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261)
261화. 불의 발견 (5)
“…….”
부녀지간의 침묵은 생각보다 길었다.
따뜻하게 우린 차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다향도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꽤 늦었구나.”
당관이 특유의 고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귀맹한 지 벌써 며칠이 지났거늘, 애비에게 인사하러 오기가 그리도 귀찮았던 게냐?”
당상아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저는 탕마군 소속입니다. 마땅히 탕마군으로 귀환해야 하며, 그간 미뤄 두었던 일정도 소화해야 했습니다.”
“너는 탕마군병이기 전에 당가의 사람이다.”
“당씨를 내놓고 모용 군장에게 보내려 하셨습니다.”
“…….”
“저는 이미 당씨 성을 반쯤 내려놓고 있었는데, 설마 제가 오해한 건가요?”
당관의 볼이 씰룩거렸다.
“하면, 모용 군장과 혼인할 결심은 섰느냐?”
“아직이요.”
쾅!
탁자가 흔들리며 찻잔이 엎어졌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찻물 소리가 묘한 불편함을 유발했다.
“내, 너의 방종을 눈 감아 주었던 것은 네가 내 자식이자 당씨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가 진정 당씨 성을 버리겠다면, 그때부터는 나 역시 너를 자식으로 대하지 않겠다.”
“그 얘기는 출정 전에 이미 다 하셨어요.”
“뭣이?!”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가문의 역사를 들먹이며 딸을 내치려 한 것은 아버지예요.”
“……!”
“정작 섭섭해하고 화를 낼 사람은 저인데, 왜 자꾸 아버지께서 화를 내시나요? 정말 저를 영혼 없는 인형쯤으로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인형이었다면.”
당관이 으르렁거렸다.
“차라리 말 못 하는 인형이었다면, 네게 내 선택을 이해해 달란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해는 해요. 하지만 실망도, 분노도 다 제 몫이에요.”
“너!”
“아버지.”
당상아가 웃으며 말했다.
“제게 화내지 마세요.”
“…….”
“다 아버지께서 자초하신 일이잖아요. 자신이 벌인 일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지요. 저는 분명 어릴 때 그렇게 배웠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께요.”
당관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당상아가 말을 이었다.
“막상 화를 내려고 온 사람은 전데, 아버지께서 이러시니 김이 새네요.”
“……나가라.”
“책임부터 지시죠.”
“무슨 책임!”
“화는 제가 냈어야 마땅하지만, 오히려 제 가슴에 비수를 꽂으셨잖아요. 그에 따른 책임을 지셔야지요.”
당관은 기가 차는 것을 느꼈다.
“지금 그따위 말 같지도 않은 말로 날 협박하는 것이냐?!”
“책임을 지기 싫으시다면 부탁은 어떨까요?”
“뭐?!”
“아직 저를 당씨라고 생각하신다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어요?”
“시끄럽다! 내 더는 너를 자식이라고 생각지 않을 것이니, 당장 여기서……!”
“제가 인간적으로 꽤 의지하는 사람이 한 명 있어요. 아, 오해는 하지 마세요. 연모의 감정은 없으니까요.”
“……?!”
“그 사람과 한 번 만나 주시겠어요?”
당관은 말없이 당상아를 노려보았다.
당상아가 품에서 서신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자식으로서의 마지막 부탁이에요. 들어주셨으면 좋겠네요.”
“…….”
“앞으로는 찾아뵐 일 없을 거예요. 부디 몸조심하세요.”
당상아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돌아서는 보행에 한 치의 거리낌도 없었다. 딸의 냉정하기까지 한 걸음을 보며, 당관은 생각했다.
증오와 한으로 얼룩진 관계지만, 역시 당상아도 당가의 핏줄이라고. 저 독하디독한 단호함은 아무나 보여 줄 수 없는 것이라고.
당상아가 문을 나서기 전, 당관이 말했다.
“당씨 성을 내놓겠다는 것은, 그간 네가 익힌 당가의 무공을 모두 포기하겠다는 말과도 같다.”
“…….”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으리라 생각한다.”
“가주님.”
아버지가 아니라 가주님이라 부른다. 당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당상아가 싱긋 웃었다.
“출정 전에 이미 내놓은 목숨이랍니다.”
“……!”
“거두어 가시려거든 얼마든지 그렇게 하세요. 기다리죠.”
쿵!
문이 닫혔다.
분노 가득한 눈으로 문을 노려보던 당관이 이내 탄식을 뱉어 냈다.
“차라리 네가 낫다. 천하가 독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이 애비보다 네가 더 독한 것 같구나.”
한참을 자조하던 당관이 문득 탁자 위의 서신으로 눈을 돌렸다.
물끄러미 서신을 보던 그가 손을 뻗었다.
* * *
휘이이잉.
나무와 나무를 훑고 지나가며 무뎌진 날을 세운 칼바람이 옷깃을 스쳤다.
어느덧 하늘 저편에 석양이 깔리고 있었다. 확실히 겨울은 겨울인지, 여름보다 해가 지는 시간이 확연하게 빨랐다.
피처럼 붉게 물든 하늘을 보는 당관의 얼굴도 붉었다.
‘붉군.’
꽤 아름다운 경치였다. 무림맹 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숲이었지만, 의외로 경관이 훌륭한 곳이었다.
물론 당관은 편안히 경치나 감상할 상태가 아니었다. 조금 전 딸내미와의 대화로 아직까지도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먼저 버린 사람은 나라고……?’
당관의 눈에 핏발이 섰다.
‘버리다니? 그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 마라. 본가의 주인은 오직 남자만이 될 수 있다. 네가 아무리 날고 기는 실력을 쌓아 봤자, 절대 가주가 될 수 없단 말이다.’
딸의 얼굴이 떠올랐다.
항상 웃고 다니지만, 그 이면에 누구보다도 짙은 허무함을 품고 다니던 딸의 얼굴이.
‘아버지는 틀렸다. 가문의 전통을 지키는 것은 고지식한 것이 아니야. 전통은 전통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전통을 위해서라면, 가문이 탄탄한 반석 위에서 빛날 수 있다면 고집이든 아집이든 부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며 혀를 차는 자들의 아가리에 맹독을 쏟아부어 줄 것이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사박. 사박.
저 멀리서 눈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왔군.’
당관이 몸을 돌렸다.
‘대체 어떤 놈이길래…….’
순간 당관의 눈이 커졌다.
“네놈?!”
“시작부터 네놈이라니, 너무하시는군.”
청년, 연호정이 담담하게 웃었다.
“잘 계셨소?”
“……설마, 딸내미에게 만남을 부탁한 게 네놈이었느냐?”
“그렇소.”
푸스스스.
당관의 몸에서 섬뜩한 진녹색 광채가 뿜어졌다.
극도로 분노한 당관, 지금껏 꾹꾹 숨겨 두었던 막강한 힘을 여지없이 드러내고야 말았다.
치이이이이익!
그가 선 땅 반경 오 장 영역이 무서운 속도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눈만 녹은 게 아니었다. 얼어붙은 대지의 표면까지 온통 질척해질 정도였다.
연호정의 얼굴에 감탄이 일었다.
“과연 대단한 독공이로군. 예전보다 한층 더 독해진 것 같은데?”
“네깟 놈이 감히, 내 딸을 이용해서 날 불러내?”
“당신 같은 인간 하나 만나겠다고 상식인인 딸까지 이용해야 하는 내 처지가 좀 고달프긴 해.”
“뭣이?!”
“됐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오? 그 기괴하기 짝이 없는 기운은 이만 심어 두고, 나랑 얘기나 합시다.”
“이놈이!”
“아니면.”
번쩍!
연호정의 두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예전처럼 이 어린놈 입에서 쌍욕이 튀어나와야 진정하시겠소?”
“……!”
“나는 아직 홍요회 건을 잊지 않았소이다. 물론 그 건은 묻어 두기로 했지만, 감정은 남았지. 속 좁다고 욕해도 어쩔 수 없지만 말이오.”
연호정이 환하게 웃었다.
“어린놈 입에서 거친 말 나오게 하지 말고, 기껏 먼 걸음 하셨으니 들을 말 듣고 가시구려.”
“틀렸다.”
“음?”
“내, 딸의 부탁으로 이 자리에 오긴 했다만, 그 대상이 너인 줄 알았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즉, 너는 사천당가 가주의 시간을 뺏은 거야.”
스르륵.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가던 독기가 일순간 그의 몸으로 회수되었다.
놀라우리만치 빠른 속도였다. 이 정도 힘을 일거에 방출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방출된 기운을 한순간에 수거하는 것도 보통 깨달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과연 사천당가의 가주. 육대세가의 주인을 자처할 만한 실력이었다.
“내가 이곳에 올 만한 가치가 있었는지는 오롯이 내가 판단할 것이다. 만에 하나 그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뇌옥에 갇히는 한이 있더라도 널 한 줌 핏물로 만들어 버릴 것이야.”
진심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이전처럼 자존심만 가득하다거나 분노로 눈이 뒤집힌 것이 아니었다.
고요하고 치명적인 살기. 당관은 진심으로 연호정을 죽일 마음을 먹은 것이다.
‘재미있군.’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헛소리로 마음부터 뒤흔들어 놓은 후에 공격하려고 했더니, 이미 흔들릴 대로 흔들렸단 말이지?’
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마 당상아와의 대화로 심경이 무척 복잡해졌을 것이다.
“댁 실력으로 날 죽일 수 있을지 의문이군.”
“어디 확인해 보겠느냐?”
“확인 좋지. 다만, 나 역시 바쁜 사람이니 일단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당관이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원하는 게 뭐요? 맹주요?”
“……?!”
“일단 그 대답부터 들어 봅시다.”
당관의 표정이 돌변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무시할 수 있는 말이 있고, 없는 말이 있었다.
안 그래도 내년에 있을 선거 때문에 봉공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기 바쁜 실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느닷없이 맹주를 바라냐니?
“……그 무슨 헛소리냐?”
“당신에게도 권력욕이라는 게 있다는 걸 모르지 않소. 다만, 나는 모용군이 바라는 건 알아도 당신이 원하는 게 어떤 자리인지는 모르겠더구려.”
“……!”
“말씀해 보시오. 당신이 원하는 게 무림맹주 자리요?”
“시건방진 놈이라는 거야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만,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하긴, 사천당가가 무림제일이라고 착각하는 고집 센 바보들의 수장이니 맹주직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지. 다음으로 넘어가겠소.”
“미친놈! 정녕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것이냐?!”
“당신은 절대 무림맹에서 벗어날 수 없소이다.”
“뭐?”
“모용군이 공공대사를 음해하기 위해 사전 작업에 들어간 것, 알고 계셨겠지?”
“……?!”
당관의 눈빛이 돌변했다.
연호정은 그 변화를 귀신처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모른다?’
진짜 모용군이 한 짓이라도 당관은 모를 수 있다.
정확히는 반반의 확률이라고 생각했다. 당관의 성격이 워낙 날 서 있는지라, 굳이 위험 부담을 안고 알려 줄 필요는 없었으리라.
동시에, 당관이 도와준다면 일이 훨씬 편하게 진행될 수도 있다. 그래서 반반의 확률이라고 생각했다.
‘모용군의 짓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모용군의 짓일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모용군이 말해 주지 않은 모양이군. 그렇다면 내 생각이 맞긴 맞는 모양이오.”
“무슨 개소리냐?”
“모용군은 당신을 놔주지 않을 거요. 이유인즉, 당신은 무림맹주 자리엔 관심이 없는 주제에 실세가 되기를 원하니까.”
“……!”
“당신, 모용군과 동맹을 맺었다고 생각하시오? 헛소리. 어쩌면 당신은 당신 뜻대로 모용군을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실상은 그 반대외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당신, 모용군이 쓰다 버릴 패로 삼기 위해 잘 가꾸는 중인 거 알고 계시오?”
“……!!”
“이번 공공대사를 음해하려고 꾸민 일, 우리 쪽에서 터트리면 모용군은 그 범인으로 누구를 지목할 것 같소?”
당관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용군에게 있어서, 당신도 결국 하나의 패에 불과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