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211)
211화. 거짓된 왕 (5)
화원(火猿)의 눈에 요악한 살기가 일었다.
“어디에 있다고?”
“모른다니까.”
“…….”
“그 양반, 원래 우리 몰래 여기저기 잘 쏘다녀. 새삼스럽지도 않구먼, 뭘.”
가득상의 퉁명스러운 대꾸에도 화원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그저 두 눈에 어린 살기가 한층 진해졌을 뿐.
천하의 고수라도 절로 고개를 돌리고 싶어질 눈빛이었다. 가히 눈빛만으로 사람도 죽일 수 있겠다.
하지만 가득상 역시 배포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눈에다가 야명주를 박아 놨나? 되게 신기하네?”
“…….”
“그렇게 살벌하게 노려봐도 모르는 건 모르는 거야. 이만 나가 주셔.”
화원이 입을 열었다.
여인답지 않게 낮고도 서늘한 음색은 화원이라는 이명답지 않게 섬뜩하기만 했다.
“우리는 너희에 대한 호위와 감시를 명령받았다.”
“어쩌라고?”
“대상이 없는 호위와 감시는 없어. 마지막으로 묻는다. 무종문의 정(定)은 어디에 있지?”
그때, 한옆에서 검을 손질하던 패율이 입을 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하지.”
가득상을 노려보던 화원이 패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패율은 그녀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저 마른 헝겊으로 검신(劍身)을 닦을 뿐이었다.
“네년의 혓바닥이 아니더라도 충분하다 못해 넘칠 만큼 노곤해. 다시 한번 이쪽 신경 거슬리게 하면, 너희 모가지 싹 날리고 나서 부주한테 따지러 간다.”
화원의 눈이 섬뜩한 안광을 발했다.
패율이 납검했다.
스르릉! 툭.
“알아들었으면 이만 꺼져.”
섬뜩한 눈으로 패율을 보던 화원이 다시 가득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득상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라고 하시네?”
“…….”
“나중에 또 보자, 원숭이 인간.”
화원이 몸을 돌렸다.
장원을 나서기 전, 그녀가 말했다.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길 경우, 호위대장의 권한으로 너희 중 하나를 죽이겠다.”
패율이 피식 웃었다.
“제발 좀 그래 주게. 칼질을 너무 쉬었더니 관절이 녹슨 것 같군.”
끼이익. 쾅!
장원의 문이 닫혔다.
멀뚱멀뚱 문을 보던 가득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살벌하네유.”
패율이 콧방귀를 뀌었다.
“짐승끼리 기 싸움하는 거지. 기에 눌리는 순간 잡아먹히는 거거든.”
“그래도 너무 자극한 거 아닙니까?”
“그럼 저 싸가지 없는 년 말투를 그냥 무시하라 이거냐?”
“뭐, 무시까지는 아니어도요. 너무 자극한 거 아닌가 싶네요.”
“자극은 무슨. 오히려 이 정도 언사에 일 그르치면 저쪽이 모자란 거 아니냐?”
그게 또 그렇게 되는 건 아닌데…….
몇 마디 더 하려던 가득상은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차피 말한다고 들을 양반이 아니었다. 천성이 거친 인간한테 예의범절에 관해 논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긴, 나도 남한테 예의 운운할 싸가지는 아니구먼.
“그리고 저년, 나 때문에 물러난 거 아니야.”
“잉?”
패율이 턱으로 장원 지붕을 가리켰다.
그의 턱짓에 따라 시선을 돌린 가득상의 눈에 비수를 가다듬는 당상아의 모습이 보였다.
당상아가 빙긋 웃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없수다.”
가득상이 헛기침을 했다.
‘쓰벌, 이거 난감하네.’
패율이든 당상아든, 장원 내에서 묵룡부의 조직 체제 개편으로 한창 골치를 썩이고 있는 제갈아연이든.
그들 모두 연호정의 말이라면, 그게 얼마나 부당한 일이든 일단 수긍부터 했다. 하지만 자신은 연호정이 아니었다.
‘이 미친 인간들을 대체 어떻게 다독이냐고.’
가득상은 탄식했다.
‘정상이 하나도 없어.’
그는 자신 역시 정상이 아니라는 걸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 * *
장사의 거리를 걸으며, 연호정은 생각했다.
‘활기차군.’
무림은 백도니 흑도니 하며 서로를 견제하고 있지만, 정작 일반 양민들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전혀 다른 무대 위에서 각자의 역할에 몰두한다. 강호 무림은, 중원 천하는 그러했다.
“악록산에서 잡아 온 대호(大虎)의 가죽이 은으로 스무 냥!”
“좋은 비단이 들어왔어요! 병부의 고관이 즐겨 찾는 최상급 비단이랍니다!”
“들어오세요! 오늘 새벽에 잡은 돼지예요!”
장사치들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 댔고, 거리를 꽉 채운 사람들은 저마다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차라리 구분이라도 되어 있다면.’
피비린내 나는 무림의 세상과 양민들의 삶이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다면.
그 경계가 확실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했고, 무림의 전쟁은 결국 민생의 치안까지도 뒤흔들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양민이 억울하게 죽어 나갔다.
‘씁쓸하군.’
흑제성을 세운 무수히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민생 안전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최소한의 규칙이라도 만들고 싶었다. 싸우는 게 일이라도 무대가 다르다. 그것은 선이니, 영역이니 하는 것들을 운운할 게 아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의지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었다. 또 다른 사람의 의지 역시 그만큼 확고부동했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막아야 해.’
새외의 침공도, 그리고 흑과 백의 부딪침도.
다른 무대에서 활기차게 뛰어노는 이들에게 어떠한 피해도 가지 않도록.
‘하지만 뭐…….’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지금은 눈앞에 있는 일부터 해결해야겠지.’
아닌 말로, 무림맹 내부의 일도 다 해결하지 못했다. 그것도 얼마 안 남은 정도가 아니라 아직도 산더미다.
‘나도 참 피곤한 인생을 택했군.’
어쩔 수 없다. 자신이 움직이지 않으면 가족이 피해를 볼 테니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거리를 걷던 연호정에게 한 줄기 전음이 들려왔다.
[전방 십오 장 갈래에서 좌측으로 꺾으면 허름한 객잔 하나가 나올 겁니다. 그곳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연호정은 개방 방도의 말대로 갈래에서 좌측으로 꺾었다.
‘저기로군.’
허름하다고 했지만, 막상 보니 그렇게까지 허름하진 않았다.
다만 주변 건물과 잘 녹아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호정도 들어서 아는 거지, 그냥 지나가다 봤으면 그곳이 객잔인지도 몰랐을 뻔했다.
절묘한 위치. 부자도, 거지도, 무림인도 찾아올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연호정은 거침없이 그 객잔으로 들어갔다.
드르륵.
문을 열자 은은한 목재 냄새와 묵직한 다향이 맡아졌다.
주인장으로 보이는 중년인은 사람이 들어와도 꾸벅꾸벅 졸고만 있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알 수 있었다. 누가 봐도 자고 있는 듯한 저 중년인의 의식은, 실제로는 제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
객잔 한구석에 있는 계단으로 눈을 돌린 연호정은 이내 거침없이 그곳을 올랐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면서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을 주고받던 사이라도 말이지.”
낮게 깔린 목소리에 실린 웃음기.
“이상하게 타지에서 만나면 그렇게 반갑더라, 이 말일세. 참 이상하지 않나?”
객잔 이 층 중앙 탁자.
그곳에 모용군이 있었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도 그러한가? 이왕이면 내가 반가웠으면 싶은데.”
반갑긴 개뿔.
연호정은 나직이 투덜거렸다.
“확실히 우리 사이가 보통 살벌한 사이는 아니었던 모양이오. 얼굴 보자마자 골치부터 아픈 걸 보면.”
“허어, 그건 또 섭섭한 말이로군.”
“그렇소?”
“출맹하기 전에 자네가 그러지 않았던가. 이왕이면 함께 가는 게 어떻겠냐고. 지휘자와 실무조가 힘을 합치면 임무 성공률도 높아지지 않겠냐고 하지 않았던가?”
“그 비슷한 말을 한 것 같긴 하오.”
“허허허.”
모용군이 손으로 자신의 맞은편을 가리켰다.
“그간 고생했네. 일단 앉게나.”
“그럽시다.”
연호정이 사뿐히 의자에 앉았다.
모용군의 눈이 빛났다.
‘달라졌군.’
그는 연호정의 변화를 한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이전처럼 기운이 들쭉날쭉하지 않아. 몹시 안정되어 있어. 뭔가 균형을 이룬 듯하군.’
연호정이 무슨 무공을 익혔는지는 모른다. 연가의 무공을 익힌 것 같긴 한데, 손속을 나눴을 때도 그렇고 연원을 파악하기 힘든 고대의 무공 또한 연성한 듯했다.
뭐가 되었든, 출맹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발전이 있었던 모양이다.
“역시 자네는 대단해.”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오?”
모용군은 굳이 속내를 감출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출맹 전과는 또 달라졌군. 그새 무슨 깨달음이라도 있었던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거창하게 깨달음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소. 균형을 이루지 못한 기운은 언제라도 파탄이 나기 마련인 법. 그것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애썼을 뿐이오.”
“애쓴다고 다 자네처럼 성취가 빠르면 세상에 고수 아닌 사람 없겠네.”
“칭찬으로 듣겠소.”
“좀 천천히 가게. 이러다가 따라잡힐까 무서워서 어디 살겠나.”
연호정의 눈이 모용군의 검을 훑었다.
“그러는 당신도 보통이 아닌데.”
“음?”
“오랜만의 나들이에 들뜨기라도 한 거요? 검이 검집에 들어갔는데도 혈향이 그리 진해서야.”
모용군의 눈이 번쩍였다.
“그게 느껴지던가?”
“내가 그런 쪽으로는 워낙에 민감해서.”
“허어!”
연호정이 빙긋 웃었다.
“이런 것도 신경 안 쓰면 모르지. 다만, 당신은 현재 내가 가장 주시하는 사람 중 하나거든. 다시 만날 때마다 뭐가 바뀌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할 것 같은지 자꾸만 분석하게 된단 말이야.”
“그건 정말 영광이구만.”
“몇이나 베었소?”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내가 희대의 마두도 아니고, 쓸데없는 살생은 하지 않는다네.”
“차라리 살육만 아는 마두가 낫지. 당신은 너무 위험해.”
“피차일반 아닌가? 어쩌다 그 연배에 그런 괴물이 되었나?”
“세상이 너무 각박해서. 내 사람들 지키려면 뭐든 해야지.”
모용군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 아나? 가끔 정말 꼴도 보기 싫지만, 또 이럴 때는 자네만큼 재미난 대화 상대도 없다네. 적어도 자네와 싸우면 심심할 일은 없어서 좋아.”
“나중에 심심하게 만들어 드리리다.”
“패배 선언인가?”
“무슨 소리요? 당신 묻어 주겠다는 건데.”
“허허허!”
객잔이 떠나가라 웃는 모용군을 보며, 연호정이 담담하게 물었다.
“어인 심경의 변화시오?”
“음?”
“당신 말마따나 출맹 전에 내가 말했지. 이왕이면 함께하자고.”
“그랬지.”
“그때 바로 승낙했어도 의심이야 했겠지만, 멀뚱멀뚱 있다가 이제야 적진으로 들어오다니? 의심하지 않으려야 안 할 수가 있어야지.”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한기가 느껴지는 그 미소에 나름의 진지함이 묻어 나왔다.
“전에도 말했네만, 이번 일만큼은 진지하게 임할 생각이라네. 내게도, 그리고 자네에게도 워낙에 중요한 일이니까.”
“그건 알고 있소이다. 한데 말이오.”
연호정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했다.
섬뜩한 변화였다.
“내가 아는 당신은 한 번에 두 가지, 세 가지 일도 거뜬히 처리할 수 있는 양반이라 말이오.”
“…….”
“이번 임무에는 어떠한 술수도 없이 진지하게 임하겠지만, 굳이 호남까지 온 이유가 무엇이오? 이번 일이 끝나면 제대로 난장 한번 쳐 보시게?”
모용군의 얼굴도 연호정처럼 무심하게 변했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사람 신경 쓰이게 하는 데에 탁월한 재주가 있으시오.”
“내가 아는 자네도 신경 좀 쓰인다고 본인 일 못 할 위인은 아니라서 말이야. 그 정도 믿음은 있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오늘도 한 방 맞고, 한 방 때렸군.”
“정말이지 자네나 나나, 누구 하나 박살 나지 않는 한 평생 이러고 살 운명인가 보이.”
연호정이 만사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됐소. 오늘은 이쯤 합시다. 보고나 들으시오.”
“세이경청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