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225)
225화. 뒤흔들다 (5)
“부주님, 급보입니다.”
“급보?”
양천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백서의 표정은 여느 때처럼 삭막했다. 하지만 품고 있는 기도는 파랑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무슨 소식이기에?”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군이 호남으로 진입했다고 합니다.”
“……모용가주가?”
양천의 눈이 번뜩였다.
본디 모용세가는 중원 최북단에서도 동쪽, 황량한 요녕성에 뿌리를 내린 가문이었다.
그런 그들이 삼백 년 전, 혈교지란이 터진 이후 호남성으로 이주하여 자리를 잡았다.
즉, 호남성에는 흑도 연합인 묵룡부와 육대세가의 일익인 모용세가가 공존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서로 자리한 곳이 워낙 떨어져 있어 당장 부딪칠 일은 없겠지만, 훗날 세를 불릴 때는 분쟁을 피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모용가주라면 무림맹에 있어야 할 텐데?”
“그렇습니다.”
“이 시국에 느닷없이 호남으로 넘어왔다? 이유가 뭐라던가.”
“이유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동행이 없고 남하하는 속도가 느긋한 것으로 보아, 본가(本家)에 들를 일이 있는 듯합니다.”
“흐음.”
양천이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모용가주라.’
당대 육대세가, 본래는 칠대세가였던 강호 최고의 무가(武家)들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아본 바가 있었다. 특히 호남에 터를 잡기 직전에는 한 번 더 조사를 해 두었다.
‘모용세가는 강하다.’
육대세가에는 달리 서열이랄 게 없었다. 구파일방 중 소림과 무당이 단연 최고라 불리는 것과는 사뭇 다른 점이었다.
그러나 양천은 알고 있었다. 당대 육대세가 중 모용세가가 가장 위험한 축에 속한다는 것을.
구주명가가 건재했다면 모를까, 당대 무가 중 최고는 모용과 남궁이다. 다만 남궁에는 검제(劍帝)가 있어 명성과 영향력이 막강한 것이고, 모용세가는 실질적인 세력 자체가 크다.
‘충분히 위험이 될 만한 세력이야.’
아닌 말로, 양천이 나서면 천하의 모용세가라도 쉬이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성천십삼좌에 이름을 올린 이들의 경지가 그러했다. 단독으로도 대문파를 상대할 수 있는 초월자들인 것이다.
하지만 수장의 자리는 무거운 법, 사사로이 움직였다가 해를 입으면 조직에 크나큰 문제가 생긴다.
즉, 양천이 직접 나서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모용세가는 지금의 묵룡부라도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양천이 입을 열었다.
“수행원도 없이 단독으로 남하 중이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수행원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가문으로 가는 길이 맞는 모양이군.”
“그럴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흐음.”
양천의 얼굴에 은근한 흥미가 일었다.
“모용가주…… 모용가주라…….”
수행원 없이 움직인다는 건, 호남성 내 묵룡부의 존재를 아직 모르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만약 그걸 알았다면 이토록 배짱 좋게 나설 리는 없었을 테니까.
“백서, 자네 생각은 어떤가?”
“…….”
“참으로 탐스러운 먹잇감이 아닌가 말일세.”
백서가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만…….”
그답지 않게 말끝을 흐린다.
양천이 입맛을 다셨다.
“역시 아직은 이르단 말인가.”
“소신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니야, 자네 말이 맞네. 아직 본부의 힘은 약해. 마음만 먹으면 잡아 죽이지 못할 것도 없지만, 굳이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겠지.”
“그렇습니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아랫것들에게 따로 말해 두게나. 부딪치지 말라고.”
“명을 받듭니다.”
“다만, 모용가주의 동태는 지속적으로 살펴야 할 것이네.”
“물론입니다.”
“이만 나가 보게.”
절을 올린 백서가 묵룡전을 나섰다.
“허, 그것참.”
양천이 팔걸이를 툭툭 두들겼다.
“손만 뻗으면 잡아먹을 수 있는 먹잇감을 앞에 두고 후일을 위해 참아야 한다니.”
아쉽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복덩이 하나가 제 발로 굴러 들어온 참이니, 그게 어딘가. 당장은 좋은 인재를 얻은 걸로 만족해야 할 듯싶었다.
그때였다.
두웅!
‘……?!’
양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두웅. 두웅.
심장이 느닷없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스르륵.
옷깃을 젖힌 그가 흉부를 살폈다.
흉부 중앙에는 황금빛 장인(掌印)이 찍혀 있었다. ‘그때’ 당한 상처는 전부 나았지만, 이 장인만큼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사음.”
떠올리기 싫은 기억.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의 내부를 살폈다.
‘이상은 없군.’
그렇다. 오장육부는 물론 혈행, 혈맥, 혈도 모두 정상이었다.
하지만 양천은 왠지 모를 찝찝함을 느꼈다. 이렇듯 한 번씩 저도 모르게 심장이 쿵쿵 뛸 때가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차라리 몸에 이상이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다.
‘아직 그때의 승부에 연연하는 것이냐?’
하긴, 반드시 갚아 줘야 할 빚이긴 하지.
쓰게 웃던 양천이 입을 열었다.
“술을 내오너라. 새외에서 보낸 놈으로.”
쓸개를 씹는 심정으로, 놈이 보낸 술을 마시며 의지를 불태워야겠다.
* * *
“뭐야? 어떻게 된 거야?”
패율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저놈들 맞나?”
“맞습니다.”
“한데 이것들이 왜……?!”
당상아가 외쳤다.
“지금 한가롭게 대화나 나눌 때가 아니에요! 벌써 이십 장 안쪽으로 들어왔어요!”
빠르다.
경쾌하고도 공격적인 신법이었다. 그저 겁만 주려는 게 아니라 진짜로 죽일 기세였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저만한 강자들이 어디서?’
저들 중 연호정, 패율, 당상아에 비견될 만한 고수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절정고수만 사십이 넘었고, 그보다 약한 이들도 능히 일류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물며 전신 가득 피워 올리는 살기를 보면 무수한 실전을 겪은 이들임이 틀림없었다.
어지간한 문파에서도 이 정도 전력을 보내긴 쉽지 않다. 적어도 한 성(省)에서 이름 좀 날리는 문파쯤은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즉, 그들이 맞닥뜨린 병력은 문파 하나가 덮쳐드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모용군.’
연호정의 동공이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왜지? 굳이 이럴 필요가 있었나?’
당상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군장님!”
파아아아악!
그 순간 연호정이 무서운 기세로 뛰쳐나갔다.
불처럼 뜨거운 살기를 뿜어내는 연호정, 어느새 그의 손에 잡힌 장창이 녹청빛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부아아앙! 퍼어어억!
“크아악!”
“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숲을 울렸다.
전진 일격, 전사(轉絲)가 가득 실린 파괴력 넘치는 일섬(一閃)이었다. 돌풍을 일으키는 창술에 전방에서 돌진해 오던 셋의 몸이 갈가리 찢겼고, 휩쓸린 둘의 팔다리가 하늘을 날았다.
쿠우웅!
천지를 뒤흔드는 진각은 언제 들어도 호쾌하기 짝이 없었다.
호왕(虎王)의 전진, 백호군림보만큼 힘이 넘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호수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신룡(神龍)의 발걸음에는 흐르는 물 같은 유연함과 신비로운 기도가 한가득 실려 있었다.
연호정의 창이 불을 뿜었다.
퍼어억! 퍼어어억!
매섭게 몰아치는 장창이 좌우 삼 장을 휩쓸었다.
찌르고 휘돌리며 모든 것을 박살 내는 파괴력 넘치는 창술이었다. 청룡공(靑龍功), 용군삼형(龍群三形)을 창술로 펼치는 것이다.
청룡공은 본디 공격보다는 회피와 반격에 중점을 둔 무공이었다.
그러나 무공의 특성에만 국한되기에는 연호정의 경지가 너무도 높았다. 청룡공의 무공으로도 능히 강력한 공격을 퍼부을 실력이 되는 것이다.
‘이상해’
달려드는 적들을 제압하는 데 집중하면서도, 연호정은 의아함을 떨치지 못했다.
‘이번 작전을 아는 제삼자의 소행이다? 그럴 리가 없어. 이건 분명 모용군이 의도한 그림이다. 이들 모두 모용군이 배치한 자들인 게 확실해.’
희대의 창술가가 펼치는 무시무시한 공격을 보았음에도 이들은 멈추지 않았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으아아아!”
“다 죽여! 죽이라고!”
“물러서지 마!”
입에 거품이라도 물 것 같은 기세였다.
악을 쓰며 달려드는 적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공포가 가득했다. 연호정의 무자비한 무공에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도 달려든다. 전보다 더 맹렬한 살기를 피워 올리며.
‘이놈들이 모용군이 보낸 자들이라는 건, 저 뒤에 마차와 수레만 봐도 알 수 있다. 제삼자가 끼어든 거라면 저만한 재물을 그냥 놔둘 이유가 없어. 챙겨도 진즉에 챙겼겠지.’
단순히 도적을 만난 것도, 제삼자가 끼어든 것도 아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연호정은 재빨리 무사들의 얼굴을 살폈다.
‘두려움, 초조함, 분노, 살의…….’
찰나에 찰나를 쪼갠 순간.
적들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연호정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희망?!’
그렇다. 이들은 분명 희망을 품고 달려들고 있었다. 먼저 덤벼 봤자 죽을 게 뻔한데도.
너무 의외의 감정이라 순간 잘못 봤나 싶었다.
‘대체 이놈들은…….’
그때였다.
퍼버버버벅!
열 자루 비수가 연호정의 코앞까지 도달한 무사들의 이마에 정확히 박혔다.
“조심해요!”
번쩍!
패율의 화려한 강검(强劍) 앞에 세 명의 무사가 쓰러졌다. 점창의 무공이 아닌, 힘과 속도를 앞세운 지극히 실전적인 일초였다.
“이봐! 이놈들 뭐야?”
패율이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이거 얘기가 다르잖아?!”
그때였다.
‘……!!’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아니겠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모용군, 이 개자식이 설마?’
쩌어어엉!
무사 하나의 칼이 연호정의 머리를 노리고 내리쳐졌다.
본능적으로 창대를 올려 막지 않았다면 머리가 쪼개졌을 것이다.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연호정이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을 공격한 무사를 보았다.
무사의 두 눈은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어떻게든 자신을 죽이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빌어먹을.’
아니겠지, 아닐 거야.
하지만 이들의 실력과 다급함이, 살의와 희망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들의 공존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확신을 더해 주었다.
연호정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머리에 무수히 많은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임무, 사정, 연민, 부정.
“이봐! 연……!”
콰아앙!
무지막지한 진각과 함께 연호정이 기합을 내질렀다.
“으아아압!!”
콰르르르릉!
횡으로 거칠게 휘두른 일격에 십여 명의 무사들이 후방으로 밀려 나갔다.
괴력의 무공이었다. 찔러 죽이는 게 아니라 창대로 후려쳐 밀어 버리는데, 가히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가 따로 없었다.
연호정이 외쳤다.
“주의하시오!”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말.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라는 뜻이었다.
우우우우웅!
장창에 폭발적인 힘이 어렸다.
“흡!”
콰아앙!
돌풍을 일으키는 창격이 대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적을 직접 타격하는 게 아니라 땅을 뒤집어 움직임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수법이었다. 알맞은 지형지물에 강력한 무공을 퍼부으니, 전방의 무사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지이잉! 지이이잉!
연호정의 전신에서 녹청빛 광채가 명멸을 반복했다.
신비롭기 그지없는 기도였다. 팔방을 뒤덮는 위엄은 능히 일대종사(一代宗師)라 불릴 만했다.
연호정이 외쳤다.
“멈춰라!”
우뚝!
무사들이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해 버렸다. 그만큼 연호정의 무공이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들의 두 눈에 어린 살기가 이전보다 한층 지독해졌다. 아예 삶을 포기해 버린 것이다.
연호정이 재차 외쳤다.
“잠시 기다려라! 너희 얘기를 일단 들어 봐야……!”
파아아아악!
이제는 함성도 지르지 않는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살기등등한 기세를 피워 올리며 미친 듯이 달려들 뿐이었다.
연호정의 얼굴에 허탈함이 일었다.
“……이런 빌어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