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299)
299화. 종(鐘)이 없는 싸움 (3)
“머리 쓰는 사람에게 있어, 예측 못 한 상황을 목도하는 것은 통렬한 패배감을 느끼는 순간임과 동시에 또 하나의 배움이라 기쁘기 그지없는 순간이기도 합니다만…….”
제갈문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설마하니, 두 분이 함께 제 거처로 오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렇다. 제갈문호의 앞에는 연위와 당관이 앉아 있었다.
벽산연가의 가주 연위.
사천당가의 가주 당관.
두 거물과 개인적 친분을 유지하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
위치도 위치지만, 워낙 다가가기 힘든 성정의 소유자들이라는 악명이 자자했기 때문이었다.
당관이야 말할 것도 없고, 연위 역시 무뚝뚝하기로는 천하에서 손에 꼽히는 인사라고 소문이 파다했다. 그런 두 사람이 함께 군사의 방을 두들기다니, 성천십삼좌라도 놀랄 일이었다.
“많이 놀라셨다면 죄송하오.”
“아닙니다. 그냥 의외였을 뿐이에요.”
제갈문호가 묘한 눈으로 당관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연위가 당관을 끌고 온 듯한데, 당관 성격상 가잔다고 얌전히 따라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신기했다.
제갈문호의 시선을 느꼈는지, 당관이 코웃음을 치며 연위를 보았다.
“뭐 하자는 거요?”
“무엇이 말이오?”
“이곳에는 왜 데려왔냐는 말이오.”
“이제부터 그걸 얘기하면 될 것 같소.”
“뭐라?”
연위가 제갈문호를 보며 말했다.
“내 큰아들에게 들으셨소?”
“어떤?”
연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제갈문호가 깜짝 놀라 당관을 바라보았다.
“맹주 후보로 출마하신단 말입니까?”
“흥!”
당관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연위가 담담하게 말했다.
“당가주께서도 수락하셨소이다.”
“허!”
그 한마디로 제갈문호는 당관이 이전과 많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과연, 사람을 바꾸는 것은 논리가 아닌 인정(人情)이라더니.’
그간 당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그 역시 알고 있었다.
모용군과의 대립, 딸과의 화해 등 어지간한 일은 전부 그의 귀에 들어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관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물이었기에 항상 예의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변할 줄은 몰랐다. 제갈문호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당관을 보았다.
당관의 표정이 대번에 불쾌해졌다.
“계속 그따위 눈으로 볼 거면 난 이만 가겠소.”
“아, 아닙니다. 제가 괜히 가주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군요. 이리 사과드리겠습니다.”
제갈문호가 허리까지 숙이며 공손히 사과했다.
당관의 얼굴에 조소기가 어렸다.
“그 허리가 참으로 유연하시오. 상황에 따라 누구에게든 허리를 굽힐 준비가 된 것 같소.”
대놓고 비꼬는 그였다.
기분이 나쁠 만도 할 텐데, 제갈문호는 오히려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정치하는 사람의 관절은 유연할수록 좋다지 않습니까. 아군에게는 누구보다도 낮은 자세로 임하고, 적에게는 어떤 비수보다도 날카로운 비수를 선물하는 게 이 사람의 신조입니다.”
“거 대단한 신조올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당관 역시 제갈문호를 이해했다. 저 정도 유연함 없이는 무림맹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조종하기가 힘들기도 할 것이다.
그때 연위가 끼어들었다.
“어쨌든, 상황은 전부 이해하셨으리라 믿소.”
“물론입니다.”
“내 큰아들도 부르고 싶지만, 일단 군사께 지금의 상황을 알려 드리는 게 먼저라 생각하여 모시고 왔소.”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잘하셨습니다. 이런 정보는 촌각이라도 빨리 알수록 좋지요.”
당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생각해 보니, 제아무리 정치라 해도 이건 좀 과한 것 같소.”
“무엇이 말입니까?”
“공평무사한 일 처리가 군사의 덕목 아니오? 같은 당파라고 미리 손을 쓰는 것, 이러한 공작(工作)은 모용군 그 개자식이 하는 짓과 다를 바가 없잖소?”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오해십니다.”
“오해라?”
“출마하겠다는 후보 두 분이 제게 왔습니다. 저는 그저 후보분들에 관한 서류의 행정 처리를 맡을 뿐입니다.”
당관의 눈이 빛났다.
“이미 두 명이 다녀갔다고?”
“그렇습니다. 연가주께서 당가주를 내게 데려온 것은, 출마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 내가 제 역할을 못 한다면 뒤에서 힘을 실어 주겠지.”
“그 또한 맞는 말씀입니다.”
“깨끗한 정치가라는 말은 못 듣겠소.”
제갈문호의 눈이 깊어졌다.
“가주께서는 제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오?”
“대답할 말이 곤궁하다면, 직접 말씀드리지요. 저는 무림맹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
“몰랐다면 모를까, 모용군이라는 희대의 재앙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구정물을 뒤집어쓸지언정 움직일 수밖에요. 맹주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출마하는 정도라면 몰라도, 모용군 같은 위험인물의 출마는 걱정을 아니 할 수가 없지요.”
“…….”
“그리고 하나 더.”
제갈문호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같은 당파가 아닙니다. 애초에 당파라는 걸 형성해 본 적도 없지요.”
“뭐라?”
“그저 모용군, 모용가주에게 그리 인식시킬 의도였을 뿐, 실제로 연가주와 제가 합작하여 맹의 향방을 뒤흔들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내가 듣기에는 말장난에 불과하오만.”
“분명 그리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게는 적어도 나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의 선이 있다는 것이지요.”
선(線)이라…….
무림맹에 온 이후로, 선에 관한 얘기를 참으로 많이 듣는다. 모용군도 그러했고, 연가의 망할 큰아들도 그러했다.
제갈문호가 손뼉을 쳤다.
“어찌 되었든, 당가주께서 출마하신다고 하니 이번 맹주 선거가 꽤 치열해지겠습니다. 일단 명부에 이름을 올리겠습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필요한 것이 있소이까?”
“달리 그런 것은 없습니다. 무림맹 특성상, 선거 자금의 상한을 두는 등의 제한을 명시하기가 힘듭니다. 다만 후원자를 이 인(二人)으로 제한하기는 할 것입니다.”
“후원자라.”
“후원자라 함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제갈문호의 눈이 반짝였다.
“선거가 시작되는 순간, 후보 중 누구도 무림맹의 내성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즉, 후보에 관한 여론의 형성은 모두 후원자가 대신해 주어야 하지요.”
“그렇구려.”
“말하자면, 후보의 손발이 되어 움직일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강호에 미치는 영향력이 강한 사람일수록 후보에게는 유리해지겠지요.”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명확한 한계가 없는 싸움이다. 언뜻 보면 후보자들을 내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제한하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서신을 전하거나 정국을 주도하는 것까지 막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후원자의 경우 이 인으로 제한하지만, 그 후원자와 연이 있는 자들이 도와주는 것까지 제한할 방법은 없다.
즉 격식만 차린 채,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는 싸움이란 말이었다.
제갈문호가 당관에게 물었다.
“하면 묻겠습니다. 당가주께서는 후원자로 누구를 택하시겠습니까?”
당관이 인상을 찡그렸다.
“출마자로 이름을 올리러 가는 길이라는 것조차 지금 알았소. 그런 걸 생각할 시간은 없었소만.”
“하면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오늘부로 당가주의 성함을 후보자 명단에 올릴 터이니, 내일 정오까지 후원자를 골라 제게 알려 주시면 됩니다.”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소? 반 각의 시간만 주시오.”
“알겠습니다.”
당관이 연위를 보았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이 사람은 부족한 게 많은 사람입니다.”
“어차피 진짜 맹주가 될 거라 보지도 않고, 그럴 생각도 없소.”
“그래도 이 사람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을 고르는 것이 낫지 않겠소?”
“그대보다 능력 있는 사람을 찾는 것도 힘들거니와, 그런 사람 중에 나와 친분이 있는 이도 없을 거요.”
“허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그럼 두 명의 후원자 중 한 명을 제가 맡겠습니다.”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분을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연위가 당관을 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했소.”
“누구입니까?”
“서역신녀.”
“……!!”
제갈문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연위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당가주.”
“이견은 없소. 마지막 후원자는 서역신녀로 하겠소.”
연위가 물었다.
“혹, 서역신녀와 벌써 만나 보셨소이까?”
당관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대와 함께 보기로 했잖소? 그 솜씨 좋다는 의원의 머리카락 한 올 본 적 없소이다.”
“하, 하면 어찌 후원자로 서역신녀를 택하셨소이까? 아니, 그걸 떠나서 신녀가 거부한다면…….”
“거부하지 못하게, 이 자리가 파하는 대로 곧장 만나러 가십시다.”
“허!”
제갈문호가 입을 열었다.
“아직 제대로 얘기가 되지 않았다면, 내일 정오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알겠소.”
“한데, 하나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뭘 말이오?”
제갈문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서역신녀를 택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물론 그녀가 수락하기 전이니 아직은 후원자가 아닙니다만.”
당관이 피식 웃었다.
“선거 후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여론이라 하지 않았소?”
“물론 그렇습니다.”
“당금 천하에, 그 의신회인지 뭔지 하는 정신 나간 의원 연합을 제외하면 서역신녀만큼 사랑받는 의원이 몇이나 되겠소?”
“……!”
“협명(俠名)으로 따지자면 서역신녀의 이름값은 구파일방의 수장에 필적하거나 그 이상이오.”
“당가주의 말씀이 맞습니다만, 서역신녀의 명성은 무림보다는 민간에 훨씬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차라리 통천신의 정도 되는 분이라면 모를까…….”
“됐소. 그건 이쪽이 알아서 할 테니, 일단 그렇게 알고 계시구려.”
“……허허, 이 사람은 가주께서 남은 한 사람으로 연 군장을 꼽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당관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 싸가지 없는 애새끼한테 후원자 자격까지 주고 싶지 않소이다. 게다가, 아비가 이미 내 후원자이거늘 제 놈이 안 도와주고 배기겠소?”
맞는 말이었다.
하기야 애초에 당관더러 맹주 선거에 출마하라고 말한 사람이 연호정이었다. 굳이 후원자로 내정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밀어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봤을 때, 그놈에게 필요 이상의 감투는 오히려 행동의 제약만 더해질 뿐이오. 놈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신분일 때 더 위험하지.”
당관이 차갑게 웃었다.
“천하의 당가주를 후보로 밀었으니,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 보라 하시오.”
그 짧은 시간, 거기까지 계산한 걸 보면 확실히 당관도 보통은 아니었다.
“자, 그럼 가십시다.”
당황한 연위가 어정쩡하게 일어났다.
“벌써 가시오?”
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귀하가 말하지 않았소? 연호정 그놈, 나를 무림맹 권력 중추로 만들 생각이라고.”
“…….”
“제멋대로 도와준다는 것까지 막을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내 인생은 내가 주도하오. 누군가에게 끌려다니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은 없는 법이오.”
당관이 몸을 돌렸다.
“서역신녀 앞으로 길을 잡아 주시오. 오늘 내로 끝냅시다.”
뒷짐까지 턱 하니 지고 방을 나서는 당관의 뒷모습은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연위와 제갈문호가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의 눈이 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