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234)
234화. 갈등 (4)
흑양이 정보부장 정을 찾아온 것은 상대의 반응을 통해 성격을 파악해 보고자 함이었다.
신임 정보부장, 무종문의 후계자 정은 위험한 인물이었다.
귀주상회의 상행조를 급습하여 무림맹으로 이송되는 물건을 탈취했다?
대단한 공이지만, 조금 달리 생각해 보면 그거야 무식한 배짱만 있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상행조를 죽이고 공을 세운 것은, 말하자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것이 아니라 명분을 세운 것에 불과하다.’
정보부장 정의 진짜 능력은 그런 배포나 추진력 따위가 아니었다.
‘이놈은 그 까다로운 양천을 단숨에 사로잡았어.’
어떻게 사로잡았는지 그 방법은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고작 한 번의 만남으로 양천의 흥미를 끌었고, 두 번째 만남에서 그의 신임을 얻어 냈다는 사실이다.
그 많은 재물과 여인, 각종 재보(財寶)를 가져온 자신은 아직도 양천의 의심을 사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 당연한 일이었다. 양천은 자신을 흑양으로 보는 게 아니라 사음교 출신의 무사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뭐가 다르지?’
하지만 그렇게 치자면 정 역시 덜컥 믿을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의심스럽기로는 그가 더했다. 과거 멸문해 버린 무종문은 신비로 점철된 문파로, 애초에 그 출신을 증명할 방법조차 없었다.
한데 양천은 이놈을 의심하기는커녕 총애하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하지 못한 무언가를 놈은 한 것이다.
‘이놈은 위험해. 무슨 목적을 갖고 왔든, 충분히 알아 둘 필요가 있어.’
그렇다. 그런 의도로 온 것이다.
이놈의 성격과 능력이 크게 위험하다면, 이놈에 대한 정보를 샅샅이 긁어모아 교(敎)로 보내야만 하니까.
‘한데 인정해 버리다니?’
그는 애초부터 놈이 순순히 인정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건 당연했다. 이번 건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묵룡부에 반기를 든 것이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표정이구만.”
연호정의 웃음은 들풀 한 줄기 자라나지 않는 한겨울 황야의 삭풍과도 같았다.
“왜? 하면 내가 아닌 줄 알았나?”
“…….”
“에이, 설마하니 그러려고. 십이지신씩이나 되는 사람이 아무런 증거 없이 정보부장을 털러 오는 게 말이 되나.”
“…….”
“음? 표정이 왜 그래? 웃어. 네놈의 궁금증을 내 직접 풀어 주었거늘, 왜 그리 경직된 거야?”
굳은 얼굴로 연호정을 노려보던 흑양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정녕 당신이 흑양대와 흑장을 죽였다는 거요?”
“화통함과는 거리가 먼 치사하기 짝이 없는 차륜전으로 상대를 짓밟는 데에 특화된 그 머저리 놈들을 말하는 거라면, 맞다. 내가 쓸어 버렸지.”
“……!”
“그 양 가면 말이야. 이왕이면 좀 바꿔 보지 그러나? 딴에는 겁주려고 만든 모양인데,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조악하더군.”
츠츠츠.
흑양의 몸에서 살기가 일었다.
“네놈…….”
“왜?”
“……?”
“그래서, 네가 확인하고 싶던 건 다 알아봤잖아? 뭘 더 바라나?”
“네놈, 제정신이냐?”
“물론 제정신이지. 정신 나간 광인(狂人)이 투왕 양천의 신임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가?”
흑양의 눈이 번뜩였다.
‘투왕 양천?’
양 부주도 아니고, 부주님도 아니다.
투왕 양천이란다. 양천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묵룡부의 새바람이, 양천에게 충성을 맹세한 정보부장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투왕 양천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 놀라운 발언에 흑양은 크게 당황했다.
“그 일을 확인하러 온 게 아니라면.”
화르르륵!
연호정의 두 눈에 화광이 일렁였다.
꾹꾹 억눌러 두었던 불꽃의 살기가 기어이 끓어올랐다. 홍옥(紅玉)을 박은 듯 시뻘겋게 달아오른 그의 두 눈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타들어 갈 것 같은 열기가 전해졌다.
“네놈이 아직도 사음교의 주구 노릇을 하고 있다는 걸 고백이라도 할 생각으로 온 것이냐?”
“……!!”
안 그래도 당황한 와중이었다.
시퍼렇게 변한 낯빛 위에 떠오른 표정은, 어쩌면 그가 타인에게 처음 보여 주는 얼굴일는지도 몰랐다.
평소의 흑양이라면 절대 보여 주지 않을 모습.
그래서 그 표정은 진실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냈다.
“너희는 양천을 우습게 봐도 한참 우습게 봤군. 작정하고 그를 속이려 들 생각이었다면 너보다 더 뛰어난 자를 보냈어야지, 너처럼 힘만 세고 머리는 굳은 놈을 보내 양천을 감시하려 했나?”
“……!”
“그러니까 아직도 양천에게 휘둘리고 있는 거지. 아니, 네놈 머리라면 휘둘리고 있다는 것도 몰랐겠군.”
흑양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평소 냉정하다는 평가를 받는 그가, 연호정 앞에서는 유독 맥을 못 추고 있었다.
“네놈 정체가 뭐냐?”
“무종문의 후예.”
“어떻게 사음의 이름을 알고 있지?”
“양천이 말해 줬으니까.”
“……!”
“물론 그가 말해 주기 전에도 알고는 있었다.”
“뭐?”
순간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쾅!
탁자가 흑양의 면전으로 날아갔다.
반 장도 채 안 되는 거리에서 탁자를 후려쳐 날린다. 내내 당황하고 있던 흑양으로서는 깜짝 놀랄 만한 기습이었다.
하지만 흑양 역시 보통 고수는 아니었다. 그는 무종지벽을 돌파한 초절정고수, 제아무리 기습이었다 한들 넋 놓고 당할 리는 없었다.
콰직!
마치 도검으로 베듯 팔꿈치를 올려 쳐 탁자 중앙을 갈라 버린 그였다. 사음교의 절기, 부절박이었다.
그때였다.
후욱!
‘……!!’
흑양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갈라진 탁자 사이를 뚫고 들어온 커다란 손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 그의 옆구리를 노렸다.
너무나도 시기적절한 한 수였다. 마치 자신이 팔꿈치로 탁자를 가르리라는 걸 이미 짐작하고 있던 것 같았다.
‘흡!’
부우우욱!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틀어 옆구리로 날아드는 일격을 피해 냈다. 그의 허리춤이 연호정의 손에 잡혀 길게 찢어졌다.
‘이놈이 미쳤…….’
순간 흑양의 몸이 덜컥 멈추었다.
“컥!”
철판처럼 단단해진 의복이 그의 복부를 강하게 압박했다. 금기(金氣)의 화신, 서방의 백호기(白虎氣)가 뜯어낸 흑양의 상반신 의복 전체를 강철의 강도로 경화시킨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수법이었다. 타인의 의복을 경화시켜 움직임을 통제한다? 새외는 물론 중원 무림에서도 쉬이 찾아볼 수 없는 기가 막힌 수법이었다.
‘이익!’
재빨리 물러나려 한 것이 오히려 그의 숨통을 조여 버렸다. 당황한 흑양은 재빨리 의복 위로 수도를 내리쳤다. 찢어진 옷깃과 함께 연호정의 진기까지 베어 버릴 셈인 것이다.
그때였다.
펄럭!
의복이 수도를 감싼 채 너풀거렸다. 어느새 백호기를 거둔 연호정이 흑양의 정면으로 한 걸음 다가온 것이다.
‘읽혔다!’
흑양은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이놈은 어떻게 돼먹은 놈이야?!’
부절박의 팔꿈치 공격, 참장주격(斬臟肘擊)의 허점을 단번에 파악한 것도 모자라 수결참도(手訣斬刀)의 박자까지 읽었다.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부절박은 새외의 무공으로, 중원인은 절대 알 수 없는 무공이었다.
퍼억!
“큭!”
흑양의 오른 무릎이 땅에 닿았다. 연호정의 각법이 그의 대퇴부 외측을 갈겨 버린 것이다.
파아아악!
흑양의 우수(右手) 권배(拳背)가 연호정의 관자놀이를 노렸다. 빠르고 쾌속한 일격, 허용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살수였다.
그때, 연호정의 팔이 뱀처럼 휘어지며 그의 권배와 팔꿈치를 휘감았다.
우두둑!
“큽!”
역관절을 노린 한 수였다. 연골이 찢어지고 관절이 부서졌다.
‘이!’
끔찍한 고통에 우측 상반신 전체가 마비되는 것 같았다.
치료한다 해도 다시는 오른팔을 쓰지 못할 것이다. 흑양의 눈이 잔뜩 충혈되었다.
빠각!
“컥!”
기습으로 승기를 빼앗겼다. 올려 친 무릎 공격에 흑양의 상반신이 접히고, 훤히 드러난 등판 위로 연호정의 두 주먹이 망치처럼 휘둘러졌다.
콰득!
더는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흑양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아니, 질렀다고 생각했다.
‘……?!’
지독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와중에도 흑양은 상대의 치밀함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두 주먹으로 뼈를 박살 내자마자 아혈을 짚어 비명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은 것이다.
‘비, 빌어먹을!’
흑양의 얼굴에 다급함이 일었다.
빗장뼈와 갈비뼈가 동시에 부러졌다. 척추가 부러지진 않았지만, 당분간 몸을 세우기 어려울 정도의 부상이었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연호정이 무심한 얼굴로 그의 복부를 걷어찼다.
퍼어억!
흑양이 핏물을 왈칵 토해 냈다.
푸스스스스.
근육 한 올까지 꽉 차 있던 진기가 무서운 속도로 기화되었다.
단전 파괴다. 무자비한 일격으로 단전 주변의 방어막은 물론, 단전 그 자체도 쪼개 버린 무서운 각법이었다.
승부 종료.
“재미있지?”
츠츠츠츠.
연호정의 살기가 흑양의 몸 곳곳으로 파고들었다.
이 와중에도 어떻게든 살기를 제어하는 그였다. 만일 주작기가 폭발했다면 그의 살기는 두꺼운 돌벽을 뚫고 묵룡부 곳곳으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네놈들의 맨손 무공이야 수도 없이 많이 봤어. 그중 부절박이라…… 참장주격에 이은 수결참도? 너무 단조로운 조합 아닌가?”
“……?!”
광신삼교, 그중에서도 사음교가 쓰는 무공들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분석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 당대 무림에서 연호정만큼 사음교의 절기를 잘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흑양을 포함해서도.
“안 그래도 생각하고 있었다. 내 제물이 될 놈이 딱 하나가 더 필요했는데, 그게 네가 될 줄은 몰랐어. 화원, 그 성질머리 더러운 년을 생각하고 있었건만.”
연호정이 환하게 웃었다.
“고맙다. 날 자극해 줘서. 차라리 너라서 더 다행이야. 명분을 만들기가 너무 쉽거든.”
그가 흑양의 턱을 걷어찼다.
빠각!
턱뼈가 부서진 흑양의 눈이 돌아갔다. 그대로 기절해 버린 것이다.
연호정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내 손에 일행의 목숨이 달려 있기에 이 정도로 끝내는 거다. 다행으로 생각해라, 이 개자식아.”
연호정은 더 이상 고수가 아니었다.
품격을 버리고 진흙탕에 발을 딛기 시작한 흑암제. 그간 배웠던 수양을 잠시 내려놓은 그는, 치밀하고도 과격한 과거의 자신으로 점점 돌아가고 있었다.
반나절 뒤.
지하 광장을 가로지르는 연호정의 귀에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화원 님?”
“글쎄? 나는 못 봤는데?”
“또 뭐 비밀리에 임무라도 맡으신 모양이지.”
“그렇겠지.”
“십이지신님들은 원래 다 그러시잖아. 아니면 거처에서 쉬고 계실지도. 요새 워낙 바쁘셨으니까.”
역시나 그렇다.
십이지신은 오직 양천의 명을 받드는 이들이었다. 양천이 따로 명을 내리기 전까지는 부내 업무에 관여하지도 않고, 그럴 권한도 없다.
‘하긴, 상관없지.’
연호정은 이대로 양천에게 갈 생각이었다. 가서 흑양의 정체에 대해 전부 말할 생각이었다.
물론 사실 그대로 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품에는 반나절 동안 조작한 정보를 적어 곱게 접은 서신이 들어 있었다.
‘양천 역시 당장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뇌옥에 가둬 둔 후,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리겠지.’
그래서 흑양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최소 며칠간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도록.
그리고 그가 깨어날 즈음, 양천은 모용군을 만나러 가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군.’
그때였다.
‘뭐지?’
연호정이 의아한 눈으로 묵룡전 입구를 바라보았다.
묵룡전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문으로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순간 걸음을 멈춘 연호정은 이내 백서를 발견했다.
“선배님.”
백서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다급함이 묻어나는 듯했다.
“무슨 일입니까?”
백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큰일 났소.”
“……?”
“부주님께서 쓰러지셨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