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227)
227화. 제왕의 귀환 (2)
묵룡전에서 나온 연호정 앞에는 백서가 있었다.
“…….”
두 사람이 서늘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백서가 입을 열었다.
“직책은?”
“정보부장.”
“사흘 후?”
“그렇소.”
“거처는?”
“전달받은 바 없소.”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백서가 고개를 저었다.
“사흘 후 임관이니, 아직 내 상관은 아니군.”
양천 휘하 십이지신은 묵룡부 내 위치가 꽤 독특했다.
딱히 정규 부대를 이끈다거나 부내 사무직을 맡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양천의 수하이며, 동시에 자신만의 독립된 부대를 이끄는 부대의 장이기도 했다.
수뇌부인 건 분명하지만, 정확한 서열을 따지기에는 애매하다. 그들은 오직 양천의 명만을 따르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정보부는 앞으로 개편될 묵룡부의 핵심 조직이었다. 그리고 연호정은 묵룡부 최고의 실세 조직의 수장이 되는 만큼 당연히 이름뿐인 십이지신보다 서열이 높다.
“앞으로 자네가 쓸 거처로 안내해 주지. 한번 둘러보고, 요청 사항이 있으면 말하게.”
“알겠소.”
그렇게 두 사람은 넓게 뚫린 지하 대로를 걸었다.
쿵. 쿵. 쿵.
묵룡부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시끄럽지만, 그 소리가 귀에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다.
연호정이 물었다.
“기관진식이오?”
백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꼭 해야 할 말이 아니면 굳이 말을 섞는 성격이 아닌 것 같았다. 연호정은 입맛을 다시며 그의 뒤를 따랐다.
‘어쨌든, 이제 이번 임무도 슬슬 마무리되어 가는군.’
정보부장은 묵룡부 내의 모든 정보를 총괄한다. 이제 직책을 이용, 중요한 정보를 모조리 탈취해 탈출하면 끝이다.
연호정의 눈이 차가워졌다.
‘모용군.’
얼마 전 모용군의 보이지 않는 수하로부터 비밀리 서신을 받았다.
그 서신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내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네. 지금쯤이면 양천도 알아챘겠지. 그러나 묵룡부는 절대 나를 건드리지 않을 걸세. 하니 자네가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서 날 잡으러 오게. 내 손에 죽임을 당한 걸로 위장한 후 맹으로 복귀하면 될 걸세.
대범하기 짝이 없는 작전이었다.
어쩌면 모용군은 이 작전의 지휘권자가 된 그 순간부터 임무의 마무리까지 계획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 능력이 되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이 작전에는 문제가 있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무림맹이 묵룡부의 존재를 알아차렸음을 상대에게 알려 주겠다는 뜻.’
연호정은 묵룡부의 정보부장이다. 그런 정보부장을 그냥 죽였다고 하면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즉, 연호정의 죽음을 꾸민 즉시 묵룡부 측에도 비상이 걸릴 게 분명하다. 모용군은 무림맹 소속이니, 자연스레 무림맹이 묵룡부의 존재를 파악했다고 가정하고 움직일 거란 뜻이다.
‘당신이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묵룡부는 대외적으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조직이었다.
물론 그간 호남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그건 무림맹 정도의 힘이 있으니 알아채는 게 가능했을 뿐이다. 아직 세상은 묵룡부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즉, 무림맹이 자신들의 존재를 알아챈 걸 깨달은 순간 묵룡부는 더 깊은 곳으로 숨어들 것이다.
‘거기까지는 상관없다 이건가.’
그럴 수 있다. 실제로 연호정 역시 그 부분에 있어서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다만 하나의 전제가 충족된다면.
‘내가 뽑아 갈 정보의 질과 양이 충분하다면 괜찮아.’
어차피 무림맹도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묵룡부가 더 깊게 숨어든다면, 무림맹 역시 힘을 비축할 시간을 벌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시간이라면, 양천을 우두머리로 세운 묵룡부보다는 무림맹이 더 확실한 체계를 잡게 될 것이다. 당연히 집결된 힘도 강해질 터다.
‘어차피 무림맹도 맹주를 내세워야 하니…….’
순간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맹주?’
순간 한 가지 무서운 생각이 연호정의 머리를 뒤흔들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매만졌다.
‘상행조…… 적진을 침투한 지휘권자…… 호남…… 모용…….’
하나의 가정은 빠르게 분해되어 커다란 지도를 그려 냈다.
‘모용군은 이번 임무가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러니 우리의 무사 귀환을 위해 직접 나서기까지 한 것이겠지. 확실하다면 확실한 방법이지만, 정말 그게 최선이었을까?’
그간 벌어졌던 사건들과 묵룡부의 움직임, 모용군의 계략, 상행조를 대체한 이름 모를 고수들의 존재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몇 개의 결과를 내어놓기 시작했다.
‘정보가 부족해. 하지만 상황을 보면?’
모용군의 위치, 그의 야망, 그가 저질렀던 짓들.
연호정의 두 눈에 날카로운 살의가 깃들었다.
‘……모용군은 맹주가 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인간이다. 그리고 맹주 선발은 내년이지.’
말이 내년이지 석 달이 채 남지 않았다. 해가 지나고 겨울의 추위가 한풀 꺾이고 나면, 분명 수뇌부 측에서 맹주 선발에 관한 얘기를 꺼낼 것이다.
‘너.’
연호정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설마 밑 작업이었던 거냐?’
그때, 백서가 입을 열었다.
“진정하게.”
“……?”
“열정이 과한 시기라는 건 알지만, 우리는 자네와 분쟁을 일으킬 생각이 없네.”
연호정의 살의를 읽은 모양이었다.
무척이나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다. 대놓고 살기를 드러낸 것도 아니고 그저 눈빛만 바뀌었을 뿐인데, 그 미약한 변화를 알아챈 것이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준다면 나야 편하지.”
잠시 말이 없던 백서가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나는 십 년이 넘도록 부주님을 모셨다네.”
“…….”
“그 오랜 시간 부주님을 모시며, 그분께서 이렇게까지 손에 넣고 싶어 하신 인재는 없었어.”
그만큼 연호정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뜻이리라.
“군주는 하나고 신하는 많아. 군주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있으면, 주변 신하들의 질투를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일세.”
“알고 있소.”
“본부에는 위험한 자들이 많네. 그러나, 적어도 십이지신은 자네와 골을 만들 생각이 없어. 우리는 부주님을 모실 뿐, 그분에게 가까워지려는 게 아니야.”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적이군. 적어도 당신은.”
“나뿐만이 아니지.”
“그 원숭이는 다르던데.”
“화원?”
“그렇소.”
“그 부분에 대해선 할 말이 없군.”
깔끔한 인정이었다.
백서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화원에게는 따로 말해 두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걱정하지 않소. 걱정까지 해야 할 정도로 무서운 자는 아니더이다.”
“…….”
“나 역시 그대들과 분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소.”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 말을 끝으로 백서는 다시 입을 닫았다.
‘까다로운 사람이다.’
백서의 무공은 대단했다.
실전의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른다. 그런 건 붙어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거니까.
다만, 완벽에 가깝게 짜인 기도만 보면 무공의 성취만큼은 지금의 연호정보다도 한 수 위라고 볼 수 있었다.
그건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흑도의 무공으로 종사급의 경지에 돌입하려면 노력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니까.
게다가 저 절제된 마음가짐.
‘양천은 내게 관심이 많다. 그러나 적어도 신뢰도 면에서만큼은 이 사람을 넘볼 수 없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인재를 이렇게까지 대우해 주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여기일세.”
어느새 두 사람은 묵룡전에서 삼백 장 정도 떨어진 동혈에 다다랐다.
“수뇌부의 거처 입구는 묵룡전처럼 기관으로 작동하네.”
백서는 돌문 오른쪽에 불쑥 튀어나온 둥근 돌을 오른쪽으로 세 번, 왼쪽으로 두 번 돌렸다.
쿠구구궁.
문이 열리고, 상당히 밝고 널찍한 거처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이 돌벽이라 그렇지 무척이나 잘 꾸며져 있었다. 거대한 탁자와 서재는 물론, 안으로 들어가니 큼직한 방도 딸려 있었다.
“둘러보게.”
연호정은 거처 안을 두리번거렸다.
상당히 신중한 눈빛이었다. 실제로 오래 쓸 건 아니지만, 혹여 감시를 위한 비밀 공간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저기 있군.’
역시나 그렇다. 서재 천장, 야명주가 원을 그리며 박혀 있는 중앙에 미세한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단순히 공기의 순환을 위해 만든 구조가 아니었다. 백서가 볼까 봐 슬쩍 둘러본 게 전부였지만, 천장 위쪽 비밀 공간의 두께는 상당했다.
‘청룡기와 현무기가 아니라면 나조차도 그냥 지나쳤을 정도.’
과거 이곳을 통째로 조사한 적이 있었지만, 당시에 저런 비밀 공간 따위는 없었다. 묵룡부가 이곳에 터를 잡으며 새로이 만든 모양이었다.
그러한 공간은 한 군데가 아니었다.
‘총 세 군데로군. 방에는 없고, 집무실 중앙 천장과 구석 두 곳에 있어.’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이런 장난질을 할 시간에 외부에 더 신경을 쓰는 게 좋았을 것을.’
이윽고 연호정이 방에서 나왔다.
“다 봤소.”
“요청 사항이 있나?”
“없소. 나중에 차근차근 채워 가면 되겠지.”
“알겠네.”
백서가 품에서 시커먼 패 하나를 꺼냈다. 아무런 문양이 새겨지지 않은, 그러나 비범한 재질로 만들어진 철패였다.
“묵룡패라고 불리는 것일세. 본부를 오갈 때 쓰는 패로, 일정 이상의 서열을 가진 사람 혹은 부주님께서 직접 허가한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일세.”
“고맙소.”
백서가 몸을 돌렸다.
“사흘 동안 편히 지내게. 조직 개편이 시작되는 날 아침에는 이곳에 있어야 할 걸세.”
“알았소.”
그 말을 끝으로 백서는 귀신처럼 사라져 버렸다.
연호정은 벽에 기댄 채 팔짱을 꼈다.
“사흘이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연호정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야명주 덕에 밝았지만, 동굴 안이라 그런지 공기가 묘하게 답답했다.
‘올 테면 오라고?’
그는 서신 마지막 부분의 내용을 떠올렸다.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찾아오게나. 물론 묵룡부에서도 사람을 붙이겠지. 그 정도야 알아서 처리할 수 있으리라 믿네.’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감당할 수 있겠나? 지금의 나와 만나면 댁한테도 좋을 게 없을 텐데.’
* * *
“으음?!”
모용군의 얼굴에 뜻밖의 기색이 떠올랐다.
“누구?”
“패율이라고 합니다. 이번 실무조의 일행으로, 점창파 최연소 장로…….”
“그건 알고 있네. 한데, 제 놈이 직접 오지 않고 패율을 보냈다는 겐가?”
“그렇습니다.”
“허어.”
모용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화가 많이 난 모양이구먼.”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연호정이나 자신이나, 화가 난다고 임무에 지장을 줄 성격이 아니다. 나아가 쓸데없는 분란을 만들 성격도 아니니, 정 못 참을 것 같으면 아예 얼굴을 맞댈 생각도 안 할 것이다.
한데 패율을 대리로 보냈단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가.’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이도록 하게나.”
“예.”
잠시 후, 문을 열고 패율이 들어섰다.
모용군이 웃으며 그를 맞았다.
“이런 식으로 보는 건 처음인가?”
“그렇구려.”
“여기 앉으시게.”
패율은 묵묵히 자리에 앉았다.
모용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 실무조장의 심부름을 오셨는가?”
상당히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는 발언이었다. 제아무리 연호정이 실무조장이라지만, 패율은 점창파 장로로 연호정보다 훨씬 선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패율의 얼굴엔 불쾌한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심부름이라면 심부름이오만, 그 전에 개인적으로 물어볼 게 있어서.”
“음? 그 외에 다른 문제라도?”
패율이 서늘하게 웃었다.
“몽의, 알고 있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