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297)
297화. 종(鐘)이 없는 싸움 (1)
“안에 계시오?”
“……알면서 그리 묻지 말고 들어오시오.”
“알겠소.”
끼이익.
문이 열리고 연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관이 코웃음을 쳤다.
“아들이 와서 흔들고, 아비가 와서 토닥이고. 참으로 궁합이 잘 맞는 부자지간이외다.”
연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씀이오?”
가만히 그의 얼굴을 살피던 당관이 고개를 획 돌렸다.
“됐소. 와서 앉으시오.”
“그럽시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다탁을 마주하고 앉았다.
다향을 맡던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직접 타신 차요?”
“아랫것들이 없으니 내 직접 탈 수밖에.”
“하인들은 어디로 보내셨소이까?”
“독공(毒功) 수련은 많은 위험을 동반하오. 이 건물 안에 있다간 중독되어 죽을 수도 있소.”
“잘하셨소이다.”
당관이 고개를 돌렸다.
“수련이 끝난 후에 잡일을 처리해 줄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오. 그놈들이 없으면 내가 직접 해야 하니까.”
정말이지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다.
하지만 괜찮다. 연위는 당관의 이러한 변화가 실로 마음에 들었다.
“그나저나, 차를 타는 실력이 느신 것 같소.”
“…….”
“배우지 않았다면 짧은 시간에 이리 풍부한 향을 끌어내진 못할 텐데 말이오. 온도도 적당하고.”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연위가 은근슬쩍 물었다.
“따님께 배우셨소?”
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말을 하려거든 이만 나가시오.”
“허허, 미안하오. 괜한 말을 했소이다.”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연위가 말을 이었다.
“사천으로 가신다는 얘기를 들었소이다.”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어조로 느닷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말을 한다.
당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누가 그러더이까?”
“그저 소문을 들었을 뿐이오. 다만, 만약 정말로 가신다면 인사라도 해 둘까 싶어서 말이오.”
당관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없이 연위의 얼굴을 살피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하기야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해 봤자 별 의미도 없는 양반이겠지만.
당관이 고개를 돌렸다.
“사천으로의 귀환은 보류하기로 했소.”
연위의 눈이 커졌다.
“마음을 바꾸신 게요?”
“그렇소.”
“허허, 인사는 나중으로 미뤄도 되겠구려.”
물끄러미 연위를 보던 당관이 약간의 의아함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연가주가 맞소?”
“음?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
“처음 당신을 본 것이 봉공회의 때였소. 당시만 해도 분명 당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소.”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하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소이까?”
“답답하고 무뚝뚝하며, 시류를 읽지 못하는 사람.”
“허허허.”
냉정하고도 솔직한 평가였다. 실제로 당관은 연위를 그런 사람으로 보았다.
“지금은 다른가 보오?”
“그렇소.”
“내가 어떻게 달라진 것 같소?”
당관은 대답 없이 차만 마셨다.
연위 역시 그가 말하지 않을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굳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아도, 자신이 변했다는 것은 그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긴.’
연위는 지난날의 자신을 떠올렸다.
‘많이 변했지.’
가문의 이름값, 죽은 아내의 유언, 과중한 업무 등으로 그는 유독 딱딱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어 기제에 가까웠다. 정신적으로 너무 몰렸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아를 유지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첫째의 변화, 그리고 세상이 변화하는 것을 보았다.
급변하는 세상에 맞춰 아들이 무림으로 나가고, 그 이후에 무수히 많은 일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연위 역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
지금껏 가장 후회가 되는 일은 자식들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아내가 죽었을 때보다도 더 후회스러웠던 일. 자신의 목숨보다도 사랑했던 여자의 죽음 앞에 무력했던 그때보다도, 그 여자와의 사랑으로 탄생한 결실을 잘 돌보지 못한 것이 더 후회스러웠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연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더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연위가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이 사천의 사정에는 그리 밝지 못함에 미리 양해를 구하오.”
“무슨 말이오?”
“혹, 처(妻)가 계시오?”
자신처럼 아내가 먼저 떠났는지를 물어보는 것이다.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십 년 전에 먼저 갔소.”
“그렇구려.”
연위는 당신의 아내가 왜 죽었느냐 묻지 않았다. 들어서 좋을 얘기도 아니었고, 말하는 이로서도 힘든 일이 될 것이다.
다만, 이 얘기는 꼭 하고 싶었다.
“고인(故人)을 사랑하셨소?”
당관이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거요?”
“정략혼이 흔한 시대지만, 내 생각에 가주께서 애정도 없는 여인과 혼사를 치르진 않았을 것 같아서 말이오.”
“틀렸소. 연정(戀情)이니, 뭐니 하는 달달한 감성에 현혹된 적은 없소이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비록 정략혼이었다 할지언정, 내가 보는 가주라면 충분히 고인을 위하셨을 거라 생각하오.”
“…….”
“자녀분들에게 잘해 주시오. 그대의 자식들은 그대가 사랑했던 사람과의 결실이오. 가주에게 있어 누구보다도 소중한 존재인 만큼, 죽기 전에 후회할 일은 더는 만들지 맙시다.”
당관이 차갑게 웃었다.
“조언을 빙자한 가르침이 취미시오? 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소만.”
연위가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하오. 내 후회가 깊어, 한 번씩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하곤 한다오.”
“흥.”
당관이 팔짱을 꼈다.
“쓸데없는 소리는 이쯤 합시다. 그대의 아드님께 들으셨소?”
비꼬는 느낌이 역력한 어조였다.
연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들이라면, 호정 말이오?”
“그렇소.”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나더러 맹주 선거 후보로 나서 달라고 부탁합디다.”
순간 연위의 눈이 커졌다.
“대체 언제 그랬소?”
“아침나절부터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찾아와서 그리 말하더이다. 모르셨소?”
“몰랐소이다.”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연위가 이내 피식 웃었다.
“녀석답구려.”
당관이 눈썹을 찡그렸다.
“녀석답다라…… 그거 꽤 묘한 말이로군. 아들이 그리 나올 줄 알고 계셨소?”
“그리 나올 줄 몰랐으니 놀란 것 아니겠소. 다만, 듣고 나니 알겠소. 호정이라면 그런 식의 대응수를 던질 만하지.”
연위의 얼굴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해서, 가주께서는 그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이셨소?”
대답 없이 자신을 보는 당관을 마주 바라보던 연위의 얼굴이 이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허락을 하셨구려?”
“그렇소.”
“어, 어째서?”
연호정이라면 그런 제안을 할 만도 하다.
물론 그것은 연위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무공이든 정치든 되도록 정정당당을 고수하지, 판을 깔거나 생각지도 못한 반격을 가하는 등의 수법에는 능하지 못했다.
다만 놀란 것은, 당관이 그 제안을 수락했다는 사실이었다.
“가주께서도 아실 거요. 호정의 제안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있소. 모용군의 대항마로 나서 달라는 뜻이겠지. 모용군의 시선을 이쪽에 집중시켜 음지에서 그를 무너트리고, 제 입맛에 맞는 맹주를 세우겠다는 뜻 아니겠소?”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모용가주의 야망을 제지하려는 의도는 있겠지만, 입맛에 맞는 맹주를 세우겠다는 의도는 없을 것이오.”
“있소.”
“…….”
“그 녀석의 눈은 누가 무림맹주가 되어야 할지를 확신하며 좇고 있었소. 적어도 난 그렇게 보았소.”
연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게 누구요?”
“거기까지는 나도 모르오. 물어본다고 말해 줄 것 같지도 않고. 정 궁금하면 가주께서 직접 아들내미에게 물어보시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당관이 입맛을 다셨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나는 선거에 나갈 것이오. 그리고 떨어지겠지.”
그 스스로도 자신이 맹주 선거에서 승리를 거둘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렇게 되겠지.”
당관의 인망이나 능력을 떠나서, 사천당가가 주는 위압감과 공포는 실로 대단했다.
그런 가문의 수장이 무림맹주가 된다? 모르긴 몰라도 거의 모든 백도인이 들고 일어날 것이다.
나아가, 백도 무림 특유의 고정 관념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독과 암기를 주병기로 사용하는 당가는, 그 인상이 흑도에 비견될 정도로 안 좋았다.
“문제는, 그걸 모용군이라고 모르진 않을 거란 말이오.”
“그렇소.”
“당연히 당신 아들내미도 거기까지는 내다보았을 것이오. 말하자면, 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허수아비가 된다는 뜻인데.”
당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허수아비를 세워 두고 뭘 어쩌겠다는 것인지 모르겠군.”
이미 선택을 내렸으니 자신이 허수아비가 되든 뭐가 되든 받아들이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하기야 선거에서 떨어질 것을 알고도 수락했으니, 그 역시 그 정도는 예상했을 것이다.
물끄러미 당관을 보던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가주께서는 우리 큰애가 점지한 맹주감이 있다고 말씀하셨소.”
“그렇소만.”
“나는 그 부분에 대해 아는 게 없소. 다만, 이것 하나는 알고 있소.”
“……?”
“적어도 당신을 허수아비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오.”
당관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무슨 말씀이오?”
“큰애는 이기기 위해서라면 범부는 상상도 못 할 짓도 태연자약하게 저지르는 녀석이오. 다만 그 승리를 향한 욕심의 근본에는 언제나 대의(大義)가 있기에 아직 두고 보고 있지만, 그간 꽤 과격한 짓을 많이 저질렀소이다.”
“흥.”
“그러나, 큰애에게는 선이 있소.”
“선?”
“그렇소.”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녀석은 분명한 적이라고 판명되지 않은 자라면, 설령 그를 이용할지라도 비참하게 만들진 않소이다.”
당관이 조소를 지었다.
“당신은 당신 아들내미를 너무 착하게만 보는 것 같소이다. 내 살다 살다 당신 아들처럼 막 나가는 놈은 처음 봤소.”
“막 나가지만, 그로 인해 큰 피해를 보지 않은 이유는 녀석이 나름대로 생각해 둔 선이 있기 때문이오.”
“재미있군.”
“그리고, 어쩌면 이런 생각도 드오.”
연위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귀하를 맹주로 만들 생각은 없어도, 맹의 정치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거물로 만들 거라는 생각.”
“……!”
당관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셨소?”
“그 정도 거물은 되어야 모용가주를 제대로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오.”
“…….”
“그리고 또 하나.”
연위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내 아들이, 귀하라는 사람의 본성을 나름대로 괜찮게 본 모양이외다.”
당관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당신 아들내미의 오만함은 가히 천하제일이라 할 만하오.”
“왜 그렇소?”
“당가의 가주를 제멋대로 평가한 것도 모자라 맹의 중추로 만들 생각을 하다니, 오만해도 보통 오만한 것이 아니로군.”
“그 오만한 녀석으로 인해 명가가 무너지고 무림 정치의 판도가 뒤흔들리고 있소이다만.”
“……!!”
연위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시오. 나랑 같이 가 볼 곳이 있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