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330)
330화. 어둠이 돌아오다 (5)
우웅. 우우웅.
연가신단이 나직이 울음을 토해 냈다.
거의 네 시진에 육박하는 운공조식을 마무리하니 연가신단에서 반응이 왔다. 내상 치유가 막바지에 이른 것이다.
“벌써 오전이군.”
밤을 꼬박 새웠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탄력을 받은 사신기(四神氣)가 체내 장기를 활성화해 피로를 날려 주었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연호정은 곧장 멸사군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 인근에 다다르자, 묵비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북(北)! 살(殺)!”
치리리리리링! 화아악!
오십 군병들의 살기 넘치는 병장기술에 바람이 비명을 질렀다.
제각기 구사하는 무공은 다르지만, 놀랍게도 진형(陣形) 자체의 일치감이 대단했다.
묵비가 다시 외쳤다.
“서(西)! 압(壓)!”
후우우웅! 쿠르르릉!
군병 모두가 빠르고 자연스럽게 방향을 전환했다.
이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저마다 익힌 보법이 다르고 실력이 다르며 내공도 다를진대, 방향을 전환하여 병기를 휘두르는 그 순간까지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인다.
극한의 훈련으로 이상적인 호흡을 보여 주는 그들이었다. 아직 실전에서 써먹어 보진 않았지만, 집단 전투 능력이 예전보다 배는 더 상승한 듯했다.
‘언제 저렇게까지?’
연호정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제갈세가의 최고급 진법 중 몇 가지를 분해하여 기초를 조합, 멸사군에 맞도록 개량했다고 들었다.
아무리 익히기 쉽게 변형했다고 하지만, 시간과 구성원들 간의 능력 편차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게 빠른 성취였다.
“정(正)!”
촤르륵!
한참 동안 사방을 몰아치던 멸사군이 순식간에 연무장 중앙에 도열했다. 자연스럽고 깔끔한 동작이었다.
연호정이 웃으며 연무장으로 다가갔다.
묵비가 입맛을 다셨다.
“왔어요?”
“엉.”
“다 끝나니까 오시네.”
“그러게나 말이다. 물론 노린 건 아니야.”
“흥.”
연호정이 멸사군을 바라보았다.
군병들 몇이 반갑다는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하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진주(陣主)가 해산을 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묵비가 외쳤다.
“해체.”
기다렸다는 듯 군병들이 자세를 풀었다.
“군장님!”
“헐! 너무 오랜만 아닙니까?”
“어디서 놀다가 이제야 와요?!”
“얼굴 까먹겠네, 얼굴 까먹겠어.”
군병들이 저마다 반가움을 표하며 연호정에게 다가왔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수하들이었다. 연호정의 얼굴에도 모처럼 밝은 웃음이 들어찼다.
“미안하다. 항상 같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저런 일이 많았어.”
농담이랍시고 툴툴거렸는데 이런 식으로 반응하면 무안해지기 마련이다.
보통은 그렇다.
“당연히 그래야지! 책임을 잊고 있었다고!”
“참나, 우리 몰래 좋은 거 먹고 다녔나 보다. 얼굴에 살 오른 거 봐.”
“혹시 약한 애들 두들겨 패러 다닌 겁니까? 신수가 훤해.”
무안해하지 않고 한술 더 뜬다. 군병들의 그러한 모습에 연호정은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이놈들아.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얼마나 바빴는지 아냐. 해결할 일이 한두 개가…… 어라?”
연호정이 눈을 끔뻑였다.
“뭐야? 저 녀석 왜 여기 있대?”
연무장 끝, 돌담에 강량이 기대어 서 있었다. 강량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옥청이 말했다.
“저희랑 돌아가면서 비검(比劍)을 나누고 있습니다. 강제(姜弟)의 검술은 놀랍더군요. 덕분에 저희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물론 그 자신에게도요.”
“호오, 비검이라?”
연호정의 미소가 짙어졌다.
‘기특한 녀석.’
알아서 성장할 방법을 찾아낸다. 그것은 재능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다.
그때, 묵비가 끼어들었다.
“그간 업무를 꽤 소홀히 하셨으니, 지금이라도 군장으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시는 건 어때요?”
“그래야지.”
“당장요.”
“당장? 당장 어떻게?”
군병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묵비가 외쳤다.
“정(正)!”
파라라락!
멸사군이 연무장 끝으로 이동하며 진형을 형성했다.
오와 열이 딱 맞게 도열한 게 아니었다. 얼핏 보면 허술해 보일 정도로 자연스러운 도열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질만큼은 남달랐다.
후우우우웅.
차가운 산바람이 순식간에 뜨겁게 달궈지는 듯했다.
연호정이 묵비를 바라보았다.
묵비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첫 실전으로 군장님만 한 상대가 없잖아요? 한번 어울려 주시죠.”
결국 연호정도 피식 웃어 버렸다.
“못 말리겠군.”
그가 연무장에 올라 멸사군의 반대편에 섰다. 연무장 자체가 워낙 넓어서 거리가 이십 장은 벌어져 있었다.
묵비가 물었다.
“광룡부는요?”
“애들 죽일 일 있냐.”
촤르르르륵!
연호정의 소매 안에서 흑회색 철쇄가 흘러나왔다.
“이걸로 하지.”
“질 텐데.”
“당하면 내 실력 부족인 셈 쳐. 아무리 실전 같은 비무라도, 애들 팔다리 날릴 순 없잖아.”
“엄청 생각해 주시네. 범운가 범온가 하는 소림승은 팔을 분질렀다면서.”
“팔을 자른 건 아니잖아. 그래서, 언제 시작할 거야?”
묵비가 피식 웃었다.
“동(東), 세(勢).”
차아아아앙!
제각기 병장기를 뽑아 든 군병들.
그들의 눈빛이 일순 돌변했다.
‘…….’
연호정의 얼굴도 진지해졌다.
‘요것들 봐라?’
자신을 노려보는 군병들의 눈빛은 투기(鬪氣)와 위압감으로 가득했다. 그 이외엔 어떠한 감정도 엿보이지 않았다.
흥분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긴장을 풀지도 않았다. 진법이 펼쳐진 순간 철저하게 진법대로 적을 상대할 뿐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연마되어 있었다.
“좋군.”
척.
연호정이 자세를 낮추었다.
“아주 괜찮아.”
묵비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직공세(直攻勢).”
파아아아악!
묵비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멸사군 오십 군병들이 일제히 연호정을 향해 뛰어들었다.
마주 달려 나가려던 연호정은 순간 깜짝 놀랐다.
우우우우웅!
보이지 않는 기운이 몸 곳곳으로 침투하여 뼈, 혈관, 근육을 조금씩 옥죄이는 것 같았다.
‘진세(陣勢)가……?!’
강하다.
그저 진형을 형성하며 달려드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기백이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그 기백은 이내 무형의 진기가 되어, 상대의 육신을 옭아매는 기압을 형성하고 있었다.
단순히 병장기를 휘두르는 것만이 공격인 게 아니었다. 그들의 위치가, 한마음 한뜻으로 발산하는 기세 자체가 또 하나의 무기인 것이다.
봐주고 말고 할 것도 없고, 체면을 차릴 것도 없었다.
위이이이잉!
연가신단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막강한 진기를 뿜어냈다.
후우우우웅!
연가신단, 용포신공의 탄력을 받아 뿜어진 백호기가 거세게 울부짖었다.
크허어어엉!
저 멀리 어디선가 집채만 한 대호가 작정하고 포효하는 것만 같았다. 연무장을 넘어 반경 수십 장 너머까지 퍼져 나가는 호왕의 울음소리가 전율을 일으켰다.
연호정이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쿵!
강력한 일 보(一步)와 함께 좌장(左掌)이 전면으로 향했다. 연가 비전의 반룡장(反龍掌)이었다.
반룡장은 공격용으로도 일품이지만, 반격 시에 그 진가가 드러나는 절정의 무공이었다.
그럼에도 연호정이 반룡장을 쓴 것은, 진세 자체가 하나의 공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정확했다.
콰르르르릉!
진세와 장력이 충돌하며 엄청난 폭음을 터트렸다.
천둥소리보다도 더 큰 폭음이었다. 강렬한 충격에 멸사군의 돌진 속도가 살짝 줄어들었고, 연호정이 세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연호정의 눈이 형형해졌다.
‘엄청난 힘이군.’
절정고수 오십 명이 하나가 되어 쏟아 내는 기파였다. 실제 공격을 가한 것도 아닌데, 나름대로 힘을 실어 펼친 반룡장이 별반 위력도 못 내고 밀린 셈이다.
기세로도 이 정도인데, 실제 병장기를 부딪치면 얼마나 강할까?
화르르르륵!
새하얀 광풍이 한순간 시뻘건 불꽃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연호정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파아아앙!
적백의 불꽃을 일으키며 전진한다. 주작공의 혈익휘천이었다.
진법의 기압이 워낙 강해서 이전과 같은 속도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벼락처럼 빨랐다. 연호정이 순식간에 멸사군의 전면으로 치고 들어갔다.
그가 힘차게 주먹을 휘둘렀다. 보법은 주작, 권법은 백호의 호왕구벽세였다.
선두의 여국이 냉정하게 검을 휘둘렀다.
쩌어어어어엉!
‘흡!’
연호정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뭐야, 이게?!’
무서운 힘이었다.
교룡쇄로 감은 주먹에 강렬한 통증이 남았다. 심지어 용포신공과 백호기로 무장한 주먹인데도!
연호정의 몸이 무섭게 회전했다.
파파파파팡!
군병 다섯을 동시에 견제하기 위한 각법이었다. 실전 박투형 각법이 아닌 자유로운 형(形)의 청룡공, 청룡도해(靑龍渡海)였다.
하지만.
퍼퍼펑!
연호정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군병들의 힘이 워낙에 강했다. 이 악물고 힘을 줬으면 두 명의 가슴팍을 걷어찰 수 있었겠지만, 그래 봤자 타박상에서 끝난다. 그 대가로 연호정의 몸에는 칼자국이 새겨졌을 것이다.
‘이럴 수가.’
연호정은 정말 크게 놀랐다..
‘고작 진법 하나 수련했다고 성질이 다른 기를 하나로 모아 증폭할 수 있는 건가?!’
흑암제 시절에도 이런 진법은 겪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비명과 살점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쓸 만한 진법은 아니었다. 이백, 아니 삼백의 적까지는 어떻게든 막을 수 있어도, 그 이상부터는 효용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대 다(多)의 승부라면 얘기가 다르다.
묵비가 외쳤다.
“참(斬)!!”
번쩍!
도검(刀劍)의 광채들이 허공을 갈랐다.
연호정의 몸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퍼버버버버벅!
연무장 바닥에 수십 개의 도검흔이 생겨났다.
군병 개개인의 본래 실력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위력이었다. 서로가 진기의 힘을 증폭시켜 발경(發勁)의 위력을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장난 아니로군.’
촤르륵!
허공 높이 뜬 연호정, 어느새 그의 손에 교룡쇄가 길게 잡혔다.
묵비가 외쳤다.
“천충(天衝)!!”
번쩍!
수십 개의 도검기, 십여 개의 권풍이 연호정에게 쏟아졌다.
연호정이 교룡쇄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퍼퍼퍼퍼펑!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는 교룡쇄의 방어막에 검기와 권풍이 폭죽 터지듯 부서지며 비산했다.
‘이익!’
연호정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불거졌다.
용포신공의 힘을 쥐어짜 막았는데도 상반신 전체에 충격이 전해졌다. 힘이 더해져도 내공의 밀도가 차이 나기에 막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어야 하는데, 온몸이 멍이 든 것처럼 욱신거렸다.
휘이이이이이잉!
연호정의 몸 전체에 새하얀 광풍이 일었다. 백호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진짜로 간다.”
퍼어어어엉!
연호정의 몸이 무지막지한 속도로 떨어졌다.
콰아앙!
연무장 바닥 전체가 뒤흔들릴 정도의 천근추였다.
단숨에 대지로 내려선 그가 재차 교룡쇄를 휘둘렀다.
퍼퍼퍼펑! 쩌어어엉!
교룡쇄는 강했다.
마치 채찍을 휘두르듯 팔방을 점하며 후려치는데, 타점에 이르기도 전에 공기 터지는 소리가 났다. 속도와 위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막힌다.
치링! 쩌어엉! 쩌저저저정!
화산, 곤륜, 무당의 절정 검법이 교룡쇄의 충격파를 일차적으로 차단했다.
후우우웅! 퍼퍼퍼펑!
연호정의 몸이 흔들렸다.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온 장력과 권풍에 맞은 것이다.
빗맞았지만, 그 충격은 상당했다. 반응 속도가 조금만 느렸으면 삼단전(三丹田)이 흔들릴 뻔했을 정도로 정교한 공격들이었다.
‘대단해.’
교룡쇄와 역동적인 권각(拳脚)으로 멸사군을 공격하는 연호정의 얼굴에, 모처럼 즐거운 감정이 떠올랐다.
‘짧은 시간에 용케 이 정도까지……!’
그때였다.
카카캉!!
섬뜩한 소리였다. 교룡쇄의 원형 방어를 뚫고 들어오는 소리였다.
깜짝 놀란 연호정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미파 최고의 실전 창술, 속가제자 중 최고의 실력을 지녔다는 송연경의 항마창이 섬전처럼 날아들며 그의 목을 노렸다.
피하기에는 늦었다. 연호정의 두 팔이 뱀처럼 휘어지며 철창을 휘감았다.
그의 두 손에서 막강한 발경이 터져 나왔다.
퍼어어엉! 퍼억!
철창을 튕겨 내는 과정에서 등판에 권풍 세 발을 맞았다.
울컥!
한 차례 피를 토한 연호정이 백호군림보를 밟았다.
콰아아앙!
“크윽!”
“이, 이런!”
무지막지한 전진으로 군병 다섯을 튕겨 낸 연호정이 잽싸게 연무장 끝에 도달했다.
“후욱.”
입가에 흐른 피를 닦아 내는 연호정.
그의 표정이 점차 환희로 물들었다.
“좋은데!”
멀리서 연무장 위를 바라보며 미소 짓던 묵비는, 순간 표정을 굳혔다.
‘어?’
극도로 단련된 그녀의 눈이 연호정의 눈빛을 포착했다.
‘뭐지?’
점차 새까만 어둠으로 물드는 눈빛.
지금껏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광기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
순간 묵비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연호정이 발산하는 기가 점차 살기를 띠기 시작한 것이다.
“덤벼, 인마들아!”
파바박!
멸사군이 재차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묵비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멈춰!!”
연호정의 주먹이 허공을 꿰뚫었다.
콰르르릉!