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200)
200화. 정면 돌파 (4)
“오셨습니까.”
“허허, 업무 중이셨소?”
“별거 아닙니다.”
제갈문호가 일어나서 모용군을 맞았다.
“여기 앉으시지요.”
“고맙소.”
잠시 후, 두 사람 사이에 찻잔이 놓였다.
모용군이 씩 웃으며 물었다.
“술은 없소? 전에 이 사람 거처에서 말하기론 술을 대접해 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업무 중이라서 말입니다. 금일 저녁에 시간을 내어 주신다면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안타깝군.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그럼 술자리는 다음으로 미루지요.”
“그럽시다.”
모용군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해서, 이 사람을 어찌 집무실로 부르셨소? 혹 실무조에서 연락이 왔소이까?”
“그렇습니다.”
제갈문호가 품에서 서신을 꺼내 건넸다.
서신을 펼친 모용군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시작이로군.”
“그렇습니다.”
제갈문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또한 추가적인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어떤?”
“귀철검문(鬼鐵劍門)이라고, 아십니까?”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흑도삼십육문(黑道三十六門) 중 제법 유명한 곳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귀철검문은 흑도의 방파답지 않게 이백 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이어 온 검문이었다.
놀랍게도 그들의 무공은 흑도의 그것답지 않게 정정당당함을 표방했다. 지나치게 패도적인 면이 있지만, 무공 자체는 백도의 정공(正功)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귀철검문은 대대로 수준 높은 검사를 배출해 온 흑도의 명문입니다. 실제로 당대 문주의 무공은 저희 육대세가의 수장급과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지요.”
“그 또한 알고 있소. 별호가 파산검귀(破山劍鬼)라 했던가?”
“잘 알고 계시는군요.”
“필요한 만큼은.”
“그렇습니다. 귀철검문은 흑도 문파답지 않게 역사와 전통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흑도제일검문(黑道第一劍門)이라 불리기도 했지요.”
“그래서, 귀철검문이 어쨌다고 그러시오?”
“무너졌습니다.”
이때만큼은 모용군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귀철검문이 멸문했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허어! 어쩌다가?”
제갈문호의 눈이 번뜩였다.
“정체를 모르는 고수들의 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대체 얼마나 뛰어난 고수들이 투입되었기에?”
“아직 자세한 건 모릅니다. 다만 추정되는 습격자의 수는 대략 이십여 명 안쪽이며, 화공(火攻)을 쓴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분명 화공은 위력적이지만, 귀철검문 정도의 문파가 화공만으로 당했다고 보긴 어렵겠지. 실제 전력에서 차이가 났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소.”
“잘 보셨습니다. 즉, 습격자들의 무공이 하나같이 뛰어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초절정 고수가 아닌 바에야 충분한 준비 없이 무너트릴 순 없었을 것이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철저한 사전 조사와 뛰어난 대응 능력, 나아가 서로 손발이 잘 맞는 전문가들이 투입된 것으로 사료됩니다.”
모용군의 눈이 반짝였다.
“이 얘기를 굳이 지금 해 주는 것은, 귀철검문의 멸문이 이번 임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고?”
제갈문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어떤 식으로 얽혔다고 생각하시오?”
“양천.”
“……!”
“저들의 정보 통제력은 실로 대단합니다. 무림맹과 개방이 파고들어 보려 해도, 중심으로 갈수록 모호하기 그지없지요. 그래서 양천과 얽힌 일 중 확신하기 어려운 게 태반입니다.”
“즉, 이번 건처럼 모호한 사건일수록 양천과 관련되었을 확률이 높다?”
제갈문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모용군의 지략과 안목이 뛰어나다는 것을.
“그렇습니다. 저는 가능성을 말했지만, 기실 양천 쪽에서 손을 쓴 것이 확실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모용군이 턱을 쓰다듬었다.
대답 없는 그를 향해, 제갈문호가 말을 이었다.
“양천은 흑도를 규합하며 세를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흑도가 그의 휘하로 들어간 건 아니지요. 귀철검문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멍청한 짓이군.”
“예?”
모용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귀철검문은 흑도의 명문. 그만한 세력을 무너트려 힘을 과시한다……. 당장은 몰라도, 멀리 보면 어리석은 짓이오.”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껏 우리가 조사했던 양천은 그런 악수를 둘 인간이 아니지.”
“양천이 귀철검문을 무너트렸다면, 그것은 힘과 세를 과시하기 위함이 아닐 겁니다.”
“멸문을 시켜 얻는 이득이 다른 무엇보다도 크다는 뜻.”
“현재 양천이 원하는 일순위는 흑도의 세력 확장입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어리석은 선택을 내린 것이지요.”
“장기적으로 봐도 어리석지 않은 선택이니 귀철검문을 무너트린 것이다?”
“이 한 수가 악수(惡手)가 아닌 호수(好手)라면, 어떤 이유로 무너트렸다고 봐야 타당할까요?”
“회유했군.”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귀철검문의 중요 인사 중 하나가 양천의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
“즉, 누군가가 문파를 배신한 것이로구만.”
제갈문호의 눈이 형형해졌다.
‘정말이지 이 사람은…….’
제갈문호는 전문적인 전략과 전술에 있어서 모용군보다 뛰어나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을 보고, 사건의 상황을 유추하는 능력만큼은 모용군이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정적을 헤쳐 온 자의 노회함이 돋보이는 안목이었다. 제갈문호는 모용군의 능력이 아쉬우면서도, 더더욱 경계심이 커지는 걸 느꼈다.
“이 보고를 받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가주께서 오시기 직전에야 같은 결론을 내렸지요. 귀철검문에 배신자가 있다고.”
“잘 보셨소.”
“아마 귀철검문의 절학에 정통했음은 물론, 한 번의 잘못 정도로는 인격에 흠이 잡히지 않을 인물일 겁니다.”
“그렇겠지. 문주의 최측근이나 그 제자 정도로 압축될 수 있겠어.”
“제 생각에는…….”
“제자일 확률이 높지.”
“그렇습니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군사가 왜 나를 불러 이 얘기를 해 주는지 이해했소.”
물끄러미 모용군을 보던 제갈문호가 탄식을 토해 냈다.
“왜 그러시오?”
“안타까워서 말입니다.”
“무엇이?”
“가주의 그 기가 막힌 안목과 머리를 천하 창생을 위해 쓴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용군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이 사람은 군사께서 생각하는 만큼 대단한 위인이 아니외다. 그러니 흰소리는 거기까지 합시다.”
“…….”
“지필묵을 주시오. 실무조에게 서신을 보내야겠소.”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모용군은 힘차면서도 섬세한 필치로 서신을 적었다.
“어떻소?”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다만…….”
“아무래도 예상보다 더 빨리 위험해지겠지.”
“동시에 더 깊게 들어갈 방법입니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군사께서는 괜찮겠소? 이 서신이 발송되는 순간, 실무조는 지옥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셈이오. 그리고 그 실무조에는 군사의 혈육도 있지 않소이까.”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이번 임무가 위험한 것은 저도 알고 제 여식도 압니다.”
“허허허!”
“또한, 저는 지금 한 아이의 아비가 아니라 무림맹의 군사입니다. 사사로운 정 때문에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순 없지요.”
“과연 대단하시오.”
종이를 흔들어 먹을 말린 모용군이 완성된 서신을 곱게 접어 인장을 찍었다.
“여기 있소.”
“곧장 보내겠습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소?”
“실무조와의 정보망을 최단 거리로 좁혀 두었습니다. 짧으면 사흘, 길어도 엿새 안에는 도착할 겁니다.”
“엄청난 속도로군.”
모용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면 이만 가 보겠소.”
그가 몸을 돌렸다.
막 집무실의 문을 열려는 모용군을 보며, 제갈문호가 입을 열었다.
“가주.”
“음?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시오?”
“앞으로는 지휘부에서 활동하시지요. 촌각을 다투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거처에서 쓸데없는 짓을 꾸미지 말란 뜻이기도 했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외다. 사흘 뒤, 지휘부가 모인 곳을 임시 거처로 삼으리다.”
* * *
“연…… 아, 아니! 셋째야! 나 좀 보자!”
가득상이 연호정을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무슨 일입니까?”
“이걸 봐.”
가득상이 품에서 손바닥보다도 작은 서신을 꺼내 내밀었다. 그 서신에는 깨알 같은 글씨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문(門)에서 온 거야.”
문이라 함은 무림맹을 뜻하는 것이리라. 연호정은 차분한 마음으로 서신을 읽었다.
잠시 후, 그의 눈이 흔들렸다.
가득상이 입맛을 다셨다.
“위험한 임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시작부터 중심부로 파고들 줄은 생각도 못 했어.”
“…….”
“음? 셋째야?”
연호정을 보던 가득상은 순간 깜짝 놀랐다.
부르르.
서신을 쥔 연호정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두 눈은 충혈되었고, 몸에선 스멀스멀 살기가 일었다.
“야!”
퍼뜩 놀란 연호정이 본능적으로 살기를 거두었다.
가득상이 혀를 내둘렀다.
“이놈 새끼는 어째 만날 때마다 살기를 쑥쑥 뽑아내고 난리야? 대사형 심장 터트리려고 작정했냐?!”
“죄송합니다.”
“거참!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래? 뭐 걸리는 거라도 있어?”
연호정은 귀철검문이라는 네 글자를 노려보았다.
귀철검문. 패도적인 위력과 어울리지 않는 담백한 검의(劍意)로 이름 높은 흑도의 명문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과거 연호정과 함께 무수히 많은 전투를 치렀던 철혈의 승부사가 있었다.
‘강량(姜亮)!’
흑제성 오대신장의 하나.
신궁(神弓) 묵비, 진양 등과 함께 흑도 무림 최강이자 최악의 고수로 불리던 사람이 바로 강량이었다.
강량의 검은 정파 무림의 어떤 검객보다도 깊은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이룬 경지와 힘은 모용군보다 확연히 아래였지만, 검의(劍意) 자체는 모용군 이상으로 깨달은 진짜 검객이 그였다.
귀철검문 역사상 최고의 천재.
문파를 잃고 외톨이가 되어 버린, 연호정 휘하에서 살아갈 희망을 되찾고 치열하게 백도와 부딪쳤던 열혈의 검사.
‘게다가…… 귀철검문이 멸문했다고?’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역사가 달라질지언정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건가?!’
무림맹은 본래 역사보다 훨씬 더 빨리 창설되었고, 양천 역시 이렇게 대놓고 흑도를 규합하지 않았다.
귀철검문은 멸문했지만, 또한 이렇게 빨리 무너지진 않았다. 본래 역사대로라면, 귀철검문의 멸문은 십 년 뒤에야 일어날 일이었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 모든 것이 바뀌고 있다.
“대사형.”
“으응?”
“대사형을 따르는 애들에게 일러 하나만 알아봐 주십시오.”
가득상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연호정의 이번 부탁이 지극히 사적인 문제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뭔데? 얘기해 봐.”
“멸문한 귀철검문에 생존자가 있진 않은지, 만약 있다면 그 명단을 구해다 주십시오.”
“……흠, 알겠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렇게 해 줘야 할 듯싶었다.
“근데 너 괜찮냐?”
연호정이 크게 심호흡했다.
“괜찮습니다.”
잠시 충격을 받았지만, 지금은 또 괜찮다. 그는 이번 임무의 좌장이었다. 수장이 흔들리면 임무 이전에 구성원들의 목숨이 위험하다.
가득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건 따로 알아보는 걸로 하고, 문에서 보낸 서신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
“가야지요. 다만, 사흘만 더 기다려 봅시다.”
“사흘? 왜?”
“이쪽에서 먼저 파고드는 건 의심을 살 수 있지만, 그쪽에서 먼저 접근하는 건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절 믿으십시오. 분명히 옵니다.”
이틀 뒤.
쾅!
주루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핏빛 무복을 입은 일단의 무리가 등장했다.
선두에 선 중년인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혈작문(血雀門)에서 왔다. 여기에 사내놈 둘, 계집 둘로 구성된 일행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