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215)
215화. 와신상담(臥薪嘗膽) (3)
“뭐라고?”
화원의 눈에 이채가 발해졌다.
“귀철검문의 후계자가?”
“그렇습니다. 현재 장사 동부 쪽으로 향하고 있다 합니다.”
화원은 생각에 빠졌다.
‘장사 동부라.’
어떻게 빠져나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 장사는 묵룡부의 앞마당이었다. 당연히 걸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대담한 놈이긴 하군.’
설마하니 이곳에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배짱 하나만큼은 알아줄 만하다.
‘문제는.’
이번 귀철검문 멸문지계에는 흑양과 휘하 흑양대가 동원되었다.
흑양은 십이지신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자랑했다.
그는 처음부터 양천을 섬긴 이가 아니었다. 양천이 외부에서 들인 인사로, 그 실력만큼은 십이지신 중에서도 상위를 다투었다.
게다가 흑양이 직접 다스리는 흑양대 또한 그 무력이 십이지신 휘하 부대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정예였다. 주인이나 부하들이나, 하나같이 뛰어난 무사들이란 말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 놓친 귀철검문의 후계자까지 깔끔하게 잡아낸다?
“우리 애들 중에 여기서 가장 가까이 있는 애들이 몇 조지?”
“화원 이 조(火猿二組)가 장사 남부에서 귀환하고 있습니다. 지금쯤 십 리 안팎까지 왔을 겁니다.”
화원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잘 됐군.’
화원대는 총 다섯 개 조로 이루어져 있고, 숫자가 낮은 조일수록 강했다.
그중 이 조는 일 조에 비해 크게 모자라지 않는 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수많은 일을 동시 진행하는 일 조와 달리, 이 조는 철저하게 적의 섬멸을 위해 움직이는 살육조였다.
화원은 조금 떨어져 있는 장원을 바라보았다.
아직 무종문의 정이란 놈은 장원으로 기어들어 오지 않았다.
‘설령 돌아왔대도 내가 움직일 수는 없을 테지만.’
부주님께서 직접 내리신 명이다. 그녀는 욕심이 많았지만, 그 이상으로 양천에게 충성하는 사람이었다.
화원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흑양대 전부가 움직였나?”
“전부가 움직였지만 모두 흩어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만일 귀철검문의 후계자와 맞붙는다면, 많아야 오십 내외로 예측됩니다.”
“오십 내외라.”
그 정도면 충분하다.
숫자에서 밀린다 한들 이쪽에는 ‘그 물건’이 있으니까.
“이 조에게 전해라. 귀철검문의 후계자를 쫓으라고.”
명을 내리면서, 화원은 흑양을 떠올렸다.
‘떨떠름한 자.’
흑양은 믿을 수 없는 자였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남자. 그러나 그녀가 흑양의 일에 끼어드는 것은 단순히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이번 일로 부주님의 눈에 들어야 해.’
그녀는 묵룡부가 세워지기 전, 몇 번의 큰 실수를 저지른 전적이 있었다.
다행히 양천은 그녀를 용서했지만, 화원은 위기감을 느꼈다. 자신을 보는 양천의 눈빛이 점점 무심해지고 있음을 알아챈 것이다.
‘미안하군, 흑양.’
다소 치사하더라도 점수를 따내려면 이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공로를 쌓다 보면, 언젠가는 부주님께서 직접 무공 몇 수를 전수해 주실는지도 모른다.
저 백서를 위시한 몇몇 십이지신의 실력자들처럼.
부하가 물었다.
“만일 흑양대가 먼저 잡았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라고 전할까요?”
“만일 흑양대가 한발 빨랐다면…….”
화원의 두 눈에 요기(妖氣)가 어렸다.
“가능하다고 판단될 시, 기습으로 몽땅 죽여 버리고 인질을 훔쳐. 혹여 놈들이 검문의 후계자를 죽였다면, 그래도 싹 묻어 버려라.”
화원이 미소를 지었다.
“귀철검문의 후계자는 우리가 잡은 게 되는 거야.”
* * *
“허억! 허억!”
강량의 호흡은 이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후우웅!
느릿하고도 음유한 장력이 그의 등판을 노리고 쏘아졌다.
강량의 손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파악!
장력이 반으로 갈라졌다.
철컹!
장력을 가른 대검이 땅에 박혔다. 끝까지 검을 쥐고는 있었지만, 그 검을 들 힘이 없었다.
‘이럴 수가.’
강량은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도 기가 막힌 것을 느꼈다.
‘내가 고작 일각도 못 버티고 이 꼴이 되었다고?’
귀검(鬼劍)을 극에 이르도록 연마하기 위해서는 극한의 체력과 한계를 뛰어넘는 근력이 필요하다.
즉, 강량은 체력에 자신이 있었다. 타고난 재능에 안주한 적도 많았지만, 체력 연마만큼은 단 한 순간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한데 꼴이 이게 뭔가?
‘이놈들, 차륜전(車輪戰)에 극도로 익숙한 놈들이다.’
누구 하나 튀려 들지 않는다.
부드럽게,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목표물의 체력을 지속적으로 깎는 전술을 쓴다. 와중에 아군이 죽거나 다치면 평정심이 흐트러질 만도 한데, 이놈들은 그런 것도 없었다.
마치 사고할 줄 모르는 인형처럼.
그저 몸에 익은 전술로 상대를 철저하게 무너트릴 뿐이었다.
“쿨럭! 헉헉! 이, 이 자식들! 너희도 흑도를 표방하는 호걸이라면 당당하게 덤벼라!”
그때, 흑장이 말했다.
“뭣들 하고 있느냐. 더 압박해라.”
흑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흑양대가 한 걸음 더 전진했다.
후욱.
모두가 한 걸음 전진했을 뿐이지만, 포위망이 엄청나게 조여든 느낌이었다.
그 일 보(一步)가 주는 압박감이 엄청났다. 내공 발산을 더한 것도 아닌데, 순간적으로 몸이 위축될 정도였다.
심리의 틈을 노리는 동작. 그들의 전술은 죄다 그런 식이었다.
우우우우웅.
강량은 이를 악물고 대검을 들었다.
‘이리 허무하게 당하는가.’
안타까웠다.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미안했다.
차라리 죽이고 가라며 무릎을 꿇던 검문의 검사들이 떠올랐다. 문파가 멸문한 와중에도 끝까지 자신과 함께했던 충직한 검사들이었다.
위이이잉.
불안정한 귀왕진기가 대검 가득 담겼다.
평소보다 절반도 안 되는 효율이었다. 휘둘러 봤자 위력도, 속도도, 발경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게 뻔했다.
하지만 휘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눈앞에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집을, 부모 형제를 앗아 가 버린 원수의 한패들이.
훅.
대검에 실린 귀왕진기가 일순 대검 내로 완전히 스며들었다.
흑장의 눈이 번뜩였다.
“조심해라!”
파아악!
강량이 힘찬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귀영신보가 아니었다. 이것은 힘과 살기를 드러내는 보법이었다.
그리고 보법에 이어지는 두 번째 귀검.
‘귀살검(鬼殺劍)!’
귀영에서 이어지는 귀살검.
그 살기 넘치는 검격이 흑양대원 다섯을 향해 쏟아졌다.
쩌어어어어엉!
엄청난 공명음이 울렸다.
주르륵.
흑양대원들의 귀에서 핏물이 흘렀다. 고막이 터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누구 하나 쓰러지거나 대열을 흐트러트린 자가 없었다. 오히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가면 속 눈이 무심하기만 했다.
강량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놀라운 검이로군.”
어느새 흑양대원 사이로 들어와 강량의 일격을 막은 자는 바로 흑장이었다.
“예리함을 표방하고 있지만 검의 근원은 철저한 파괴라. 과연 패왕의 검맥(劍脈)이라는 명성을 들을 만해.”
흑장이 싸늘하게 말했다.
“하지만 역시 어리군.”
강량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귀살검을 팔로 막아?’
제대로 들어가면 거대한 바위도 일검에 날려 버릴 수 있다는 패도적인 검식.
진기가 불안정했다고는 해도 혼신의 힘이 담긴 귀살검을 양팔을 교차해 막았다. 말도 안 되는 실력이었다.
퍼억!
“컥!”
흑장의 발길질에 강량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패색이 짙으면 후퇴를 염두에 둔 승부수를 던지는 것이 전략의 기본이다. 화를 다스리지 못해 자포자기식 공격으로 힘을 다 소모하다니.”
흑장이 뒷짐을 지며 몸을 돌렸다.
“재능만 출중한 머저리였군.”
“쿨럭! 커헉!”
연신 핏물 섞인 밭은기침을 내뱉던 강량이 충혈된 눈으로 흑장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흑장이 말했다.
“전투 불능이 되었으니 죽일 필요는 없겠지. 부(府)로 이송한다. 날뛰지 못하게 사지부터 부러트리도록.”
우우우웅.
흑양대 전원의 눈에서 섬뜩한 살기가 뿜어졌다.
강량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렇게 끝이라고?’
차라리 적의 손에 목이 달아났다면 이보다는 덜 치욕스러웠을 것이다.
적의 손에 잡힌 것도 모자라 원수에게 이송을 당해?
‘그럴 바에야 자결하고 만다!’
왼손으로 검날을 잡은 강량은 남은 힘을 쥐어짜 검을 목으로 가져다 댔다.
빠각!
“크윽!”
왼팔이 부러지고 대검은 옆으로 튕겨 나갔다. 강량의 속내를 귀신처럼 눈치챈 흑양대원 하나가 그를 막은 것이다.
흑장이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어설픈 애송이들의 마지막 발악은 항상 그런 식이더군.”
강량은 이를 악물었다.
절대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억울함과 후회로 점철된 눈물이었다.
‘죄송합니다.’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운명. 적의 손에 생사의 의지를 유린당하는 현실.
강량은 인생 최초의 후회에 낙심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두 번째 후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스르륵.
흑양대원 하나가 발을 들어 올렸다. 강량의 다리를 그대로 분질러 버릴 생각인 것이다.
강량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
왜일까?
귀왕진기는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았고, 육신도 한계를 맞이했다. 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감각은, 놀랍게도 이곳에 있는 어떤 사람보다도 빨리 ‘하나’의 기척을 잡아냈다.
비록 그 차이가 지극히 미세하긴 했지만.
‘뭐……?’
뭐지, 라는 생각이 다 끝나기도 전.
한 줄기 망치 같은 무형의 권풍(拳風)이 흑양대원들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파아아아아앙! 퍼억!
무시무시한 파공성과 함께 산산조각이 난 뼈와 핏물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강량의 다리를 부수려던 흑양대원의 머리통이 박살 나 버린 것이다.
풀썩.
머리를 잃은 흑양대원이 그대로 쓰러졌다. 손발이 연신 꿈틀거리는 모습이 기묘한 섬뜩함을 자아냈다.
흑장의 눈이 커졌다.
‘뭐야?!’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그 누구의 눈으로도 쫓을 수 없는 신속(神速)의 바람이 들이닥친 것은.
부아아아앙!
공기가 타들어 간다.
한 줄기 화살처럼, 혹은 비창(飛槍)처럼.
녹청빛 화려한 광채를 발하며 날아든 거대한 용 한 마리의 등 뒤로 불꽃의 날개가 번뜩였다.
흑장이 외쳤다.
“피해……!!”
퍼버버버벅!
일순간이었다.
무지막지한 속도로 접근한 누군가가 흑양대원 일곱의 머리통을 그 자리에서 날려 버렸다.
흑장의 눈이 커졌다.
뭘 어떻게 한 건지 보이지도 않았다. 엄청난 기세를 뿜는 무언가가 다가오더니, 이윽고 부하들 일곱이 죽어 나갔다.
심지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후우우우웅.
녹청빛 화려한 운무가 돌풍이 되어 흑양대원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강량이 쓰러졌던 곳, 바로 그 자리였다.
콰아앙!
계곡 일대의 땅이 모조리 뒤흔들렸다.
그야말로 폭발적인 진각이었다. 다리를 들지도 않은 채 진각을 터트려 전신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극상승의 경지였다.
그리고 그 강력한 진각으로 끌어모은 힘은.
돌풍이 되어 승천하는 푸른빛 신룡의 위엄이 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펑! 퍼퍼펑! 퍼퍼퍼퍼펑!
일수유에 열여덟 번이나 휘몰아친 무적의 장법.
강동 사람들은 이 장법을 반룡장(反龍掌)이라 불렀다. 하지만 이것은 반룡장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괴이하게 뒤틀려 있었다.
청룡기의 부드러운 전사(轉絲)로 파괴력을 극대화했다. 이건 그저 반룡장의 형(形)만 빌려온, 전혀 다른 무공이었다.
쿠르르르릉.
돌풍이 사그라들고 먼지가 걷혔다.
그 폭발의 장력이 휩쓸고 지나간 곳은 온통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귀철검문의 후계자.”
강량이 흐린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
내리쬐는 태양을 등진 한 사람.
푸른 안광의 괴인이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위엄을 뿜어내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량 맞군.”
연호정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