. 회랑단도 바보가 아닌 바에야 굳이 그녀에게 접근할 리가 없었다.
당상아는 끝까지 그들 사이로 파고들어 전투를 벌였지만, 회랑단은 절묘하게 그녀 주위의 적만 상대했다.
결국 그녀의 주변에는 적과 아군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었다.
당연히 아군이 죽은 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상아는 도무지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신만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파아아앙!
전신에 힘이 빠졌는데도 탄력 넘치는 권장(拳掌)을 구사한다.
근육을 넘어 뼈마디까지 시큰거렸다. 그래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더 무서운 건.’
힘차게 양팔을 휘두르던 당상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바보처럼 쓰러져 버렸다는 거야.’
처음이었다. 체력과 내공이 다 소모된 채로 이 악물고 적을 죽이려 한 적은.
처음이었다. 정신력으로도 버틸 수 없을 지경까지 탈진해 버린 것은.
결국, 그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더 많은 동료가 희생되었다.
당상아의 눈이 충혈되었다.
자신 때문에 죽은 군병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콰앙!
힘차게 내친 주먹에 나무 표피가 움푹 깎여 나갔다.
주르륵.
그녀의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내공 운용이 불안정하여 주먹을 보호하지 못한 것이다.
“허억!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던 당상아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흘렀다.
‘미안합니다.’
위령제를 지내는 기간 내내 잠 한숨 못 자고 울기 바빴다.
나중에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해서 수련을 시작했다. 정신이 날아갈 만큼 독한 수련으로 몸을 혹사시키면 이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결과는 좋지 않았다.
“하아.”
땀과 눈물, 피로 범벅이 된 당상아가 그 자리에서 벌러덩 누워 버렸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나는 이렇게나 무력한 존재였구나.’
그녀는 문득 조부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내 보기에, 본가에는 새로운 바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너라면 본가에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지금처럼, 심사가 복잡하다고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독하게 단련해야 한다.’
조부님의 말씀이 옳았다.
가문에 새로운 바람이 필요하다? 그런 건 차후에나 생각해 볼 문제였다.
더 독하게 단련하고, 더 악랄하게 대처해야 했다. 필요하다면 당가의 누구보다도 더 흉악해질 수 있어야만 했다.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선, 그 정도 강단은 필수였던 것이다.
당상아가 눈을 감았다.
거칠었던 호흡이 점차 잦아들었다. 몸에 힘을 푸니 온몸이 삐걱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콧물이다.”
“헉!”
당상아는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한 청년이 묘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에 콧물까지? 엉망진창일세?”
당상아가 냅다 상체를 일으켰다.
“다, 당신은?”
청년,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오랜만이네, 당상아 군병.”
아, 맞다. 난 탕마군의 군병이지?
당상아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멸사군장님을 뵙습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군기가 아주 바짝 들었구만? 우리 애들도 댁 보고 좀 배워야겠어. 이것들은 사석이라곤 해도 날 너무 막대하거든.”
“……네?”
“뭐, 그건 그렇고.”
연호정이 공터를 둘러보았다.
“난장판이 따로 없군. 정상적인 수련처럼 보이진 않는데, 화풀이라도 하고 있었나?”
당상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정신도 아니었다.
“한데 여기는 어쩐 일로……?”
“힘든가?”
“네?”
“몸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좀 힘들어 봬서.”
당상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아요.”
“안 괜찮아 보이는데?”
“……무슨 용건으로 오셨나요?”
연호정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번에 내가 특수 임무를 하나 맡았거든. 좀 위험한 임문데, 소수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더라고. 그래서 이런저런 인재들을 추리고 있었어.”
“……?”
“댁이 필요할 것 같아서 왔는데, 그 정신머리면 아무래도 무리겠군.”
당상아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몸이나 잘 추스르게. 나중에 연이 닿으면 또 보자고.”
“무슨 임무죠?”
“엉?”
“무슨 임무길래 제가 필요한 거죠?”
이번에도 연호정은 솔직하게 말했다.
“흑도 무림에 잠입해서 알아낼 게 있어.”
“그게 그렇게 위험한가요?”
“양천이 얽혀 있거든.”
“양천?”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당상아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야, 양천이라면 신선제왕의 투왕 양천이요?!”
“그러니까 위험하지.”
“헉!”
아주 잠시이긴 했지만, 당상아는 극심한 자기혐오와 슬픔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주 그냥 짜릿하겠지? 어지간해선 그럴 일 없겠지만, 자칫 잘못하면 강호 최강자 중 하나와 맞닥뜨릴 수도 있어.”
“……!”
“하긴, 댁은 조부를 많이 봤으니 별 감흥이 없을 수도 있겠군.”
투왕 양천이 위험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당가 역사상 최고를 논하는 암왕의 위명은 또 달랐다.
무림에서 암왕 당형은 사신(死神)과 동급으로 취급된다. 독과 암기를 수족처럼 다루는 죽음의 왕, 당형이 지나가고 난 자리는 풀 한 포기도 자라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당상아는, 바로 그 암왕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천재였다.
“여하간 이만 간다.”
“…….”
“……음, 가기 전에 조언 한마디 할까?”
“네? 아, 네!”
연호정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뭣 때문에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힘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세상으로 눈을 돌려 봐.”
“……?!”
“굳이 탕마군에만 얽매여 있을 필요는 없다는 얘기야. 스스로 강해지고 싶다면, 차라리 관두고 홀로 세상에 나가 봐. 그게 나을 거다.”
당상아는 당황했다.
“타, 탕마군을 관두다니요?”
“왜? 관둘 수도 있지. 하긴, 억지로 탕마군에 묶어 버린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군 조직이든 무림의 조직이든, 개개인의 구성원 모두가 조직을 위해 헌신할 때 최대의 능률이 나와. 하지만 지금 댁의 상태를 보니, 본인은 물론 탕마군에도 별 이득이 안 될 것 같은데?”
“……!”
“지혜롭게 살아. 지인 하나 없는 무력 집단에 소속된 경험은 한 번이면 충분하잖아?”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거칠 것 없이 걸어가는 그를 보며, 당상아가 물었다.
“군장님께서는 확신이 있으신가요?”
“무슨 확신?”
“본인이 잘하고 있다는 확신이요.”
“거기에 더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에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도 알고 있지.”
“……!”
“그런 건 어려운 게 아니야. 가장 힘든 건 확신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답을 도출하면, 나머지는 자연스레 해결되지.”
“과정…….”
당상아가 재차 물었다.
“제가 필요해서 오신 것 맞죠?”
“당연한 거 아닌가?”
“한데 제가 안 가면 ‘최선’이 아니게 되잖아요.”
“그렇다고 멀쩡하지도 않은 사람 데리고 갈 순 없잖나. 모두가 위험해질 텐데.”
“……!!”
“몸뚱이 아작난 거야 의술로 고칠 수 있지만, 심란한 사람을 괜찮게 하는 방법은 본인만이 아는 법이지. 그래서 미련을 접는 거다. 나는 댁을 멀쩡하게 만들 방법을 모르거든.”
당상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모두가 위험해질 거란 말이 가슴에 비수처럼 박혀 들었다.
연호정이 당상아를 힐끔거렸다.
“내 조언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댁 마음이야. 다만 이거 하나는 잊지 말게.”
“……?”
“댁에게 능력이 없었다면, 굳이 내가 아쉬운 소리 하러 여기까지 찾아왔겠나?”
그 말을 끝으로 연호정이 공터를 벗어났다.
당상아의 눈이 흔들렸다.
안 그래도 답답한 심정이 더 복잡해졌다. 하지만 아직도 피가 맺혀 있는 그녀의 손은 어느새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숲을 걷던 연호정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슬슬 나오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목 뒤에서 모용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번씩 이런 생각을 한다네.”
“엉?”
“어쩌면 연제의 가장 강한 무기는 무공이 아니라 화술일 수도 있겠다는.”
“주둥이만 살았다는 뜻인가?”
“그런 뜻 아니라는 거 알잖는가.”
연호정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필요하면 장강 물도 팔아 버릴 입심이지. 나도 한 번씩 감탄스러워.”
연호정의 넉살에 모용우도 피식 웃었다.
“그 좋은 입심도 이번에는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군.”
“이 정도면 양호하지, 뭘.”
“미안하네. 어지간하면 군장으로서 명을 내릴 텐데, 본인 상태가 저러하니 쉽게 추천하진 못하겠더군.”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대개 성장통이 지독할수록 신념은 단단해지지. 걱정하지 마. 저 사람은 이제 시작이니까.”
“그런가.”
모용우가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연제도 답답하겠구먼. 혹시 필요한 자격 조건이 있다면 이 우형에게 말해 주게. 최대한 괜찮은 사람을 구해 보겠네.”
“다 구했는데 뭔 소리여?”
“으응?”
“방금 마지막 한 사람 구했잖아? 더 구할 사람 없어, 이제는.”
모용우는 당황했다.
“구했다니? 분명 당 소저는…….”
“올 거야.”
연호정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정말 저 양반 위로해 주겠답시고 입 아프게 나불댄 줄 알아?”
“……어?”
“내게는 능력 좋은 당씨 혈족이 필요해. 그렇다고 당관을 빼 올 수는 없으니 저이라도 데려가야지.”
“……?!”
모용우가 입을 쩍 벌렸다.
“당 소저를 위로해 준 게 아니라, 그녀가 자발적으로 따라오게 할 생각이었다는 건가?”
“무능력하다는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한테 넌 꼭 필요한 인재라고 말하는 것만큼 효율적인 구슬림이 또 있나?”
“컥!”
“좀 오글거리긴 했지만, 필요한 인재를 영입하는 일에 이 정도 간지러움은 감수해야지.”
사흘 뒤.
다소 초췌하지만, 눈빛은 사흘 전보다 훨씬 맑아진 당상아가 파군각으로 찾아왔다.
“군장님을 뵙습니다.”
연호정은 광대가 눈썹까지 올라가려는 걸 애써 막았다.
“환영하네, 당상아 군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