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236)
236화. 갈등 (6)
“연 공자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가득상의 눈이 모처럼 반짝였다.
“상황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는 모양인데요?”
잠시 후, 그의 설명을 들은 일행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패율이 툴툴거렸다.
“그놈 그거, 전생에 꼬리 아홉 달린 여우였던 게 분명해.”
제갈아연이 피식 웃었다.
“정이도 똥줄 좀 탔겠는데요? 설마하니 양천이 이렇게 갑자기 쓰러질 줄이야.”
당상아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일까요? 양천은 저희 조부님과 동급으로 취급받는 희대의 고수예요. 그만한 고수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는 건…….”
“언니, 저도 그게 궁금하긴 하지만요. 일단 지금은 우리의 안전한 귀환만 생각하자고요.”
“아…….”
당상아가 멋쩍게 말했다.
“워낙 의외라서.”
“하긴, 그렇긴 해요. 생각해 보면 양천의 상태에 따라 천하의 판도가 뒤바뀔 수도 있는 거니까요.”
“난…… 솔직히 순수한 궁금증 때문이긴 한데…….”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언제나 사소한 호기심으로 움직이더라고요.”
패율이 혀를 찼다.
“쓸데없는 얘기는 이쯤 하자.”
“넵.”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움직여야 하는가?”
가득상이 문서 하나를 흔들었다.
“연 공자와 모용군이 만나는 날 움직이면 될 것 같습니다. 상황을 보니, 모용군이라면 적어도 오늘 안에 연락을 취할 것 같더군요.”
“그렇다면 아무리 늦어도 사흘 내겠군.”
“이틀 뒤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좋아. 그리고 그들은?”
“……대기하고 있습니다.”
“음.”
가득상의 표정이 대번에 불편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상아는 물론 제갈아연조차도 왠지 석연치 않아 하는 얼굴이었다.
“저, 선배님.”
“왜 그러냐?”
“정말 이대로 놔둬도 괜찮을까요? 아닌 말로,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그들은 피해자입니다.”
“나도 안다.”
“차라리 모용군을 엿 먹이는 데에 목숨을 거는 거라면 또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것은…….”
순간 패율의 눈이 베일 듯 날카로워졌다.
“그들을 모욕하지 마라.”
“예?”
“그들은 이용당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마지막을 선택한 것이다. 일개 거지에 불과한 너는 물론이거니와, 나나 이 여아들도 그들의 선택을 폄하할 자격은 없어.”
“…….”
“우리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채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죽는다. 그들도 그걸 알기에 기꺼이 이 계획에 동참해 준 거 아니겠느냐.”
“…….”
“과거에 무수히 많은 과오를 저질렀지만, 그들은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는 지난 삶을 회개했어. 그런 자들과 잠시나마 함께할 수 있다는 걸 영광으로 알도록.”
꾸짖듯 말한 패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틀 뒤라고 생각하고 있겠다. 너희도 그때까지 푹 쉬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렇게 패율이 방을 나섰다.
제갈아연이 입맛을 다셨다.
“정이가 왜 선배님을 데리고 왔는지 알 것 같아요.”
“…….”
“솔직히, 그저 싸우기 좋아하는 무공광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틀렸군요.”
당상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움 이전에 크게 깨달은 분인 것 같아.”
“맞아요. 이래서 지혜 앞에 지식 없다는 말이 나오나 봐요. 정말 본받을 만한 분이에요.”
가득상이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아직도 잘 모르겠소.”
“그런가요.”
“이런 걸 보면 확실히 난 크게 될 놈은 아닌 것 같소.”
제갈아연이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요.’
상황에 따라 누구보다도 냉정해질 수 있는 연호정. 셀 수 없는 전투를 벌여 온 것만큼이나 삶의 지혜 역시 출중한 패율.
어지간한 경험으로도 그 두 사람만큼 뛰어난 안목과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바로 후개의 저 선한 천성이었다. 후개는 연호정과 패율을 따라가지 못하는 스스로를 답답해하지만, 이 거친 세상에서 후개처럼 선한 마음을 지키고 사는 게 천배는 더 어렵다.
‘용두방주님께서 왜 이 사람을 후개로 두었는지 알겠어.’
정보를 다루는 자는 필연코 협(俠)과 도의(道義)에서 멀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후개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정보보다 사람을 봤고, 사람을 보기 때문에 틀린 판단은 내릴 수 있을지언정 불행한 사람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했다.
제갈아연은 앞으로도 그가 저 선한 마음을 잃지 않기를 바랐다.
“소저들도 이만 쉬시오. 집에 돌아갈 날이 머지않았소이다.”
* * *
“왔군.”
연호정은 곧장 백서에게로 향했다.
“모용가주에게 연락이 왔소.”
“…….”
“금일 저녁에는 출발해야 약속 시간까지 도착할 수 있을 듯하오.”
백서는 묵묵히 묵룡전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은 끈기 있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백서가 입을 열었다.
“정보부장.”
“말씀하시오.”
“아시겠지만, 나는 자리를 뜰 수 없소. 부주님께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시는 와중에 나까지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외다.”
“알고 있소.”
백서는 십이지신이지만, 다른 십이지신과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다.
아닌 말로, 그가 부주 대리로 움직인다 한들 부내 누구도 그에게 뭐라 하지 못할 것이다. 백서는 그 정도의 신뢰를 받는 사람이었다.
“내 마음 같아서는 모용가주와의 약속이고 뭐고 다 취소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오. 부주님께서 쓰러지셨거늘, 한낱 육대세가의 수장 따위와 만나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백서의 안광이 서늘해졌다.
“그래서 나는 정보부장의 다급함을 이해할 수 없소이다.”
“이해하오.”
이해한단다.
자신을 설득하려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이해한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면이 비범한 거라고 백서는 생각했다. 신임 정보부장은 거칠기로는 누구 못지않지만, 한편으론 상대의 처지를 충분히 인식할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백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부주님의 심복이오. 부주님께서 천하를 손에 넣으시든 홀로 황야를 거니시든, 그저 그분의 뒤를 따르면 그뿐. 하지만 당신은 아니지.”
“…….”
“당신은 부주님의 꿈을 이루는 데에 필요한 부품이오. 그리고 부품에는 부품 나름의 쓸모가 있소. 바로 나처럼.”
“…….”
“나는 부주님을 지키겠소. 그대는 부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시오.”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이해해 주셔서 고맙소.”
백서가 몸을 돌렸다.
“의원은?”
“귀명신의(鬼命神醫)가 화답했소. 늦어도 닷새 안에는 도착할 거요.”
“생각보다 빠르구려. 다행이오.”
백서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천하의 연호정조차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십이지신의 인(寅), 진(辰), 사(蛇), 신(申), 술(戌)을 붙여 주겠소.”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십이지신 중 호랑이, 용, 뱀, 원숭이, 개를 붙여 주겠다고 한다.
단순히 다섯 고수만 따르는 게 아니다. 그들 휘하의 조직까지 합치면 못해도 삼백이 넘는 고수가 더 따라붙는 것이다.
“그 정도 전력이면, 설령 모용가주가 함정을 깔아 두었다 하더라도 목숨을 건지는 데에는 별문제는 없을 것이오.”
“충분합니다.”
백서가 몸을 돌렸다.
“출부 명령서는 따로 받지 않겠소. 준비가 되면 언제라도 출발하시구려.”
“알겠소.”
“정보부장.”
“말씀하시오.”
“무운을 빌겠소.”
물끄러미 백서를 보던 연호정이 품에서 고이 접힌 문서 세 장을 꺼내 들었다.
“받으시오.”
“이것이 무엇이오?”
“본부의 배신자에 관한 상세 정보요.”
“……?!”
일순 백서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지금 배신자라고 하셨소?”
“그렇소.”
“……대체 누구요?”
연호정이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이것을 보면 자세히 알게 되실 거요. 부주님께서 그리되신 후, 그렇지 않아도 어수선해진 판에 괜한 혼란을 더하고 싶지 않아 지금껏 미뤄 두었소.”
“……!”
“내 거처에 불러 추궁하니 본색을 드러냅디다. 부득이 싸움이 벌어졌고, 어떻게든 제압은 해 두었소.”
백서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제압을 해 두었다고?”
“그렇소.”
연호정이 목소리를 한층 낮게 깔았다.
“꽤 자연스럽게 접선하여 내 거처로 끌고 갔소이다. 내 이 얘기를 지금에야 하는 이유는 부가 어수선한 탓도 있으나, 또 다른 배신자가 존재할 확률이 없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오.”
“……으음.”
“어쩌면 부주님께서 저리 쓰러지신 것부터가 배신자들의 계략일는지도 모르오.”
츠츠츠츠.
백서의 몸에서 강렬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것들이 감히……!”
가정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살기를 주체하지 못한다. 양천과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냉정을 유지하기 힘든 게 그였다.
“바로 준비할 테니 한 시진 안으로 출발할 것이오.”
“…….”
“우리가 출발한 뒤, 곧장 내 거처로 가 보시오. 그곳에 배신자를 가둬 놓았으니까.”
“……알겠소.”
“다시 한번 말하겠소.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것이오. 혹여 방수가 있다면 배신자 놈의 마지막 동선을 파악하려 할 것이고, 그 뒤 이곳을 빠져나가려 할 것이오.”
“그렇군.”
“하니 우리가 부를 나서자마자 묵룡부 전체의 출입을 금하시오. 그리고 내 거처로 가서 배신자를 잡으시오. 그다음은…… 선배께서 알아서 잘하리라 믿소.”
백서가 포권을 취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고생이 많으셨구려. 고맙소.”
연호정이 마주 포권을 취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소.”
“말씀하시오.”
“그자가 배신자라는 건 어떻게 알았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십이지신 중 지나치게 동떨어져 있는 존재였으니까.”
“……십이지신!”
“일류 세작은 성격, 직책, 장소 모든 부분에서 눈에 띄지 않으려 하오. 하지만 특급으로 분류되는 세작은 눈에 띄는 행보로 눈에 띄는 직책을 거머쥐며, 눈에 띄는 장소에서 서성이게 마련이지.”
연호정이 씁쓸하게 웃었다.
“하긴, 배신자일 뿐 세작이라고 하기에는 좀 뭐하지만.”
그가 몸을 돌렸다.
“부주님을 잘 부탁드리겠소.”
백서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을 잘 마치고 돌아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소이다.”
등을 돌린 연호정은 쓰게 웃었다.
미안하지만 우리가 다시 볼 일은 없을 거야.
* * *
촤아아악!
“커헉!”
느닷없는 물벼락에 흑양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헉헉! 으으윽!”
정신을 차리자마자 몸 곳곳에서 지독한 통증이 올라왔다.
부러진 갈비뼈와 빗장뼈 때문에 상반신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연골이 찢기고 관절이 박살 난 오른팔은 아예 감각이 없었다.
허벅지와 복부 등에서도 둔중한 통증이 올라왔다. 하나같이 정보부장에게 당한 부위였다.
‘정!’
흑양은 아득바득 이를 갈았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감히 기습을……!”
그때였다.
“나 말인가?”
흑양은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쥐새끼라고 너무 업신여기면 안 될 걸세. 세상에는 나처럼 사나운 쥐새끼도 있으니까.”
흑양이 뻐근한 목을 가까스로 움직여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앞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백서가 있었다.
“배신자 흑양.”
“……!!”
“꽤나 참혹한 몰골이로고. 정보부장 그이, 보통 호걸은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손속이 이토록 독할 줄은 몰랐다네.”
백서가 상체를 수그렸다.
“한데 자네도 알지? 본부에는 정보부장의 손속 정도는 어린애 주먹질만도 못하게 여길 만한 고문 전문가들이 많다는 것을.”
“……꿀꺽.”
“자, 이쯤이면 분위기는 다 잡았다고 생각하네.”
백서가 서늘하게 웃었다.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하면, 꽤 고통스럽겠지만 죽여는 주겠네. 하지만 그게 아니면…….”
“……!!”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줄 걸세.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