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205)
205화. 낭중지추(囊中之錐) (5)
“성공했답니다!”
모용군의 눈이 빛났다.
제갈문호는 드물게 흥분한 기색을 보였다.
“실무조의 요청에 양천이 응했답니다. 이동 중이란 연락이 왔으니, 지금쯤이면 이미 그쪽으로 진입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진짜로군.”
모용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제부터가 진짜야. 일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실무조 전원이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소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요.”
모용군이 제갈문호를 힐끔거렸다. 어째서인지 크게 걱정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걱정스럽지 않소?”
“걱정한다고 살 사람이 죽고, 죽을 사람이 살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다소 과격할 뻔했던 일 처리가, 생각보다 부드럽게 진행되었다는 것에 안심해야 할 때지요.”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그도 그렇군.”
확실히 제갈문호도 인물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무조에는 그가 아끼는 딸이 있다. 그런데도 저리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진심이든, 혹은 일부러 연기를 하는 것이든 범상치 않은 인물임은 분명하다.
“그래도 걱정은 해야 옳을 것이오. 성천십삼좌는 하나같이 인간이 아니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그들 정도의 무공이라면, 상대를 한 번 본 것만으로도 무슨 무공을 익혔는지와 그 무공의 특성은 물론,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까지도 알 수 있을 것이오.”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던 제갈문호가 서서히 진정했다.
“아직 이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경지이지만, 분명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은 모용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종지벽을 돌파하여 초절정의 영역에 오르고, 그 영역에서도 무수한 단련과 참오를 거듭한 끝에 지금의 경지에 오른 두 사람이다.
하지만 그처럼 드높은 경지를 구축했다 한들 무공지로(武功之路)에는 끝이 없는 법이다. 모용군은 물론 제갈문호 역시 성천의 경지의 편린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다른 사람은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가장 위험한 자가 둘이 있소.”
제갈문호의 눈이 반짝였다.
“후개, 그리고 당가주의 장녀지요.”
“정확하게 보셨소이다. 나아가 굳이 둘 중 하나를 꼽자면, 후개가 들킬 위험이 더 크지.”
제갈문호의 얼굴에 의아함이 일었다. 그 부분만큼은 생각이 달랐던 것이다.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저는 오히려 당상아, 그 아이가 더 위험하다고 봅니다만.”
“당가의 무공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소. 무공명이야 워낙에 유명하니 말만 꺼내도 다들 알지만, 실질적으로 당씨의 무공을 본 자들 중엔 생존자가 거의 없소. 특히 흑도인이라면.”
맞는 말이었다.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반면 개방도는 중원 전역에 퍼지지 않은 곳이 없소이다. 매듭 수가 적은 일반 방도들의 무공은 하찮기 그지없으나, 그 하찮은 무공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개방 무공이오.”
“그렇지요.”
“일반 방도들이 익힌 무공과 후개가 익힌 무공은 천양지차일 터. 그러나 투왕의 눈이라면, 그 극심한 차이 속에 깃든 무공의 핵심을 읽어 낼 수 있을 게요.”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모용군의 얼굴에 흥미가 어렸다.
“군사의 반응을 보니, 어째 그런 문제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으시는 듯하오.”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미리 대비를 했으니까요.”
“오호.”
“본인 정도만 되어도 기도를 읽고 상대의 무공 유파를 추측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하물며 투왕임에야.”
“뭔가 대책을 세워 두신 게로군.”
“세상에는 신비한 기물(奇物)이 많습니다. 그리고 본가는 그 신비와 전설로 점철된 기물에 관심이 많지요.”
“그건 또 뜻밖의 말씀이오. 지성을 좇고 지혜의 만개를 추구하는 제갈세가가 그처럼 이해하기 힘든 기물에 신경을 썼단 말이오?”
제갈문호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해하기 힘들다면, 이해할 때까지 파헤쳐야 하는 본가 석학들의 호기심 탓이지요.”
모용군이 빙긋 웃었다.
“한데 좀 섭섭하오이다. 그런 물건이 있다면, 이번 작전의 지휘권자인 제게 언질을 주셨어야 옳지 않소?”
제갈문호가 고개를 숙였다.
“그 부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어떠한 이유도 대지 않고 그저 죄송하다고 한다.
모용군은 제갈문호의 그러한 반응에 내심 놀랐다.
‘꽤 당당하군.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닐 텐데.’
제갈문호는 공사 구분이 확실한 사람이다. 상대를 믿지 못해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럴 일은 절대 없는 사람인 것이다.
괜스레 궁금해진 모용군은 한 번 더 그를 건드려 보았다.
“혹, 이 사람을 못 믿는 것이오?”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모용가주는 분명 개인적으로 믿을 만한 사람은 아니지요. 하나 가주께 모든 것을 맡긴 지금, 사감으로 임무에 지장을 줄 생각 또한 없습니다.”
“흐음.”
“가주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실무조에는 부족한 이 사람의 딸내미가 있습니다. 딸아이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도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도울 생각입니다.”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물끄러미 제갈문호를 보던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한 기물이 있든 없든, 작전에 큰 변동은 없었을 것이오. 다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하오.”
“새겨듣겠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모용군이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잠시 다녀오겠소.”
제갈문호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어디 가십니까?”
“아, 이걸 말씀드리지 않았구려.”
“……?”
모용군이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언제이던가…… 그래, 실무조가 출정하기 직전이로군. 그때 연 군장이 내게 이런 말을 했소이다.”
“…….”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함께 힘을 합치면, 임무의 성공 가능성이 훨씬 커지지 않겠느냐고 하더군.”
제갈문호가 피식 웃었다.
‘정말이지 배포 하나는 예술이로군.’
아마도 농담 반, 진담 반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모용군이 따라오리라고는 절대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자신이 무림맹에 없는 틈을 타 괜한 수작으로 맹을 뒤흔들까 싶어 경고의 의미로 날린 말이리라.
‘제아무리 적이라도, 모용가주씩이나 되는 사람에게 쉬이 건넬 말은 아니지. 이 사람아, 너무 위험한 언행은 금물일세.’
그때, 모용군이 입을 열었다.
“한데 생각해 보니 말이오.”
“……?”
“연 군장 말도 일리가 있지 않았겠소?”
순간 제갈문호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그 말씀은 설마……?”
“허허허, 안 그래도 답답하던 차였소. 제대로 된 도움은 주지 못하더라도, 명령과 보고 체계가 더 빠르고 확실해서 나쁠 건 없지 않소이까.”
“진정 그곳에 가실 생각입니까?”
모용군이 빙긋 웃었다.
“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젊은 시절 내 나름대로 천하를 종횡하며 많은 걸 배웠소이다.”
“……!”
“젊을 적 기분도 낼 겸, 실무조에 힘도 실어 줄 겸 이 사람이 직접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 같소.”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작전의 지휘권자가 현장 요원 근처에서 함께 활동하는 것은 여러모로 큰 이득이다. 다만 모용군의 위치와 무림맹 봉공으로서의 이름값 때문에 쉬이 제안하지 못했을 뿐이다.
한데 직접 가겠다니? 천하의 모용군이?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이지만.’
놀라움 가득했던 제갈문호의 눈 속에 한 줄기 긴장이 드리워졌다.
‘그래서 더 이상하군.’
모용군은 절대 전면으로 나서는 유형이 아니었다.
애초에 나설 생각도 없었던 사람이다. 한데 느닷없이 지금, 생각을 바꿔 흑도 세력이 바글거리는 곳에 직접 가겠다고 하니 어찌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제갈문호의 의심을 읽은 것인지, 모용군이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군사처럼 이 사람 역시, 이번 작전만큼은 최선의 노력을 다할 생각이니까.”
가만히 모용군의 안색을 살피던 제갈문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가주의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혹시 모르니 맹 차원에서 수행원을…….”
“아니, 그건 필요치 않소. 괜히 인원이 늘어 봤자 흑도 놈들의 관심만 끌 뿐이니까.”
모용군이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린 그의 눈빛은 참으로 오묘했다. 흥분, 기대, 야심, 욕망, 긴장 등등 무수히 많은 감정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반 시진 뒤에 출발할 것이오. 군사께서는 출맹에 차질이 없도록 미리 허가서를 전달해 주시길.”
* * *
“……음.”
태사의에 앉아 있던 양천이 서서히 눈을 떴다.
‘꿈인가.’
정말이지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은, 깨어나자마자 참으로 더러운 기분을 선사했다.
움찔!
양천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쓰다듬었다.
‘아직 뜨겁군.’
피부 위로는 드러나지 않은, 오로지 양천만이 느끼고 있는 강렬한 맥동.
그 연원을 알기 힘든 힘이 오늘따라 유독 거칠게 날뛰고 있었다.
양천의 두 눈에 불같은 살기가 아른거렸다.
‘사음(邪淫).’
스스로를 사음의 신(神)이라 소개한 자의 화사한 웃음.
그리고, 그 천진난만한 얼굴 속에 감추어진 순수악의 광포함과 절대적인 무공.
콰득!
왼손이 태사의의 팔걸이를 그대로 으스러트렸다.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는가.’
자칭 사음의 신이라 소개한 자의 힘은 지금까지도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내상이라면 내상이랄 수 있지만, 또한 이것은 내상이라고 볼 수 없었다. 무공 구현이나 건강에는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고 있으니까.
다만 특유의 끈적끈적하고 기분 나쁜 열기가, 한 번씩 그의 기분을 진창으로 처박았다.
‘기분 나쁜 놈.’
당시를 떠올리던 양천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아직도 그 승부에 집착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 집착 가득한 마음이, 이 통증이라 볼 수 없는 흉통의 원인임을.
‘대체 그놈은, 아니 그놈들은 어디에서 나타났단 말인가.’
하늘에서 내려왔을까, 땅에서 쑥 하고 올라왔을까.
양천은 세상에 나와 뜻을 품은 후, 중원의 역사는 물론 새외의 세력과 주요 인물까지도 몽땅 공부하고 외웠다.
최소한의 변수조차 용납할 수 없었기에, 무공을 완성하는 것만큼이나 지식을 쌓는 데에도 노력을 쏟았다. 그 시절의 노력은, 감히 제갈세가의 석학들 이상이었다고 확신할 정도였다.
그렇게 쌓이고 또 쌓이는 지식 속에서.
위험하기 그지없는 하나의 세계로 손을 뻗는 순간, 그들이 나타났다.
‘……나를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양천의 얼굴이 조소가 깃들었다.
‘웃기는 놈들이야. 불과 수개월 만에 흑도의 왕이 되어 한 지역을 손에 넣었거늘, 너희의 같잖은 힘이 필요할 성싶었더냐?’
본래는 이렇게까지 빨리 계획을 실행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느닷없이 무림맹이 창설되었고, 그 여파로 흑도 문파들이 위축되었다. 와중에 그 사특한 종교 쪽에서도 압력을 가했다.
딱히 그들을 신경 쓰고 싶진 않았으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자금 지원은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말마따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흑도 규합 자체가 더 어려워질 판국이었다.
그래서 양천은 수십 년간 계획했던 흑도 통일의 위대한 첫걸음을 떼었다.
아니, 이미 걷고 있던 길 위에 깃발을 꽂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그래도.’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좀 사는 것 같군.’
그는 야심이 큰 사람이었다. 그 거대한 야심을 이루고자 수십 년을 참고 공부했을 정도로 인내심도 깊었다.
이제 그 뜻을 이룰 때가 왔다.
천하 분립, 장악, 통일의 삼 단계를 걸쳐 세상의 주인이 되는 그 뜻을.
그때,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부주님. 무종문의 후예들이 부에 도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