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24)
24화. 돌풍 (4)
구주명가(九州明家).
무림 최악의 혼란기이자 최고 전성기였던 삼백 년 전 세상에 나타나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전설적인 고수 사방무제(四方武帝)를 도와, 혈교(血敎)를 멸망시키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 가문.
이후 새외의 독특한 무학 등을 가져와서 중원의 무학과 결합, 본인들만의 절기로 창안하여 이백 년 만에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라 불리게 된 것이 구주명가의 역사였다.
구주명가가 천하제일로 불리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강하기 때문이다.
세력은 칠대세가의 두 곳을 합친 것만큼이나 컸고, 그들이 발전시킨 신(新) 무공은 칠대세가의 비기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자금력 역시 단일 세력으로는 최고를 다툴 만하니, 천하제일의 이름이 아깝지 않았다.
연호정은, 그런 거대 세력의 삼공자를 도발하고 있는 것이다.
명호림의 눈이 깊어졌다.
“연가의 대공자지?”
잘 알고 있군.
“일단 이 회합의 가장 어른으로서 고마움을 표하겠네. 날뛰는 망아지를 잡아 준 것 말이야. 너무 거칠기는 했지만.”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제 이십 대 중반이나 되었을 법한 놈이 어른 운운하고 있었다. 그 꼬락서니가 제법 우스웠다.
명호림은 연호정의 웃음을 본체만체했다.
“자네 무공이 인상적이라는 것도 알겠어. 당가의 장자를 단번에 제압하다니, 자네에 대한 소문이 얼마나 과장되었는지 알았네.”
연호정에 대한 소문은 아는 사람은 다 알 만큼 유명했다.
호부견자(虎父犬子).
당대 연가의 가주 연위는 판관검(判官劍)이라 불리며 세인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장자인 연호정은 가문을 잇기에 부족한 재능과 성품을 지녔다고 하였다.
하지만 오늘 보여 준 연호정의 모습은 소문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러나.”
명호림이 짐짓 꾸짖는 어조로 말했다.
“제아무리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다 한들 공석과 사석은 구분해야 함이 옳지 않겠는가. 이곳은 회합장이지 비무장이 아닐세.”
“…….”
“이만 주변 정리부터 하세.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내 술 한 잔 따라 주러 가겠네.”
“그래서.”
“음?”
“못 놀아 주시겠다?”
좌중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연호정을 보았다.
명호림이 웃음을 터트렸다.
“놀아 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다만 술과 웃음으로 놀아 주겠네. 아! 그리고 내게 술잔을 날린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자네 말마따나 실수 아니었나?”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호림이 흡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좋네, 좋아. 일단 당가의 자제부터 옮…….”
“안 오면 내가 가지.”
“뭐?”
후웅.
연호정이 명호림을 향해 걸어갔다.
신법을 펼친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뛰어가는 것도 아니었다.
걸어간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지만 그가 움직이자 무거운 공기가 물결치듯 물러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 분위기가 몹시 무겁고 텁텁해서, 그를 말리려던 사람들도 주춤했다. 연호정이 움직인 순간 연회장의 공기가 축축하게 젖어 드는 듯했다.
명호림의 눈이 커졌다.
‘뭐지?’
얼마 안 되는 거리.
조심스러운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산책이라도 하는 듯 느긋하게 걸어오는 걸 보면 싸울 의지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명호림은 전신의 신경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뭐라 말을 하고 싶어도 기이한 위압감에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연호정이 명호림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
주먹을 뻗으면 상대를 가격할 수 있는 근접 거리였다. 바로 그 자리에서 연호정은 멈춰 섰다.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스으으으.
뱀과 같은 살기가 명호림의 목을 타고 올라갔다.
은밀하고도 유연하다. 그러나 독했다. 당장이라도 목에 송곳니를 박아 넣을 것 같은 흉악한 살기였다.
‘이놈은 대체 무슨 살기가……?!’
그때, 연호정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순간 명호림의 몸이 저도 모르게 반응했다.
파아앙!
그의 주먹이 그대로 연호정의 얼굴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사전 준비 동작이 없는 권격(拳擊)이었다. 그래서 빠르고 날카로웠다.
투우우웅!
내질렀던 주먹이 곧바로 위로 튕겼다.
하지만 명호림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목을 휘감는 살기가 그에게 후속 공격을 종용하고 있었다.
그의 쌍권(雙拳)이 기쾌하게 움직였다.
파바바박!
좁은 공간의 공기를 터트리며 휘둘러지는 연환권법이었다. 명가가 자랑하는 철쇄박(鐵鎖撲)이었다.
절기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근접 박투전에서의 효용성이 큰 무공이었다. 본능적으로 살기에 반응했지만 그 와중에도 스스로를 절제한 것 같았다.
연호정 역시 곧바로 응수했다.
퍽! 퍼버벅! 터엉! 파아아악!
두 사람의 주먹이, 손바닥이, 팔꿈치가 부딪치며 북 터지는 소리를 냈다.
연지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권법은?’
명호림의 철쇄박을 받아치는 연호정의 권법은 연지평에게도 익숙한 무공이었다.
‘연가십삼권(燕家十三拳)?!’
그렇다.
연호정의 탄력 넘치는 저 권법은 연가의 기본 권법인 연가십삼권이었다. 하지만 연지평이 아는 연가십삼권과는 너무도 달랐다.
‘저, 저걸 저렇게!’
연가십삼권은 본디 적을 살상하는 것보다는 제압하는 데에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제압술로 연가권을 쓰지 않는다. 연가의 무사들이 연가권을 배우는 것은 신체의 유연성과 탄탄한 하체를 만들기 위함이지, 적과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즉,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권법이었다. 한데 형은 체조에 가까운 권법을 써서 명가의 박투술을 절묘하게 막아 내고 있었다.
‘아니야. 막아 내는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밀어붙인다.
파바바박!
명호림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연호정이 강하게 전진했다.
펑! 퍼퍼펑!
짧게 끊어치는 삼 격의 연환권 이후 힘 있게 밀어붙이는 장권(長拳).
연지평의 눈이 흔들렸다.
‘일주청파(一注淸坡)!’
투우웅!
“으음.”
명호림이 두 발자국 더 물러났다.
사실 물러난 것이 아니라 밀려난 것에 가까웠다. 철쇄박의 촘촘한 공격을 모조리 걷어 낸 후 선보인 장권은 뼈를 상케 할 정도로 강맹했던 것이다.
명호림은 자신의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잘 단련된 팔뚝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자칫 잘못 막았으면 뼈가 부러졌을 것이다.
‘강하다!’
제대로 내공을 싣지 않은 권박(拳撲)에 팔이 부러질 뻔하다니.
‘이럴 수가.’
언뜻 보아도 수준 높은 권법이 아니었다. 그런 무공으로 자신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것이다.
무섭도록 섬세한 초식 운용이었다. 절정고수의 운용이라 해도 절대 과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이봐.”
깜짝 놀란 명호림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뒷짐을 진 연호정의 얼굴에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어렸다.
“이따위 손장난으로 끝낼 생각인가?”
“…….”
“역시 죽일 생각으로 눌러 줘야 튀어나오려나?”
명호림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구주명가의 장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딜 가도 명가를 대표한다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한데 족히 일고여덟은 어린놈에게 저따위 소리나 듣고 있는 것이다.
순간 잊고 싶은 기억이 떠올랐다.
피 묻은 목검을 들곤 자신을 내려다보던 청년. 자신과 너무나도 닮은 그 청년의 얼굴에는 짙은 조소와 경멸이 담겨 있었다.
“너, 이 애송이가……!”
그때였다.
“그만!!”
창천을 가로지르는 웅혼한 내공이 연회장 전체를 울렸다. 넋을 잃고 두 사람의 대결을 쳐다보던 사람들이 소리의 근원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남궁현과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칠대세가의 회합에서 그리 격한 무공을 주고받다니? 제정신들이오?!”
강한 어조였다.
명호림은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연호정의 살기에 휩쓸려 본능적으로 주먹을 휘두른 그였다.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남궁현이 차가운 눈으로 명호림을 바라보았다.
“명 형. 명 형은 이번 회합에서 가장 어른이시잖소.”
“…….”
“우리 후기지수의 회합은 수십 년 역사를 가진 명예로운 사교의 장이오. 그 분노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손속에 사정을 두셨어야 했소.”
교묘한 말이었다.
명호림에게 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연호정의 무도함을 질책하는 언사였다.
남궁현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연 공자.”
연호정은 그를 쳐다도 보고 있지 않았다.
남궁현은 울컥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안 그래도 동생 일로 손을 봐 주려던 놈이었다. 그런 놈이 제갈아연과 가까운 사이라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한데 남궁세가가 주관하는 회합에서 이런 난장을 치다니?
분노가 절로 들끓어 올랐다.
“당신 제정신이오? 상대 가문의 자제에게 시비를 걸다니, 이 무슨 무도한 짓인가! 후기지수 회합 역사에서 당신 같은 자는 한 명도 없었소!”
여전히 연호정은 남궁현을 보지 않았다.
그 모습이 남궁현을 자꾸만 자극했다. 상대는 자신의 언행에 진정 관심이 없다는 걸 본 것이다.
“남궁세가가 그리 우습단 말인가!”
그때, 제갈아연이 나섰다.
“남궁 소협은 말씀을 그리하시는 게 아니지요.”
남궁현의 눈이 흔들렸다.
“아연아?”
“연회는 중단되었습니다. 사석이 아니지요. 남궁 소협은 호칭에 주의해 주세요.”
“……!”
“이어서 하죠. 남궁 소협의 말에는 어폐가 있어요. 주최 가문으로서 화가 나는 건 이해하지만, 어찌 한쪽 편을 들어 공정치 못한 언사를 내뱉는 건가요?”
“공정치 못한 언사라니? 그 무슨……!”
제갈아연이 차갑게 말했다.
“이번 회합을 망친 당사자는 연 공자가 아니라 당 소협이에요.”
“……!”
“연 공자는 그저 그를 말리려 했을 뿐이에요.”
“아연, 아니 제갈 소저. 제갈 소저도 직접 보았잖소. 그는 당 소협을 말리려던 게 아니라…….”
“연 공자가 직접 말하지 않았나요? 실수라고.”
“……?!”
“명 공자 역시 실수임을 인정했지요. 제가 알기로 벽산연가에 암기술은 없어요. 잔을 날려 당 소협을 막으려던 게 엇나갔을 뿐입니다.”
제갈아연이 명호림에게 물었다.
“제 말이 맞죠?”
물끄러미 제갈아연을 보던 명호림이 한숨을 쉬었다.
“그렇소.”
사건을 묻어 버리는 한마디였다. 남궁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갈아연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 공자. 제가 생각해도 연 공자의 실수는 분명 있어요. 하지만 사건을 일단락하기 위해서라도 이리 나선 이유는 말해 줘야 할 것 같아요.”
명호림을 노려보던 연호정이 제갈아연을 보았다.
제갈아연의 표정은 단호했다. 하지만 연호정은 그 눈에서 솔직한 간절함을 읽었다.
문득 누군가 소맷자락을 잡는 게 느껴졌다.
“형님.”
돌아보니 연지평이 서 있었다.
놀랍게도 연지평의 얼굴에서 조심스러움이나 다급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두 눈을 분명하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데, 강단 있는 표정이 돋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두의 시선이 연호정에게로 쏠렸다.
연호정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래, 시간은 많다.’
지난 생에선 흉수의 옷깃도 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그림자라도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치솟는 살기를 다스리지 못했다.
당양선이 사고를 쳤을 때, 차라리 잘됐다 싶기도 했다. 어차피 어수선한 판이라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일단은 자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신은 흑제성주가 아니라 벽산연가의 대공자니까.
그가 재차 명호림에게 시선을 던졌다.
명호림이 움찔했다.
“명가의 무공은 과연 명불허전이더군.”
“…….”
“좌중을 뒤흔드는 기도가 인상적이었소. 타오르는 호승심을 참지 못한 내 잘못이 크오.”
명호림이 미소를 지었다. 다소 억지스러웠지만.
“이해하네.”
“그런 말투는 허락한 적 없소.”
“……!”
“우리 사이에 친분이 있었던가?”
명호림의 얼굴이 절로 굳어졌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명호림의 것처럼 어색하지 않았다.
“실례했소.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배움을 청해도 되겠소?”
“……그럽시다.”
“고맙소.”
연호정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절도 있게 포권했다.
“부족한 이 사람 때문에 자리를 망쳐 죄송하오. 봐서 알겠지만, 수양이 이만저만 부족한 놈이 아니외다. 제 부친께서도 성질머리 더러운 아들놈에게 인내심이 부족하다며 마보를 시키곤 하신다오.”
뜬금없는 자기 비하였다. 절대로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 그러니 오히려 분위기가 부드러워져 버렸다. 키득키득 웃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연호정은 바뀐 분위기를 곧바로 알아챘다.
비록 살기를 주체하지 못했지만, 그는 맨손으로 흑제성을 일군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필요할 때는 필요한 만큼의 사교성도 보여 줄 줄 알았다.
“내일 회합에선 사죄의 의미로 한 분, 한 분께 술을 따라 드리겠소. 그것으로 이 못난 놈의 실례를 용서해 주시길 부탁드리오.”
그때, 팽대호가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연호정에게 향했던 좌중의 시선이 팽대호에게 옮겨졌다.
팽대호가 짐짓 화난 얼굴로 외쳤다.
“한 잔이라니? 내 몸뚱이를 보시오! 고작 술 한 잔으로 용서하란 말이오?”
“하면 내가 어찌하면 좋겠소?”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십시다! 우리 모두가 취할 때까지 멀쩡할 수 있다면 그때 용서하겠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내일을 단단히 각오해야겠군.”
그 말에 팽대호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크핫핫! 거 화통해서 마음에 드는구먼! 좋소! 남아일언 중천금이라 했으니 그 약속 꼭 지키시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귀하는 꼭 쓰러트리겠소.”
“크하하하!”
느닷없이 나선 팽대호 덕에 분위기가 살았고, 솜씨 좋게 받아친 연호정 덕에 흉흉했던 공기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제갈아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지평 역시 마음 편한 미소를 지었다. 남궁현의 얼굴은 완전히 경직되었고, 명호림은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이 되었다.
그날의 가장 큰 피해자는 결국 당가가 되었다. 자업자득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