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291)
291화. 야수도(野獸道) (1)
“부주님.”
“음, 오셨는가.”
양천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앞에는 검붉은 복식을 차려입고 절제미를 드러내는 모용연화가 있었다.
“그래, 보고할 것은?”
“여기 있습니다.”
모용연화가 공손한 자세로 문서 몇 장을 바닥에 놓았다.
양천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우우웅.
가벼운 바람이 분다 싶더니, 어느새 문서들이 양천의 손안에 잡혔다.
몇 번이나 보았던 광경이지만, 모용연화는 새삼 경이와 공포를 느꼈다.
‘이것이 성천십삼좌의 경지.’
삼 장이 족히 넘는 거리에 떨어진 문서를 가벼운 손짓 한 번으로 띄워 가져온다.
역시나 굉장한 내공 운용이었다. 굉장하다는 말조차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놀라운 무공이었다.
‘종이가 아니라 사람이라도 가볍게 들어 올리겠지. 그 정도 자신감이 느껴져.’
저 정도 힘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손도 대지 않고 사람의 목을 꺾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인간에게 허락된 힘이 아니었다. 성천십삼좌가 무림의 태양으로 불리는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리라.
‘과연 나 역시, 저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모용연화의 눈이 야망으로 불타올랐다.
잠시 후.
“잘 처리하셨구만.”
“감사합니다.”
양천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모용가주가 자신해서 보낼 만한 인재야. 하기야, 어지간한 자신이 없으면 선뜻 제 혈육을 보내지도 못했겠지. 긴가민가했거늘, 고작 석 달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스스로를 잘 증명했구먼.”
“감사합니다.”
천하의 투왕이 하는 칭찬이었다. 그럼에도 모용연화는 담담했다.
“하지만.”
“……?”
“역시나 전(前) 정보부장 정도의 파격적인 일 처리와 통찰력을 보여 주진 못하는군.”
모용연화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녀는 양천이 말하는 전 정보부장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연호정!’
순간 모용연화는 가슴 안쪽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맹렬한 증오심과 질투심을 느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연호정이란 사실을 양천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걸. 그랬다간 아버지는 물론, 자신조차도 양천의 손에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이런 평가를 받을 때면 다 말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불쑥 솟구쳤다.
‘감히!’
양천은 단순히 무공만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지식, 안목 등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연호정보다 못하다는 것을. 양천의 안목이 그에 관해서만큼은 틀렸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물론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것은 그저 질투심에서 기인한 평가라는 걸.
연호정이 자신보다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양천과 아버지를 모욕하는 일이었다. 이 두 사람의 안목이 자신보다 낮을 리가 없었다.
‘대체 그놈의 어떤 면이 그렇게 고평가를 받을 만한 거지?’
뛰어난 두뇌, 과감한 일 처리.
연호정이 흔치 않은 천재라는 것은 그녀 역시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봤을 때, 그 정도 능력이 되는 사람은 은근히 많았다.
그럼에도 유독 연호정만이 고평가를 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말 자신은 보지 못하는 특별한 무언가를, 양천과 아버지는 봤던 것일까?
“자존심이 상하시는가?”
한눈에 모용연화의 심경을 꿰뚫어 보는 양천이었다.
모용연화가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그렇습니다.”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어쭙잖은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그는 모용연화의 그런 면이 마음에 들었다.
모용연화는 뛰어난 인재다. 하지만 주변 평판에 신경 쓰기도 하고, 자신보다 잘난 사람이 있으면 질투하기도 한다.
대개의 사람이 보여 주는 보편적인 모습들을 모용연화에게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천이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더 높이 날아오르려는 향상심이 있기 때문이었다.
분노, 질투, 혐오 등의 부정적인 감정도 올바르게 걸러 내면 성장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양천이 모용연화를 크게 쓰려 다짐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와 비교하려 들지는 말게나.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 그이는 너무나도 뛰어난 재능 탓에 자네 아버지의 손에 목숨을 잃었어.”
“…….”
“중요한 것은 능력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능력을 안고 성장할 수 있는가야. 그런 면에서 보면, 오히려 자네가 전 정보부장보다 훨씬 낫지.”
모용연화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그자보다 확실히 아래긴 아래야.’
자신은 양천을 속일 필요가 없다. 말하자면 있는 힘껏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면 되는 환경이었다.
연호정은 달랐다.
그는 양천을 속여야 했고, 무림맹의 작전을 조율해야 했으며, 절묘한 시기에 탈출까지 해야 했다.
연호정은 그러한 환경에서도 양천을 사로잡았다. 제 능력을 다 보일 수 없는 환경에서 저리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건, 자신이 아직 연호정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래, 인정하자. 나는 아직 천재(天才)의 영역에 들지 못했어.’
진짜 천재가 되기 위해서.
괴물들이 판이 치는 영역에서도 특출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더 공부하고, 더 악착같이 수련해야 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자네 역시 내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 주는군. 그 짧은 시간에 죽어 가던 비단 사업을 이 정도까지 끌어올렸어. 평범한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성과지.”
“감사합니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약속한 대로, 내 자네를 묵룡부의 정보부 조장으로 삼겠네.”
정보부 조장.
부장도, 차장도 아닌 조장이다.
나이를 생각하면 그 역시 파격적인 인사였지만, 연호정을 생각하면 부족해도 한참이나 부족한 자리였다.
그러나 모용연화는 더 이상 연호정을 떠올리지 않았다. 분노와 질투는 그대로이되,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녀는 그것을 잊지 않았다.
“기실, 자네가 보여 준 능력을 생각하면 조장이 아니라 차장급으로 진급시켜 줘도 큰 모자람은 없을 것이네. 그러나 자네도 알다시피, 자네는 언젠가 본부를 떠날 사람이야. 더 높은 직책을 맡기기에는 아직 부담스러운 부분이 많아.”
모용연화는 양천을 이해했다.
“부주님을 위해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네.”
양천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왕지사 얘기가 나온 김에, 자네에게 명을 하나 내릴 생각이네만.”
“하명하시지요.”
“어느덧 새해가 지났네. 무림맹주를 선출하는 날이 코앞까지 왔다는 게야.”
모용연화의 눈이 빛났다.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본부의 소속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자네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조작하고 차단했으니, 무림맹의 봉공들이라도 누구 하나 아는 자가 없을 것이야.”
“네.”
“무림맹으로 가게.”
“……!”
“가서 자네 부친에게 내 선물을 전해 주게.”
“……알겠습니다.”
“하나 더.”
양천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자네가 할 수 있는 한, 본부에 이익이 되는 모든 정보를 뽑아 오게나.”
모용연화의 눈이 흔들렸다.
“부주님.”
“아네. 자네 부친을 봐서라도 그래서는 안 될 일이지. 즉, 나는 자네에게 부친 몰래 정보를 빼 오라고 말하는 게 아니네.”
“하면……?”
“자네 부친에게 서신을 보낼 것이네. 두 사람이 잘 궁리해서, 우리에게 보내도 크게 위험하지 않을 선에서의 정보를 보내게나.”
모용연화가 살짝 침을 삼킨 후 말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부주님. 아버님께 듣기로, 맹 차원의 지원은 아버님께서 무림맹주가 된 이후부터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양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모용가주가 무림맹주가 못 되면?”
“……?!”
“하면 나는 완전히 생돈을 날리는 셈이 아닌가?”
“……!”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지 말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야. 내가 아니라 천하 모두가 도와준다 한들, 운이 따라 주지 않으면 그만한 자리에 앉기는 힘들다네.”
“어찌 그렇습니까?”
“무림맹 정도의 덩치를 지닌 조직의 수장이란, 단순히 힘이 있고 능력이 되는 자라 하여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그러한 자리는 천하의 운명을 뒤바꿀 수 있다네.”
“……운명.”
“그만한 자리에 앉기 위해선 능력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훗날 자네도 알게 될 걸세. 그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나는 운이라고 말했지만, 운이라는 단어로도 그것을 완벽히 설명할 수 없어.”
양천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세상에 잘난 놈은 많아. 천재도, 괴물도, 특이한 놈도 많지.”
“…….”
“그러나 언제나 정점은 하나야.”
모용연화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정점은 하나다…….’
별것 아니라면 아닐 수도 있는 얘기.
그러나 양천의 그 말은, 모용연화의 가슴을 이상할 정도로 강하게 뒤흔들었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부친께 보낼 선물은 아직 준비 중일세. 자네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터이니, 출발은 열흘 후라고 생각하면 될 걸세.”
“……알겠습니다.”
“이만 가 보시게.”
“네.”
모용연화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대전에서 나갔다.
턱을 괸 양천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젊은이들과의 대화는 이래서 재미가 없고, 동시에 흥미진진한 법이지.”
격에 맞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는 피로를 유발하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모용연화는 양천의 대화 상대로 아직 한참 부족했다.
하지만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젊은이와의 대화라면 얘기가 다르다. 양천은 모용연화에게서 큰 가능성을 보았고, 잘 토닥여 주면 그 발전 속도가 누구보다도 빠르리란 것 역시 꿰뚫어 보았다.
앞으로 별 탈 없이 큰다면, 모용연화는 필시 대단한 인재가 되어 천하의 한 축을 담당할 것이다.
‘그래, 별 탈 없이 큰다면 말이지.’
그때였다.
움찔!
양천은 저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댔다.
‘……음.’
그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려 왔다.
‘기분 더럽군.’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그 감각은 가슴에 찍힌 황금빛 손자국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마치 안 통하던 피가 순간적으로 쫙 돌 때처럼 찌릿찌릿한 느낌이랄까.
통증이라 하기에는 너무 미미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에는 지나치게 선명한 이 감각.
“사음교주.”
츠츠츠츠츠.
낮게 깔리는 절대자의 살기에 사방을 밝힌 불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래, 대가 없는 도움은 없을 거라 생각은 했었지. 하지만 나까지 통째로 집어삼키려 들 줄은 몰랐지.”
양천이 차갑게 웃었다.
“기다리거라. 다른 잡졸은 몰라도 사음교주, 네놈 하나만큼은 반드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트려 줄 테니까.”
두 번은 당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한번 당한 건 열 배로 되돌려 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투왕 양천, 무림 천하가 인정한 천하제일의 싸움꾼이었다.
한참이나 가슴을 쓰다듬던 양천이 이내 입맛을 다셨다.
“그나저나, 이 망할 제자 놈들은 언제 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