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237)
237화. 갈등 (7)
파아악!
관도를 달리는 연호정의 신법은 그야말로 한 마리 새와도 같았다.
경쾌하기 이를 데 없는 몸놀림, 손에 한 자루 창을 들고 있음에도 마치 아무것도 들지 않은 것처럼 자유로워 보였다.
‘대단하군.’
그의 뒤를 따르는 수룡(水龍)은 연호정의 신법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아직 이립에도 들지 않은 연배라고 들었는데…… 무공이 저리 뛰어나단 말인가?’
경신술을 펼치는 발끝의 움직임만 봐도 상대의 경지를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다.
듣기는 했지만, 저 젊은 나이에 정말로 무종지벽을 돌파한 것 같았다.
‘소위 천재라는 것이로군.’
수룡은 괜스레 입맛이 썼다.
‘세상에는 괴물이 많다더니.’
무공이면 무공, 지략이면 지략.
말 그대로 문무겸전(文武兼全)이다. 약관이 갓 넘은 나이에도 저 정도니, 향후 십 년 뒤에는 정녕 천하를 논할 만한 경지에 오를지도 모르겠다.
‘재미없군.’
심지어 부내에서 십이지신보다도 서열이 높단다.
십이지신 전원이 양천의 심복임을 자처하고 있고,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저기 삼백여 장 밖 천성루에서 묵을 것이오. 달리느라 고생들 하셨소.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출발할 테니, 어지간하면 음주는 삼가시오.”
뒤따르던 화원이 괜스레 이죽거렸다.
“술도 못 마시나요? 저는 술을 안 마시면 잠이 잘 안 와서요.”
연호정의 대답은 압권이었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의원에게 진찰이라도 받아 보시게. 지금쯤 간이 다 썩었겠군.”
화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그때 환사가 나섰다.
“화원.”
“…….”
“정보부장님이시다. 예의를 갖춰라.”
화원이 콧방귀를 뀌었다.
“천하의 환사가 왜 이리 저자세로 나오는 거지? 왜? 저 양반이 좋은 술이라도 사 주더냐?”
“화원!”
“닥쳐!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하지 마!”
지금까지 묵묵히 있던 광견(狂犬)이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지껄이든 네 마음이겠지만, 그 결과가 마음에 안 든다고 찡찡댈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입 닥치는 게 좋을 거다.”
화원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개와 원숭이는 사이가 좋지 않다던가? 실제로 두 사람은 서로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죽고 싶냐?”
“죽일 실력은 되고?”
“이 개새끼가!”
쿵!
강력한 내공의 파장이 관도 전체를 뒤흔들었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놀러 가는 거 아니외다.”
“…….”
“다시 한번 쓸데없는 소란을 일으키면, 이유 불문 그 자리에서 참하겠소.”
그가 고개를 돌렸다.
서늘하기 짝이 없는 안광이 화원을 향했다.
“그대는 특히 더 조심하는 게 좋겠소. 미리 말해 두는데, 당신 하나 없다고 임무에 지장이 가는 건 아니오.”
화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분노로 눈알이 뒤집힐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녀는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저 미친놈이라면 진짜로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단숨에 상황을 정리한 연호정이 다시 선두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광견이 환사를 힐끔거렸다.
‘꽤 살벌한 양반인데?’
환사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깨를 으쓱인 광견은 조용히 뒤를 따랐다.
그렇게 일행이 천성루에 도착했다.
쾅!
점소이의 안내를 받은 화원은 곧장 자신의 거처로 들어가 버렸다.
광견이 혀를 찼다.
“저년 저거, 저렇게 살다간 제명에 못 죽지.”
청호가 말했다.
“정보부장님의 전언이다. 오늘은 각자 거처에서 쉬도록 해. 내일 새벽 인시(寅時) 중반까지 주루 입구에서 모인다.”
“그래.”
“지금부터 임무가 시작됐다고 생각해야 할 거야. 괜한 시빗거리 만들지 말고 조용히 지내도록.”
십이지신 내에 따로 서열 같은 것은 없었지만, 보통 같은 임무가 떨어지면 자축인묘(子丑寅卯)의 네 사람이 상황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존심과 개성 강한 십이지신들이 청호의 말을 묵묵히 듣는 이유였다.
환사가 말했다.
“화원에게는 내가 따로 말해 두지. 아무래도 그녀가 가장 불안해 보이니까.”
“그렇게 해.”
“그나저나 정보부장님은?”
“최상층으로 올라가셨다. 아마 밤을 새우실 것 같더군.”
“알았다. 이제 슬슬 흩어지도록 하지.”
그렇게 다섯의 십이지신이 각자의 거처로 들어갔다.
홀로 최상층에 오른 연호정은 간단한 요리와 차 한 잔을 시켰다.
‘음.’
여유롭게 식사하던 연호정은 문득 은밀하게 다가오는 기척 하나를 느꼈다.
‘왔군.’
잠시 후, 그의 귀에 전음이 들렸다.
[개방입니다.] [내일 유시(酉時) 초면 모용가주와 만날 것이다. 후개에게 그대로 전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후개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말해.] [지원군이 필요한지를 여쭈어보라 하셨습니다.]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지원군이라.’
계획대로만 된다면 지원군이 필요치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한 치 앞도 확신할 수 없는 법이다. 애초에 양천이 이렇게 쓰러질지도 몰랐고, 그 이전에 흑양이 자신에게 접근할지도 모르지 않았는가.
준비성이 철저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지원군 요청을 허가한다. 지원 요청 부대는 멸사군으로.] [알겠습니다.]그렇게 개방도의 기척은 사라졌다.
개방 역시 상당히 조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연호정 역시 기감을 극도로 예민하게 세워 두고 있었기에 다가오는 걸 알았지, 아니었다면 놓쳤을 것이다.
이 정도 은신술을 쓰는 사람은 정말 흔치 않다.
‘지원군이라.’
연호정의 얼굴에 아련한 빛이 어렸다.
‘녀석들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멸사군.
비록 함께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간 녀석들과 수도 없이 많은 사선을 넘었다.
사선 이전에, 멸사군을 정예화하느라 고생도 많이 했다. 흑도의 방식대로 막무가내로 접근하면 무조건 반발이 생길 듯하여, 하나하나 인내심을 갖고 정성을 다해 가르쳤다.
그리고 이어진 실전.
무수히 많은 실전을 치른 멸사군은, 놀랍게도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죽을 뻔한 적은 많았지만, 다행히도 모두가 잘 이겨 내 주었다.
‘그간 열심히 단련했으려나.’
기실, 출맹한 이후 지금까지 많은 시간이 지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이 워낙에 다사다난했기 때문일까? 두 달 남짓의 시간이 거의 이 년처럼 느껴졌다.
‘묵비가 잘 훈련시켰겠지.’
겉으로는 숫기가 없어 보이지만, 필요할 땐 누구보다도 강단 넘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사람이 바로 묵비였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도 그랬고, 돌아온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지금의 묵비는 과거 신궁(神弓)이라 불리던 때에는 함양하지 못했던 큰 무기가 하나 있었다.
바로 인망이었다.
‘무척 바쁘셨겠지만, 아버지께서도 짬이 날 때마다 묵비를 도와주셨을 것이다. 지금쯤 완전히 다른 고수가 되어 있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간 묵비가, 옥청이, 팽만호가, 나아가 멸사군병 모두가 얼마나 발전했을까.
‘많이 안 늘었으면 돌아가자마자 지옥 훈련이다, 이놈들아.’
그렇게 연호정이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을 때였다.
“흥!”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화원이 걸어오고 있었다.
“천하의 냉혈한인 줄 알았더니,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시는군요?”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나도 멀쩡한 피육을 가진 사람인지라.”
화원은 인상을 찡그렸다. 연호정의 저 여유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연호정이 차를 홀짝였다.
“그래서,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지?”
“술 한잔 마시려고요.”
연호정은 덤덤한 표정으로 고기 한 점을 집으며 말했다.
“그렇게 죽고 싶나?”
화원이 툴툴거렸다.
“그래서 허락을 받으러 온 거잖아요.”
“…….”
“거짓말 아니에요. 술 안 마시면 잠이 안 와요.”
“그 정도 경지에 굳이 잠을 자야 하나? 하루 날 샌다고 제 실력을 발휘 못 할 경지는 아닐 텐데.”
“그 말 진심이에요?”
“…….”
“분명히 말하죠. 나는 당신을 싫어해요. 그런 당신이 십이지신인 나보다 서열이 더 높다는 것만으로도 경기가 날 지경이라고요.”
“그건 네 얼굴만 봐도 안다.”
“하지만 임무는 임무.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어 놔야 할 거 아니에요? 거기서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모르는데.”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딴에는 그 말도 맞군.”
화원이 뒷짐을 풀었다. 이미 그녀의 손에는 술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도 되죠?”
“그러시든가.”
화원은 냉큼 앉더니 마개를 따고 술을 들이켰다.
꿀꺽꿀꺽 잘도 마신다. 과연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단숨에 술을 몇 모금이나 넘긴 그녀의 얼굴에는 벌써 여유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연호정은 그녀를 보지도 않은 채 요리를 먹는 데 집중했다. 점심을 걸렀더니 배가 몹시 고팠다.
“흐음.”
화원은 가만히 팔짱을 낀 채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물었다.
“뭘 그렇게 보나?”
“신기해서요.”
“뭐가?”
“대체 어쩌다가 그 나이에 그런 괴물이 됐죠?”
연호정이 화원을 바라보았다.
화원의 얼굴은 발그레 달아올라 있었다. 주기가 흩어지지 않게 부러 내공을 분산한 것이다.
“나 정도로 괴물이라고 하기에는 세상에 천재가 너무 많아.”
“그건 정말 재수 없는 말이로군요.”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적당히 마셨으면 이만 들어가 봐.”
“이거 다 비우고 갈 거예요.”
“몇 잔 정도가 아니었군.”
“잔으로 사발을 쓰거든요. 거짓말은 안 해요.”
화원의 안광이 요악하게 변했다.
“당신과는 다르게 말이죠.”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직도 날 의심하나?”
“물증은 없어요. 하지만 내가 워낙 성격이 꼬인 년이라서요. 명명백백한 진실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한 번 의심한 사람은 끝까지 의심하거든요.”
“꽤 피곤한 성격이군.”
“많이 듣는 말이에요. 특히 광견, 그 개새끼가 입에 달고 살죠.”
연호정은 대답 없이 다시 젓가락을 놀렸다.
가만히 그를 보던 화원이 미소를 지었다.
“한 모금 해요.”
“……?”
“그 기름진 걸 먹으면서 술도 안 땡겨요?”
“글쎄?”
“다른 놈들 앞에서 체면 상하는 게 걱정이라면 마음 놔도 돼요. 이래 봬도 주둥이가 제법 무겁거든요.”
알 수 없는 눈으로 화원을 보던 연호정이 이내 피식 웃었다.
“그 말, 믿어 주지.”
연호정은 화원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들고는 그대로 들이켰다.
화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크, 독하군.”
“반이나 남았는데 그걸 다 마시면 어떡해요?”
“술도 다 떨어졌으니 이만 들어가서 자. 그 정도면 충분해.”
“쳇.”
화원이 투덜거리며 일어났다.
“내일부터는 자유죠? 임무가 끝나면요.”
“그래. 임무를 완수하고 나면 알아서들 흩어져. 내가 맡은 임무는 거기까지니까.”
“좋아요. 다른 소리 하기 없기에요.”
“가라.”
“흥!”
몸을 돌려 계단으로 향하던 화원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걸음을 멈췄다.
“그거 알아요, 정보부장님?”
“…….”
“다른 십이지신과는 달리 저는 정통 흑도인이에요.”
“그래서?”
“나름 호탕한 면이 있다는 거죠. 은혜는 잊어도 원한은 꼭 갚는 머저리들과는 달리, 저는 은혜도 갚을 줄 알아요.”
“하고 싶은 말이 뭐냐?”
화원이 배시시 웃었다.
“술 허락해 준 거, 나중에 갚을게요.”
“그럴 일 없을 거다.”
“그건 두고 보면 알죠.”
“가라.”
화원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등을 돌린 그녀의 얼굴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개자식. 넌 이제 죽은 목숨이다.’
그렇게 화원이 계단을 내려갔다.
연호정이 턱을 괴었다.
“……망할 년이 알아서 죽여 달라 용을 쓰는군.”
푸스스스.
그의 손등 위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독기(毒氣)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